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우선순위2021.01.09.
“그 분청사기, 제가 사고 싶습니다.”
당황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사시고 싶은 이유, 여쭤 봐도 될까요?”
“예전부터 청자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의 분청사기를 소장하고 싶었어요. 권 대표님을 찾아간 건 옥션 위탁 목적이기도 했지만 그 분청사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래서 팔 생각이 있는지 확인하러 온 거예요.”
지금이 바로 오억이 만들어지는 그 순간일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감각들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럴 때는 확인이 답이었다.
“약간 당황스럽네요. 아시겠지만 저도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슬쩍 아직 팔고 싶지 않은 척한다. 그럼 사고 싶은 입장에서는 몸이 단다.
“그럼 판매를 아예 하지 않을 생각인가요? 나를 봐서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고심하는 척 입을 다물고 있다 말했다.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느 정도 생각하고 오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2억.”
구매가의 2배였지만 오억 원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머리는 턱도 없다고 말하는데 차마 입밖으로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황덕현에게 진 마음의 빚 때문이다. 황덕현은 내가 급하게 그림을 팔아야 할 때 매 그림을 후려치지 않고 사줬고, 짧은 시간에 그 가격을 지불했다
“…….”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황덕현이 외쳤다.
“그럼 3억은 어떤가요?”
안경으로 최고가를 보지 못했다면 당장 팔겠다고 했을 터였다. 하지만 최고가가 오억 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한편으로는 계속 욕심이 났다. 다른 편으로는 지난번 호의를 갚는 선에서 이 정도에서 파는 것이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결정을 할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았다.
“이틀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황덕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하죠. 오늘이 금요일이니 일요일 밤 10시 전까지는 답해 주세요.”
말을 마친 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가게를 나섰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그를 배웅했다.
“가게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덕현이 싱긋 웃고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황덕현과 내가 가게에서 말하는 동안 내내 밖에 있었던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무슨 이야기를 했어?”
“분청사기를 사고 싶다고 하시네요.”
“얼마에?”
“원래 2억 불렀는데 제가 고민하니까 3억까지 갔어요. 근데 최고가가 5억이라는 걸 아니까 쉽게 결정을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이틀 정도 고민하고 말씀드리겠다고 했어요.”
“지감아, 최고가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최고가는 말 그대로 최고가야. 언제 누구의 손으로 넘어갈 때 최고가가 되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리로는 아는데, 쉽지 않네요.”
“이틀 동안 잘 고민하고 결정해.”
“네.”
가게를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억에 팔 수 있는 물건을 삼억에 팔아야 할까? 그렇지만 그 오억이 언제가 될는지는 아버지의 말대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 외에도 마음에 걸리는 건 또 있었다. 도대체 강정휘는 내가 권미애에게서 물건을 샀다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일까. 머리가 복잡했다. * 김 비서가 눈치를 보며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강정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김 비서, 한지감 뭔가 이상하지 않아?”
“권 대표님 물건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거 말고.”
답답한 강정휘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김 비서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감정사 제안을 받아들일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자꾸 승부수를 띄워. 그건 주도권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건데 말이야. 안경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거 아닐까?”
김 비서가 한지감을 떠올렸다. 확실히 예의가 없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걸 숨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냥 배짱이 좋은 놈 아닐까요.”
“혹시 모르니까 한지감 계속 따라붙어.”
한지감이 권미애에게서 물건을 받았다는 걸 안 방법은 지극히 단순했다. 김 비서가 지감을 미행했기 때문이다.
“네 알겠습니다.”
“나가 봐.”
김 비서가 나가고 대표실에는 강정휘 혼자 남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만약 정말 강정휘가 안경에 대해 안다는 사실을 한지감이 알아차린 거라면, 그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 토요일 아침.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경환 때문이었다.
“형. 일어나서 이것 좀 봐봐. 이게 어울려, 아니면 이게 어울려?”
경환이 런닝만 입은 채 상의 티셔츠 두 개를 번갈아 몸에 댔다. 하나는 체크무늬 남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란색 칼라 티셔츠였다. 눈빛을 반짝이며 답을 기대하는 영혼에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둘 다 촌스러워.”
“이게 뭐가 촌스러워…….”
경환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 맞은 퍼그 같이 불쌍하게 나를 봤다.
“촌스러운 걸 어쩌라고.”
“형. 질투해서 그런 거지? 나만 연애하니까!”
며칠 전 경환이는 희소식을 전해 왔다. 편의점 손님이자 오랜 기간 짝사랑하던 그녀와 드디어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아주 질투의 화신이다, 그니까 좀 알아서 입고 가!”
“미대생인데 어떻게 그러냐고……! 좀 봐줘.”
가뜩이나 속이 시끄러운데 저걸 확 받아버릴까 생각하다가 참기로 했다. 성숙한 내가 참아야지 뭐 별수 있나. 나는 일어나 옷장에 있는 깔끔한 하늘색 셔츠를 꺼내주었다.
“이거 입고 아래는 검은색 면바지 입어.”
경환이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보단 이게 나은 거 같은데……?”
“아! 그럼 그렇게 입고 가서 여친 창피하게 하든가.”
그 말에 경환이 내 손에 들린 옷을 채가듯 가져갔다.
“잘 입을게, 형!”
그러곤 후다닥 나갔다. 진작 저럴 것이지.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몸을 일으켰다. 작은 거실을 서성이다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매끈한 승용차 한 대가 스윽 집 근처를 지나는 것이 보였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뚫어져라 그 차를 봤다. 강정휘의 차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 비서가 운전하는 강정휘의 차였다. 저 차가 여기 왜 있는 걸까? 순간 싸한 느낌과 함께, 강정휘가 어떻게 분청사기를 받았는지 알아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계속 나를 미행하고 계셨다?”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강정휘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를 감시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마음에서 불쾌함이 넘실거렸다. 내가 이 불쾌함을 참아야 할 이유가 있던가? 1초도 지나지 않아 답이 나왔다. 없다.
“어떻게 해줄까?”
머리를 굴리는데 경환이가 나를 불렀다.
“형이 말한 대로 입었어. 봐줘!”
깔끔하고 멀끔해 보였다. 셔츠가 내 거라 약간 헐렁한 감은 있었지만 말이다.
“괜찮네.”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를 보고 의문을 품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별로인 거 아니야?”
“괜찮…….”
짜증스레 대답하던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갔다.
“경환아.”
“응. 솔직히 말해 봐. 괜찮은지.”
“아직 약속 시간까지 여유 있지?”
“그렇긴 한데, 왜?”
씨익, 음흉한 미소가 내 입가에 감돌았다. * 나는 황덕현의 집 서재에서 차를 대접 받았다. 향긋한 녹차 향을 맡으니,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주말 아침부터 미행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지 않은가. 황덕현이 나를 살피며 말했다.
“지감 씨가 이렇게 일찍 연락해 올 줄은 몰랐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결정은 내렸어요?”
“그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야기해봐요.”
“분청사기를 대표님이 소유하시려는 겁니까, 위탁하시려는 겁니까?”
“몇 개월 정도 갖고 있다가 옥션에 내놓게 되겠죠.”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소유하고 싶을 만큼 좋은 물건이긴 하지만 난 탑 옥션 대표고, 좋은 물건들이 옥션에 나오는 게 먼저예요.”
“그렇군요.”
황덕현은 대답을 하는 데 있어서 망설임이 없었다. 확실히 대표는 대표였다. 하긴, 저 자리에 그냥 있을 리 없다.
“이제 제가 질문하죠. 왜 이런 것들을 물어보는 거죠?”
“대표님의 우선순위가 뭔지 궁금했습니다. 이제 제 우선순위를 정해야겠네요.”
“그래서 정했나요?”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정했습니다. 이억에 대표님께 분청을 팔겠습니다. 그 대신 대표님이 들어주셨으면 하는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뭐죠?”
“개인 감정사를 필요로 하시는 분들이 있으시면 저를 소개시켜 주십시오.”
황덕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어려워요. 나는 곧 탑 옥션의 얼굴이에요. 내가 소개시켜 준다는 건 탑 옥션이 보증을 선다는 거나 다름이 없죠.”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무리한 이야기였다면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황덕현이 말을 이어갔다.
“탑 옥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우리나라 최고의 옥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나라 최고의 옥션에서 감정을 해보는 건 어때요?”
“감정위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옥션 회사에서 감정을 할 때는 외부 감정위원을 위촉한다고 알고 있었다. 내부에서 직접 하지 않는 건, 경영진의 이해관계에 따른 조작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맞아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감정위원끼리 서로의 신상을 공유하지 않아요. 신상을 알면 서로 입을 맞추고 거짓 감정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실 이 업계가 워낙 좁다 보니, 누가 감정위원으로 위촉되었는지 알 사람들은 거의 다 알죠. 그리고 그게 하나의 커리어가 됩니다.”
그냥 골동상이 아닌 옥션의 감정위원이라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그럴듯한 커리어였다. 무엇보다 감정사에게는 필수적인 신뢰감이 확보되는 것이다. 황덕현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여유롭게 말을 이어갔다.
“가품진품 프로그램에 나오는 거보다도 이름값이 더 생길 거예요. 재벌가 쪽에서는 방송보다는 옥션을 선호하거든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좀 묘해졌다. 분명히 나쁜 상황은 아닌데, 제안하려고 왔다가 제안을 받는 느낌이라 그런 걸까? 황덕현의 페이스에 나도 모르게 말려든 느낌이 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한지감!
“경력이 출중한 골동상도 많은데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맞아요. 지감 씨보다 경력이 많은 분들 많죠. 사실 지감 씨를 위촉하는 게 내부에서 말이 나올 수도 있어요. 감정위원 평균 나이가 50대 중반이거든요. 그런데도 내가 지감 씨를 선택한 건 이익에 휘둘릴 거 같지 않아서예요.”
“저는…… 돈 좋아합니다.”
사실 돈 때문에 이 일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려다가, 하느니 못한 말 같아서 삼켰다. 그런데 황덕현이 깔깔거리면서 웃는 거 아닌가.
“하하하! 하하하하!”
너무 배를 잡고 웃어서 민망할 정도였다.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면서 황덕현은 너무 웃어서 나온 눈물을 훔쳤다.
“미안해요. 너무 신선한 이야기라……. 여기 돈 싫어하는 사람 없어요. 그리고 미술이란 게 돈과 떨어질 수가 없어요. 오죽하면 돈이 있는 곳에 미술이 있다고 하겠어요.”
“그건 그렇죠.”
돈이 있는 곳에 미술이 있다, 씁쓸한데 부정할 수가 없다. 고미술도 일반인이 사기엔 부담스런 가격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같은 거장들도 귀족과 왕실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빛을 보기 어려웠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겸재에게는 영조가 있었고, 단원에게는 정조가 있었죠.”
“예술가들의 작품은 자산가들에 의해서 사고팔려요. 미술과 돈은 떨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어요.”
잠시 호흡을 고른 황덕현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몸이 절로 긴장되었다.
“하지만 미술이 예술이기 위해서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어요. 그 선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죠.”
황덕현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쉽게 잊어버려요. 내가 지감 씨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그래서예요. 지감 씨라면 이해관계가 얽혀있더라도 그 선만은 지켜줄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나를 그런 사람으로 봐 주었다는 게 고마웠다.
“아무래도 더 고민이 필요할 거 같네요. 내일 밤 10시까지 답해 줘요. 분청사기도, 감정위원도요.”
“네, 알겠습니다.”
* 강정휘 갤러리 대표실. 강정휘는 독이 오른 두꺼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지감이 황덕현을 만나? 왜?”
김 비서가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화 걸어서 떠볼까요?”
“됐어. 우리가 미행한다고 떠벌리고 다닐 일 있어?”
“떠벌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한지감이 대표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쪽에는 웬 서류봉투를 하나 옆에 낀 채였다. 강정휘가 급하게 표정을 바꿨다.
“오해는 하지 마. 지감 씨를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늘 하는 확인절차니까.”
한지감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늘 하는 확인 절차였군요. 누가 그 말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야?”
강정휘의 말투가 고압적으로 바뀌었다.
“토를 다는 게 아니라 마땅히 드려야 할 말씀을 드리는 거뿐입니다.”
강정휘가 김 비서에게 눈짓했다. 고압적인 자신의 태도도 먹히지 않으니 물리적 위력을 써 보려는 것이다. 우락부락한 김 비서가 나서면 저런 태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먹 앞에서 작아졌다. 강정휘의 눈짓을 알아들은 김 비서가 한지감을 제지하기 위해 다가섰다.
“그만해라. 한지감.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한지감이 김 비서를 밀쳐내고 말했다.
“김 비서님이나 그만하시죠. 강정휘 대표님, 저는 더 이상 대표님을 위해 일하지 않겠습니다.”
강정휘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위약금 감당할 자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