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현성 이수지 (11/226)

11화 현성 이수지2020.12.26.

16560244673265.jpg“그 이수지? 현성 그룹 막내딸 이수지 말하는 거야?”

경환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어찌나 놀랐는지 눈 코 입, 하여간 구멍이란 구멍은 다 크게 열려 있었다. 대조적으로 나는 힘이 빠져 있었다.

16560244673269.jpg“그래. 그 이수지.”

16560244673265.jpg“우와, 이제 완전 어나더 레벨 됐네? 재벌이랑도 알고 지내는 거야?”

16560244673269.jpg“경환아. 내가 이수지랑 친구를 먹었냐? 일하는 거야, 일. 그것도 팔려서!”

이수지가 나를 하루 빌리고 싶다고 했고, 강정휘는 내 의사도 묻지 않은 채 좋다고 했다. 하, 기가 막혀서……. 사람을 앞에 두고 한번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때 난 강정휘의 눈빛을 봤다. 이수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다. 망할 할망구! 자기가 살자고 나를 팔아?

16560244673265.jpg“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이번에 이수지 눈에 띄면 좋은 고객 확보하는 거잖아.”

16560244673269.jpg“잘 보이면 그렇겠지. 근데 찍히면? 까닥하다간 나 이번을 끝으로 골동상 못 할 수도 있다고!”

16560244673265.jpg“에이, 형답지 않게 왜 그렇게 엄살을 부리고 그래?”

16560244673269.jpg“엄살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니가 이수지를 못 봐서 그래. 자기 부모뻘이 말하는데도 그만 얘기하라고 손을 딱 들더라니까. 그런 성격에 내가 잘못하면 가만히 있겠냐고.”

아직 내 안목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물론 안경을 통해 구매한 가격, 진위 여부, 판매 최고가를 알 수 있긴 하지만, 그것이 안목은 아니다. 거기다가 아까, 이수지의 뒤에 서 있던 개인 감정사가 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하긴,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밥그릇 뺏는 놈으로 보였겠지.

16560244673265.jpg“형은 잘할 거야!”

경환이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무심코 경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오늘 내내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좋다.

16560244673269.jpg“무슨 좋은 일 있냐? 혹시 취직 결정됐어?”

16560244673265.jpg“아니.”

부정형의 대답을 하면서도 헤실헤실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이 정도인데 취직이 되지 않은 거라면, 남아 있는 답은 하나였다.

16560244673269.jpg“너 혹시 그 여자 번호 받았냐?”

16560244673265.jpg“응, 받았어!”

경환이 일하는 편의점에 매일 오는 여자 손님이 있다. 전해 듣기론 청순한 외모에, 화통과 한국화 화집을 갖고 다닌다고 했다.

16560244673269.jpg“야, 이 자식! 번호는 어떻게 받았냐? 1년 동안 말도 제대로 못 걸더니.”

16560244673265.jpg“얼마 전에 말 걸었어! 1년 동안 계속 봐서 그런지, 경계하지 않더라구. 그리고 오늘은 번호 받았지!”

16560244673269.jpg“오호, 잘했다. 잘했어!”

16560244673265.jpg“한국화 그린대. 대학원생이고. 헤헤.”

16560244673269.jpg“그렇게 좋냐?”

16560244673265.jpg“응. 엄청 좋아!”

최근에 취업 때문에 시무룩하던 경환의 얼굴이 활짝 펴서 마음이 놓였다. 아…… 난 마음 놓을 때가 아니구나. *

16560244673269.jpg“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고개를 들어 10층 정도 되는 탑 옥션 건물을 봤다. 날렵한 검은 색 건물은 도베르만의 털처럼 매끈했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사람들만 들어갈 것 같은 느낌.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그나마 갤러리보다는 접근이 쉬워 보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 바닥이고 벽이고 할 거 없이 대리석이 쫙 깔려 있고, 한편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었다. 프리뷰 전시장에서 보기로 했기에 나는 바로 이동했다. 전시장이 있는 5층에 도착했을 때 무음으로 해놓은 핸드폰 액정이 번쩍였다. 나까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가볍게 통화를 거절했다. 그리고 아예 차단 번호로 등록했다.

16560244673269.jpg“도대체 몇 번을 전화하는 거야.”

어제부터 미친 듯이 전화가 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강정휘가 이수지에게 이십구 억에 청자를 팔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16560244673269.jpg“강정휘가 하도 떠들고 다니니까…….”

그녀는 이곳저곳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질을 해댔다. 결론적으로 그 자랑이 이런 불상사를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전시장을 봤다. 화이트 톤의 벽에 다양한 한국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초상화, 난 그림, 모질도, 산수화를 비롯한 다양한 그림들과 도자기 몇 점이 보였다. 고미술품이 전시장 가득 차 있었다. 근현대 미술은 다른 곳에 전시되기에 이곳에는 없었다. 눈에 익숙해진 유물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확인했다. 확실히 인터넷상에서 섬네일 이미지로 본 것과 실물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흘렀을까?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수지가 수행원, 개인 감정사와 함께 내리는 것이 보였다. 전시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연예인 같은 또렷한 이목구비 때문인지, 뒤에 있는 사람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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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긴장감을 숨긴 채 다가가 인사를 했다. 이수지가 힐끗 날 보고 말했다.

16560244738524.jpg“왔네.”

내가 키가 훨씬 큰데도 이수지는 결코 올려다보지 않았다. 마치 한 번도 누군가를 올려다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다. 온 세계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그런 태도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내 신경을 뺏어가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이수지의 뒤에 서 있는 개인 감정사였다. 그는 자신의 밥줄을 탐낸 존재를 보듯 이글대는 눈으로 쏘아봤다.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억울했다. 이수지는 왜 이곳에 나를 불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천천히 전시장 안을 둘러봤다. 그렇게 한 바퀴를 다 돌고서도 이수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인내심이 바닥나 입을 열었다.

16560244673269.jpg“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수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봤다. 한번 쓰윽 훑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16560244738524.jpg“아버지 선물 사려고. 추천 좀 해봐.”

내가 두 살 많은데도 말을 까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나를 철저히 아랫사람으로 봤다. 아, 정말 싸가지 하곤……. 이래서 인성이 중요하구나. 인형 같은 외모가 전혀 안 보이고 싸가지 없는 태도만 눈에 들어왔다. 개인 감정사도 있으면서 꼭 날 불러서 물어봐야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상대는 현성 그룹의 막내딸이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채 말했다.

16560244673269.jpg“그럼 혼자 한번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16560244738524.jpg“그래.”

돌아선 나는 재빨리 폰으로 이수지의 아버지, 이재근을 검색했다. 혼자 둘러보는데 전시장을 울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급함에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16560244738557.jpg“저는 이 청화백자를 추천드립니다. 18세기 조선시대 왕실에서만 사용된 물건이라, 현존하는 건 국내외 통틀어 11점에 불과합니다. 이 발가락 5개가 보이시죠? 이것이 바로 왕실에서 사용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이런 물건이야말로 회장님의 품격에 맞지 않겠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수지의 개인 감정사였다. 아까 슬쩍 봤는데 저 청화백자는 진짜였다. 최고가 18억도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다. [ 1,500,000,000원 | 진 | 1,800,000,000원 ] 또한 이번 경매에 나온 물건 중 가장 고가이기도 하다. 이건 고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경매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저 물건만 ‘추정가 별도 문의’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경매에 출품되는 물건에는 추정가가 기재된다. 하지만 어쩌다 ‘추정가 별도 문의’라고 되어 있는 것들이 있는데, 바로 저렇게 고가의 작품일 때다. 경매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벼락치기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수지는 내게 아무 정보도 주지 않은 채 탑 옥션 프리뷰 전시장에서 보자고만 했다. 나는 곧장 탑 옥션 사이트에 들어가서 경매 목록을 확인했다. 그리고 경매의 대략적인 시스템을 익히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읽었다. 오늘 전시되는 작품들이 눈에 익었던 이유는 이 선행 학습 덕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됐지만, 이래야 저 개인 감정사에게 기회가 먼저 갈 것 같았다. 내 목표가 이수지의 개인 감정사로 일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저 사람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개인 감정사의 말이 끝날 때쯤 나는 이수지 쪽으로 갔다. 이수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16560244738524.jpg“왕실에서 쓰던 물건이라……. 뭐, 나쁘지 않네.”

16560244738557.jpg“감사합니다!”

개인 감정사가 칭찬을 받은 아이처럼 웃으며 보란 듯이 나를 봤다. 덕분에 나는 한 방 먹은 듯한 표정 연기까지 해야 했다. 이수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16560244738524.jpg“정했어?”

16560244673269.jpg“네. 저는 묘접도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걸린 묘접도(猫蝶圖)를 가리켰다. 묘접도는 나비와 고양이가 어우러진 그림이다. [ 15,000,000원 | 진 | 20,000,000원 ] 추정가는 천오백만 원에서 이천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경이 알려준 금액과 그대로 일치했다. 재벌 입장에서 볼 때 비싼 그림은 아니었다. 이수지가 그림 앞에 섰다.

16560244738524.jpg“작자 미상이네? 추정가는 천오백만 원이고.”

이수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작 이딴 걸 추천했냐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개인 감정사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16560244673269.jpg“네. 그렇습니다.”

애써 담담히 말했지만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그냥 비싼 작품을 말할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16560244738524.jpg“실망이네. 강 대표에게 돈 좀 벌어다 주길래 안목이 있나 했는데 말이야.”

나는 인내심을 단전부터 끌어올리며 겨우 웃었다.

16560244673269.jpg“아직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안목이 좋지 못합니다. 하지만 생신 선물로는 묘접도가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16560244738524.jpg“나는 생신 선물이라고 한 적 없는데? 선물이라고만 했지.”

16560244673269.jpg“검색해 보니 곧 생신이시던데요.”

아까 이수지가 아버지 선물이라고 했을 때부터 생신 선물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출생일 정보가 비밀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요즘 포털사이트에서는 검색만 하면 재벌가 인물들의 출생일 정보가 다 나온다. 이수지가 팔짱을 낀 채 한껏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말했다.

16560244738524.jpg“그래서?”

16560244673269.jpg“아직 60대이시니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로 묘접도를 추천드린 겁니다. 아시겠지만 묘접도는 모질도라고도 불립니다. 고양이 ‘묘(猫)’는 80세 노인을 의미하는 중국어 ‘모(耄)’와 발음이 비슷하고, 나비 ‘접(蝶)’은 90세를 뜻하는 중국어 ‘질(耋)’과 발음이 비슷해서입니다.”

내 설명을 들은 이수지가 삐딱하게 말했다.

16560244738524.jpg“글쎄. 내 귀에는 90세까지만 살라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100세 시대에 90세라니, 너무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16560244673269.jpg“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묘접도에는 장수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은 35~40세였으니, 그 당시 사람들에게 80, 90세는 어마어마하게 장수하는 것이었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미술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신 회장님이라면 알아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제야 이수지가 팔짱을 풀었고 그러면서 표정도 풀렸다.

16560244738524.jpg“뭐, 흥미로운 해석이네.”

반면 개인 감정사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추천이 우위에 있다는 것에는 의심이 없었다. 수행원을 부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60244738524.jpg“스페셜리스트에게 이 묘접도 응찰하겠다고 말해 놔.”

16560244738557.jpg“네, 알겠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수지의 선택은 묘접도였다. 내심 뿌듯했지만, 이글거리는 개인 감정사의 눈빛 때문에 차마 웃을 수 없었다. *

16560244738557.jpg“한지감 나오라 그래! 한지감!”

갤러리로 들어온 남자가 소리쳤다. 보안직원 두 명이 급하게 막았지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16560244738557.jpg“어디 사기를 쳐! 이 배워먹지 못한 놈!”

남자의 정체는 얼마 전 지감에게 청자와 가짜 김홍도 그림을 판 나까마였다. 소란스러워지자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정다영도 있었다.

16560244738557.jpg“30억짜리를 1억에 가져가서 현성에 팔아먹어? 상도덕도 없는 자식! 나와, 한지감!”

보안직원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16560244738557.jpg“한지감 씨 여기 없습니다.”

16560244738557.jpg“그러니까 부르라고! 전화 안 받으면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았냐!”

16560244738557.jpg“계속 이러시면 경찰 부릅니다.”

흥분한 남자에게는 경고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16560244738557.jpg“너 같으면 그럴 수 있냐! 눈앞에서 30억이 날아갔는데!”

미친 멧돼지처럼 날뛰는 남자를 멈춘 건 우습게도 핸드폰 벨소리였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16560244738557.jpg“탑 옥션에 이수지가 있는데 못 보던 젊은 놈이 있다고? 키 크고 멀끔하게 생긴 놈 맞지? 그래, 그놈이야!”

눈이 뒤집힌 남자가 갤러리를 나섰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돌렸지만 정다영은 그렇지 못했다. 재빨리 한지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만 통화 연결음이 반복될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16560244828029.jpg“오빠, 전화 좀 받아요……! 큰일 났다고요.”

  *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나는 개인 감정사의 뜨거운 눈빛(?)을 피하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뭐지? 왜 다영이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12통이나 왔어? 문자도 한 통 와 있었다. 재빨리 문자를 확인했다. ‘갤러리에 이상한 아저씨가 와서 오빠 나오라고 난리쳤어요. 청자 이야기를 하던데……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전화 받고 탑 옥션으로 가는 거 같았어요.’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어제부터 나까마에게 계속 오던 연락을 씹었다. 뭐라고 할지 너무 뻔했으니까. 양도 계약서도 썼고, 물건 인도도 받았다. 그러니 내가 피하면 끝이지, 뭐 어쩌겠나 싶어서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갤러리까지 가서 난장을 부리고 내가 있는 곳까지 직접 찾아오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이수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내린 뒤에 나도 따라 내렸다. 로비를 살폈다. 아직 나까마는 보이지 않았다. 제발 마주치지 않길 바랐다. 이야기를 하더라도 흥분을 가라앉힌 후에 해야지, 지금 상대하는 건 미친개를 상대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신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1층 로비의 회전문을 막 통과하던, 벌건 얼굴을 한 나까마와 눈이 딱 마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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