9화 선택2020.12.21.
누구한테 팔지? 육천만 원 정도의 대금을 준비할 수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강정휘뿐이다. 하지만 강정휘에게 이 그림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오직 돈으로만 가치를 평가할 사람이다. 그리고 육천만 원의 수익 정도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선택이……. 아! 있구나. 황덕현! 황덕현의 뒤에서 후광이 비추던 것까지 함께 떠올랐다. 그래! 그게 어쩌면 신의 계시였을지도 몰라! 아니 안경의 계시! 황덕현한테 연락하라는! 지나친 비약인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황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갑작스럽지만 보여드리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 액자를 들고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황덕현의 옆에는 뿔테안경에 치마 정장을 입은 여자분 한 명이 서 있었다. 황덕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제 비서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지감입니다.”
“이시연입니다.”
나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다. 날 보는 이 비서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어쩌면 나 때문에 황금 같은 토요일 오전에 소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날 좋은 눈으로 볼 수가 없지. 황덕현이 액자를 보면서 말했다.
“그림 좀 보죠.”
“아…… 네…….”
거실 탁자 위에 액자를 올려놓았다. 황덕현은 일단 그림을 훑어봤다. 나는 재빨리 설명을 붙였다.
“긍재의 그림입니다. 아시겠지만 신윤복 김홍도와 함께 3대 풍속화가로 뽑혔죠. 단원의 영향을 받아 아류라는 빈정거림을 사기도 했구요.”
설명을 하는데도 이 비서는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쏘아봤다. 황덕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좋은 물건 같군요. 정확하게는 감정을 받아 봐야겠지만……. 탑 옥션에 위탁하실 생각인가요?”
아, 맞다. 이분 탑 옥션 대표였지. 잠시 잊고 있었다.
“아니요.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뜻이죠?”
“사정이 있습니다. 오늘 오후 12시까지 육천오백만 원을 마련해야 해서요.”
육천만 원으로 말하려다 육천오백만 원으로 바꾸었다. 깎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어쨌든 육천만 원 이상에만 팔면 미션은 성공하는 거다.
“그러니까 한지감 씨는 지금 나한테 이 그림을 팔려고 왔다는 겁니까?”
등 뒤에서 땀이 흘렀지만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네.”
“하지만 물건을 거래하기 전에 감정이라는 절차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려고 온 겁니다. 무리라는 걸 압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것이 더 일리 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게 주어진 이 기회를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나는 간절했다. 황덕현이 그런 나를 지그시 보다 입을 열었다.
“사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환희의 미소를 짓는 나와 달리 이 비서의 얼굴은 굳어졌다.
“대표님. 너무 성급…….”
나직이 말하는 이 비서를 황덕현이 막았다.
“이따가 이야기하지.”
그림을 보니 메시지가 떴다. [미션을 성공했습니다.] [미션에 성공하였기에 3단계 ‘최고가’가 제공됩니다.] 예스!!! 이제 난 유물을 판매할 수 있는 최고가까지 볼 수 있다. 골동상에게 이것만큼 좋은 정보는 없었다. [ 100,000원 | 진 | 80,000,000원 ] 최고가가 팔천만 원인 작품이었구나. 좀 아쉽네. 하긴 급하게 파는 입장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그때 황덕현이 말했다.
“12시 전까지만 입금하면 됩니까?”
“네! 여기로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내가 메모지를 내밀었다. 메모지를 받은 황덕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여기로 입금하면 됩니까?”
“네!”
* 나는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명품 골동상. 그 촌스러워 보이던 이름이 오늘은 정말 친근하게 느껴졌다.
“내가 왔다!”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언제나처럼 계산대에 서 계셨다. 긴장하셨지만 애써 담담한 척하시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됐냐?”
나는 당당하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드렸다.
“육천오백만 원, 보이시죠?”
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신 모양이었다. 하긴, 운이 좋긴 했다. 어제 배가 고파서 설렁탕집에 가지 않았다면 오천오백만 원을 얻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눈에 의심이 어렸다.
“호리다시를 한 거냐?”
“…….”
“……얼마에 그림을 샀어?”
“육십만 원이요.”
“지감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아들이 우려했던 대로 이익만 취했다는 것이 적잖이 충격인 듯했다. 내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십만 원에 살 뻔했죠.”
“응?”
“육십만 원에 살 뻔했다구요. 사진 않았지만.”
“그럼 얼마에 샀는데?”
“안 샀어요.”
“그럼 이건 뭔데?”
나는 다시 아버지에게 다시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입출금 내역이 찍힌 통장을 말이다.
“이거 제 통장 아니에요. 설렁탕 사장님 선옥자 씨 통장이지.”
캡처본이었다. 아버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어떻게 된 거냐?”
“육십만 원만 주고 그림 가져가라고 하는데 속에서 막 찔리더라구요. 가치를 몰랐으면 몰랐지, 육천만 원짜리 그림인 줄 뻔히 알면서 육십만 원 주고 산다는 게. 아버지가 말씀하신 노도가 생각났어요. 오래된 가짜만 사람한테 상처를 내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옥자 씨한테 말씀드렸어요. 괜찮은 물건인 것 같으니 제가 사는 것보단 중개를 하는 게 좋겠다고.”
“지감아…….”
아버지가 일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그렁한 눈이 되었다. 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오천만 원을 만들어오는 거였지, 그게 다 제 이익으로 갖겠다고 한 게 조건은 아니었잖아요. 그래도 손해본 건 아니에요. 중개수수료로 20%를 받겠다고 했거든요. 천삼백만 원 생기는 거…….”
말을 끝내지 못했다. 아버지가 나를 안아버리셨기 때문이다. 좀 놀랐다. 아버지가 날 안으신 건 어머니 장례식 이후 처음이었다.
“아버지……?”
“지감아……. 아버지가 미안하다. 아버지가 널 너무 못 믿었어. 흐윽…… 흐윽…….”
흐느끼는 소리가 울렸다. 따듯한 체온이 전해졌다. 아버지는 계속 두려우셨던 것이다. 돈을 읽어 주는 안경이 모든 것을 돈으로 보이게 할지도 모른다고. 조금은 알 거 같았다. 나도 그 그림을 강정휘에게 보내기 싫었으니까. 나는 목이 메는 걸 간신히 추스르고 말했다.
“아버지. 이번에 확실히 느꼈어요. 골동품을 돈으로만 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요. 저 이제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래서 왜 이 물건이 가치 있는 건지, 그래서 어느 정도 가격인지 안경이 없이도 알 수 있도록 할게요.”
아버지가 벌게진 눈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자!”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였다. * 서재에서 매출 보고서를 보던 황덕현이 이마를 찌푸렸다. 매출액이 낮아서가 아니었다. 이 비서가 앞에 서서 시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그렇게 돈 주실 거면, 절 뭐하러 부르셨습니까?”
황덕현이 고개를 들어 불만 가득한 이 비서의 얼굴을 봤다.
“그러니까 부르지를 말든가, 왜 불러서 의견을 존중 안 하냐 이거지?”
조금 표현을 고를 만도 하건만 이 비서는 거침없이 말했다.
“네, 정확히 그렇습니다.”
“이 비서, 내가 이 비서의 의견을 존중하긴 하지만 말이야. 어디까지나 최종 결정권자는 나잖아. 그리고 내가 회사 돈을 썼어? 내 자비로 샀잖아.”
“하지만 회사에 위탁하실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좋은 작품이니까.”
“그렇다면 감정을 맡기고 나중에 입금하셨어도 될 일이었습니다.”
“한지감 씨가 원한 건 바로 입금하는 거였잖아.”
“그렇다고 해도…….”
그때 딩동 하고 벨이 울렸다. 잘됐다 싶은 황덕현이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왔네, 이 비서.”
열을 받은 이 비서가 입을 오물거리곤 자리를 떴다. 잠시 후 이 비서는 김도균과 함께 돌아왔다. 김도균은 마른 근육질에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예술적인 예민함이 연상되는 그런 외모였다. 차가운 인상이 잘 어울리는 그였지만 웬일인지 상기되어 있었다. 좋은 미술품을 봤을 때 그는 저렇게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그림 누가 가져온 거야?”
“회사일로 왔으면 존댓말 좀 씁시다, 경매 총괄님.”
김도균, 그는 탑 옥션의 경매 총괄이었다. 원래 런던에서 스페셜리스트로 일하던 그를 황덕현 대표가 한 달 전 한국으로 데려왔다. 현대미술의 성지 런던에서 세계적인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들을 다룬 이력 때문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런던에서 상대한 고객들이 보유한 고가의 작품을 탑 옥션에 위탁해서 이슈 몰이를 시키고 경매 파이를 키우겠다는 야심도 들어 있었다.
“아, 형! 말 돌리지 말고.”
“아는 골동상한테 소개받은 거야. 이제 본론을 말해 보지. 진짜야? 가짜야?”
“진짜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흥분을 했겠어?”
“흐음…….”
황덕현이 못 믿겠다는 듯 김도균을 봤다. 김도균이 발끈했다.
“뭐야. 그 눈빛은? 지금 내 감정을 못 믿겠다는 거야?!”
“아니, 뭐 못 믿겠다는 건 아니고. 아무래도 고미술 쪽은 약할 거 아니야.”
“형, 나 김도균이야! 내가 아버지 따라서 본 한국화만 천 점이 넘어!”
김도균의 아버지는 유명 한국화 화가였고, 그래서 그는 자연스레 한국화를 보면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감정은 전문적인 분야니까 그러는 거 아냐.”
“날고 기는 감정 위원이 와서 봐도 다 진작이라고 할 거야. 호응도에서 보여준 매의 모습이 더 세밀해졌을 뿐만 아니라 매서워졌어. 그 느낌을 제대로 구현해 낸 거지. 겸재가 <금강전도>에서 보여준 금강산 실제와는 다르지만 그 느낌을 제대로 보여준 것처럼!”
흥분한 김도균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흥분 좀 가라앉히고 가봐. 나 서류 보느라 바쁘다.”
“아이구! 나도 바쁘네!!”
김도균이 돌아서 이 비서에게 인사했다.
“그럼 이 비서 고생해요.”
“배웅하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있어요.”
손사래 치는 모습이 진심임을 말해주어 이 비서는 걸음을 멈췄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김도균이 방을 떠나고 이 비서가 다시 책상 앞에 섰다. 그리곤 아까처럼 빤히 황덕현을 봤다.
“또 뭐, 왜? 진작이라잖아.”
“이번은 진작이지만 다음은 위작일 겁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어.”
“제 말대로 돈이 급해서 온 거였잖습니까.”
“하지만 자기한테 입금하는 게 아니었어. 중개를 했을 뿐이야.”
“돈이 급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두고 보자는 거잖아. 이 비서 그거 알아? 좋은 골동품을 고르는 법과 좋은 사람을 고르는 법이 닮아 있다는 거.”
“잘 모르겠습니다.”
“골동상들이 어떻게 좋은 물건을 고르는 안목을 기르는 줄 알아? 간단해. 가짜를 구매하고 데는 경험치가 쌓이면서 안목이 길러지는 거야. 사람도 마찬가지야. 그런 투자가 없이는 알 수가 없는 거라고.”
“…….”
이 비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 비서를 보다가 픽 웃고는, 황덕현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 지하철에서 내려 날아갈 듯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무언가 성취해 낸다는 것이 이토록 짜릿하다니. 원래 목표인 육천만 원보다 오백만 원을 더 받아내었고, 양심에 찔리지 않는 중개방식을 썼다. 설렁탕 가게 사장님은 입금이 되자마자 중개비인 천삼백만 원을 바로 입금시키셨다. 두둑해진 통장도 좋았지만 그것보다 좋은 건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뼘 정도는 자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앞으로 더 커야 하지만!’
시간을 확인했다. 곧 경환의 알바가 끝날 시간이었다. 자취방 근처였기 때문에 나는 잰 걸음으로 달려갔다.
“경환아!”
“형! 여기는 웬일이야?”
“그냥, 술이나 한잔하자고. 비싼 데로 가자. 내가 오늘 쏠게.”
“그래! 대단한 안목을 가진 형한테 술이나 얻어먹자!”
그렇게 경환이 녀석이랑 껄렁껄렁 술집을 향해 걸어갈 때였다.
“저기, 총각!”
큰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렁탕집 할머니 사장님이 숨을 헉헉대며 달려왔다.
“사장님.”
“언제 지나나 계속 망 봤네. 정말 고마워. 나는 그 그림이 그렇게 귀한 그림인지도 몰랐네.”
덥석 할머니 사장님이 내 손을 잡았다. 얼굴이 간질간질했다. 좋으면서도 민망했다.
“에이,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사겠다는 분한테 보여드린 것뿐인데요.”
“그래도. 고마워서 그렇지.”
그때 뒤에서 누군가 헉헉거리면서 다가왔다. 어제 봤던 식당 아주머니였다. 손에는 꽉 찬 봉지 네 개가 들려 있었다. 아주머니가 그 봉지를 내 손에 쥐어줬다.
“이러실 필요 없는데……. 중개비도 주셨고.”
“그냥 늙은이 마음이야. 그러니까 잘 먹어줘.”
할머니 사장님이 환하게 웃었다.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네. 잘 먹을게요.”
할머니 사장님과 아주머니가 가시고 경환이 봉지 안을 확인했다.
“헉! 수육에 설렁탕에, 완전 양 많아! 형, 오늘 술은 집에서 먹어야겠는데?”
“그래, 그러자.”
술을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판을 벌렸다. 안주가 좋아서인지 기분이 좋아서인지 술이 정말 술술 들어갔다. 얼큰하게 술이 올랐을 때 경환이 헤실헤실 웃으면서 물끄러미 나를 봤다.
“형. 아까 되게 멋있었다?”
“뭐가?”
“설렁탕집 할머니가 막 고맙다고 했잖어!”
쑥스러워 손을 훼훼 저었다.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그래두, 형. 멋있어. 역시 이 김경환이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까. 형이 잘돼서 너무 좋아.”
“아직 시작하는 단계인데 뭐.”
“그래도! 아무나 그렇게 도자기도 턱 팔고! 그림도 턱 팔고! 하는 거 아니잖아!”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지. 요새 좀 살 맛 난다.”
“형, 빨리 자리 잡아. 그래서 나 좀 이끌어주라. 응?”
“알았다 알았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 혼자서는 힘들지만 안경과 함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분위기를 깨고 핸드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김 비서에게 온 전화였다. 직감적으로 감정할 물건이 생겼다는 것을 느꼈다. 김 비서와 나 사이에 오갈 이야기란 그뿐이니 말이다.
“네, 김 비서님.”
[내일 급하게 봐야 할 물건이 있다. 단원의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니, 기대감이 차올랐다. 풀어졌던 눈빛이 다시 예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