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3D (1)2021.01.02.
황덕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권미애, 조성오 부부 알지?”
“알지. 권미애는 백화점 사장이고, 조성오는 국회의원이잖아. 아무리 내가 외국에 오래 있다가 돌아왔대도, 설마하니 그만한 유명 컬렉터도 모를 거라 생각한 거야?”
김도균이 불쾌함을 내비쳤다. 한국에 일하러 오면서 기본 중의 기본인 컬렉터 조사를 그가 안 했을 리 없었다. 옥션 회사에서 일하면서 유명 컬렉터를 모른다는 건 직무유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불쾌해하지 마. 그냥 확인차 물어본 거야. 내가 니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 부부는 왜?”
“아마 곧 이혼할 거 같아. 드디어.”
“3D네?”
김도균의 눈빛이 반짝였다. 고급 미술품이 한꺼번에 시장에 쏟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보통 세 가지 케이스로 구분되기에 이를 ‘3D’라고 부른다. 죽음(Death), 빚(Debt),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번 케이스인 이혼(Divorce)이다. ‘그냥 물건을 나눠 가지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딱 50대 50으로 금액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경매에 붙여 낙찰 금액을 나누어 갖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매회사들은 컬렉터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3D’의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는지 촉각을 세운다. 하지만 이건 비단 경매회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권미애, 조성오 부부는 고미술 현대미술 가릴 것 없이 수집하였기 때문에, 갤러리와 골동상도 눈독 들일 상황이었다. 김도균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그런 거였으면 진작 이야기를 하지. 괜히 나 떠보는 건 줄 알았잖아!”
“널 떠봐서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어.”
“자리 만들어줄 수 있어? 아니면 내가 직접 뚫을까?”
“우리 총괄님 실력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 아쉽게도 내가 미리 저녁 약속을 이미 해놔서 말야. 오늘 저녁이야. 시간 되는 거지?”
“무슨 소리야. 안 되도 되게 만들어야지!”
흥분한 김도균을 보면서 황덕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도균은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흥분을 잘했다. 특히 미술품에 관련된 거라면 더 그랬다. 그럼에도 황덕현은 그 흐뭇함에 젖어 있진 않았다. 이런 소문은 빨리 퍼진다. 다른 쪽에서 이미 접촉을 시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되도록 빨리 움직여 선점해야 한다. * 강정휘가 나를 쓰윽 훑어보았다.
“수트 보기 좋네. 항상 그렇게 입고 다녀.”
“네.”
내가 건별로 일하기로 한 뒤로 강정휘는 말을 아주 편하게 놓았다. 속보인다 싶었지만 어머니뻘에다가 고용주이니 참아야지.
“근데 오늘은 어디 가는 겁니까?”
물건을 매입하는 거였다면 지난번처럼 김 비서를 통해 직접 판매자를 연결해 줬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무실로 불렀다.
“너랑 갈 데가 어디겠어. 잠재적 판매자에게 가는 거지.”
“그렇다면 저만 가도 되지 않습니까?”
콧대가 천장에 달린 사람이 왜 직접 나서는 것일까? 그런 내 표정이 읽었는지, 강정휘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네 수준에서 감히 어울릴 급이 아니야.”
“그렇군요.
기분 나빴지만 최대한 표정 관리를 했다. 사실 나에게 불이익일 건 없었다. 강정휘가 이렇게 직접 나설 정도라면 이수지 급이거나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친분을 쌓으면 후에 우리 가게 손님으로 모실 수도 있다. 이수지 같은 성격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정휘가 날 데리고 간 곳은 화이트 백화점이었다. 그녀는 명품관으로 가더니 삼천만 원짜리 가방 두 개를 사고 매장을 나왔다. 그 가방이 담긴 종이 백을 드는 건 고스란히 내 차지였다. 안경을 빼앗지 못했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날 뼛속까지 우려먹을 작정인 거 같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그래, 까라면 까는 거지 뭐. 강정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꼭대기 층을 눌렀다. 대표실이 있는 층이었다.
“백화점 대표를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그래.”
그러면서 더 설명해줘도 모를 거라는 듯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우리는 정말 백화점 대표를 만났다. 권미애라는 50대 후반의 여자였다. 권미애가 호들갑을 떨며 강정휘를 반겼다. 꽤 친한 모양이다.
“어머 강 대표님! 잘 지냈어요?”
“저야 잘 지냈죠. 백화점 왔다가 생각나서 제 거 사는 김에 하나 더 샀어요.”
그러고는 내게서 가방을 하나 가져가 내밀었다. 권미애는 곧바로 가방을 꺼내 보았다. 자줏빛이 도는 고급스런 핸드백이었다.
“너무 예쁘다! 잘 쓸게요.”
“그래 주면 좋구요.”
권미애가 나를 보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근데 이분은 누구예요?”
“지감 씨, 인사드려요.”
“강정휘 대표님 개인 감정사로 일하고 있는 한지감이라고 합니다.”
“개인 감정사?”
권미애의 물음에 강정휘가 대답했다.
“제가 요새 골동품에 취미가 생겨서요. 지식이 짧다 보니 이 친구가 도와주고 있어요.”
미소를 짓는 강정휘의 모습은 교양 그 자체였다. 물론 내 눈에는 가식 그 자체였지만 말이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나는 흠칫 놀랐다. 권미애가 나를 뚫어져라 보면서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부담스러웠지만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권미애가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어머, 젊은 사람이 대단하다. 괜찮으면 언제 내가 수집한 고미술품들도 봐줄래요?”
강렬한 눈빛이 부담스러워,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뭇대고 있는데 강정휘가 눈빛으로 빨리 대답하라는 듯 압박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저야 영광이죠. 언제 한번 꼭 초대해 주세요.”
“그래요.”
권미애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정휘가 치고 들어갔다.
“대표님, 오늘 바쁘세요? 바쁘지 않으시면 오늘 구경시켜 주시는 건 어떨까요? 저도 대표님 수장고가 궁금해서요. 호호홋.”
강정휘가 몰아가는 것을 보니 싸한 느낌이 든다. 오늘 내가 여기 온 것이 단순 감정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시종일관 나를 향하는 권미애의 눈빛이 심증을 더한다. 혹시 나, 여기서 팔리는 역할인가……? 수장고에 있는 진귀한 물건들을 위해서? 만약 그런 거라면, 수장고에 따라가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 권미애를 보면서 나는 빌었다. 제발 안 된다고 말하라고……! 묘한 미소를 지은 권미애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지금 갈까요?”
오늘도 신은 내 편이 아니다. 이런 빌어먹을……! * 차로 40분을 달려 권미애의 집에 도착했다. 권미애의 집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딱 재벌집, 그 느낌이었다. 대문으로 들어가니 공원 같은 크기의 정원이 나왔다. 풀, 꽃, 나무 할 거 없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케일의 집인지라, 다른 차원의 공간에 있는 거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때 누군가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강정휘가 도끼눈을 뜨고 있었다.
“입에 벌레 들어가겠다. 프로답게 굴어.”
그러고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권미애와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내가 무슨 입을 벌렸다고! 눈이 좀 커진 거 갖고 저런다.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여기서 난 제물(?)로 바쳐질지도 모른다. 정신 차리자, 한지감! 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호텔에서 봤던 거대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평범한 가정집이라면 저런 장식이 어울리기 어려울 텐데, 거실이 워낙 넓은 데다가 천장이 높아서인지 잘 어울렸다. 권미애는 우리를 지하로 데려갔다. 지하에는 수장고가 있었는데, 우리 가게 창고처럼 20도의 온도와 50%의 습도로 관리되고 있었다. 우리 가게의 창고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물건이 대부분 보관장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50개쯤 되는 도자기가 다 보관장에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작은 유물을 보관할 수 있는 서랍식 보관장, 병풍과 액자를 보관할 수 있는 끼우기 식 보관장, 거기에 밀폐 보관장까지 있었다. 꼭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돈이 좋긴 좋구나. 우리 아버지가 보시면 정말 부러워하시겠네. 왜 강정휘가 여기에 오려 그런 꼼수를 부렸는지 이해가 갔다.
“지감 씨, 어떤 거 보고 싶어요?”
언제 왔는지 권미애가 옆에 와 있었다.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한번 둘러봐도 될까요?”
“그럼요.”
나는 권미애의 옆에서 벗어나 도자기 보관장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한 도자기에 그만 시선을 뺏겨버렸다.
“분청사기 매병이네요.”
[ 100,000,000원 | 진 | 500,000,000원/1450년대 ] 최고가 5억 원이나 되는 분청사기였다. 도자기는 전체적으로 검녹색이었다. 30cm 정도 되는 높이에 구연부 지름은 5cm 정도, 가장 풍만한 몸통지름은 15cm 정도 되었다. 변형된 구름무늬와 연꽃무늬 등이 빼곡하게 있고, 몸통의 4면에는 물고기가 흑상감으로 처리되어 있다. 색감이나 매병은 고려청자에 가까운데, 문양과 기법은 분청사기였다. 권미애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특이한 물건이죠. 이 묘한 느낌이 좋아서 구매했어요.”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이 보이네요.”
분청사기는 청자와 만드는 법은 똑같다. 다른 게 있다면 여기에 분칠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루 ‘분’ 자가 붙어 ‘분청사기’라고 불린다. 세종 대에 이르러 왕실 자기를 백자로 선택하였고, 그 영향으로 청자를 분장하게 된 것이다.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백여 년간 짧게 만들어졌다. 근데 그 짧은 기간 중에서도 과도기에 걸친 유물을 보다니, 역사적 순간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고려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바뀌는 그 시기를 보는 느낌이에요. 유물은 글로 쓰여지지 않은 역사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요.”
“어머, 정말 멋진 말이다.”
권미애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제야 나는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청사기를 제외하고도 많은 도자기들이 있었다. 다들 기본적으로 1억은 넘겼고, 그중에도 세 점은 20억이 넘는 초고가품이었다. 위조품도 몇 개 있었지만 진짜가 훨씬 많았다. 도자기만 이 정도면 그림은 어느 정도일까 생각이 들 때였다. 고용인이 오더니 조용히 권미애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 곧 오실 시간이구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강정휘가 끼어들었다.
“손님이 오시기로 했나 봐요?”
“네. 오늘 탑 옥션 황덕현 대표님하고 저녁 약속이 되어 있어요. 새로 오신 총괄님을 소개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저녁 대접하고 싶은데…….”
권미애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봤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만…….”
내 말을 끊고 강정휘가 말했다.
“괜찮다면 같이 식사하는 건 어떨까요? 탑 옥션 황 대표와 저는 잘 아는 사이거든요.”
“아, 그래요? 그러면 황 대표님께 여쭤볼게요.”
권미애의 말을 들은 고용인이 1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돌아온 고용인이 권미애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황덕현 대표가 합석을 거절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황 대표님이 좋다고 하셨어요.”
환히 웃는 권미애를 보면서 생각했다. 역시 신은 내 편이 아니라고. * 나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식탁에는 신선로, 갈비찜, 문어숙회 등등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지만 군침이 돌긴커녕 숨쉬기도 힘들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나와 강정휘는 상석을 기준으로 오른편에 있었고, 그 반대에는 황덕현이 다른 남자와 함께 앉아 있었다. 탑 옥션의 경매 총괄을 맡은, 김도균이라는 사람이었다. 세 사람은 모두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칼처럼 날카로웠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세 사람 다 권미애의 수장고를 노리고 있다. 가장 상석에 있는 권미애는 이런 상황을 모르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싶은지 하하호호 웃을 뿐이었다. 그것도 나를 빤히 보면서 말이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황덕현이 입을 열려는데 강정휘가 먼저 끼어들었다. 그것도 비음을 가득 섞어서.
“차린 게 없다니요. 수랏상 부럽지 않은데요.”
그리고 나도 한마디 하라는 듯 눈치를 줬다.
“저…… 정말 맛있겠네요.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분명 모두의 수저가 움직였지만 누구도 식사에 뜻이 없는 것 같았다. 김도균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정휘 대표님을 여.기.서. 이 시간에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꼭 뵙고 싶었는데.”
모르는 누군가가 듣기엔 단순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그 말엔 뼈가 있었다. 갤러리 운영자가 일하고 있을 시간에 다른 곳에서 딴짓하고 있다고 비꼰 것이다. 나도 알아들은 이 말을 강정휘가 못 알아들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강정휘는 철판을 깐 듯 찌푸리는 표정 하나 없이 말했다.
“그러게요.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근데 우리 예전에 봤었나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요.”
기억도 안 나는 존재감 없는 넌 뭔데 여기까지 와서 난리냐는 뜻이다. 순간 김도균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금방 회복했다.
“어린 시절에 가끔 부모님과 대표님 갤러리에 갔었죠. 그땐 참 좋은 작품이 많았어요.”
‘그땐’.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라는 거다. 강정휘가 다시 훅을 날리려 하자 황덕현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 대표님 갤러리는 참 좋은 작품이 많죠. 얼마 전 이수민 작가 전시도 참 좋았어요.”
그때 고용인이 권미애에게 와서 속삭였다. 그러자 권미애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급한 전화라.”
“그러세요.”
“네, 하고 오세요.”
권미애가 자리를 뜨자 강정휘는 싹 얼굴을 바꿨다. 그리고 황덕현을 매섭게 노려봤다.
“황 대표, 이렇게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어떡해?”
먹은 음식물이 역류할 거 같은 긴장감이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