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강화 반닫이 (2)2021.01.13.
이제 좀 골려줘 볼까?
“그 형님, 골동상이죠?”
흠칫 남자가 놀랐다.
“어떻게…….”
“사기는 아주머니가 아니라 그 형님이 치셨어요. 좋은 물건이니까 후려쳐서 살 생각이었네요.”
남자는 움찔하면서도 대범한 척했다.
“수작질 부리지 마! 이런 식으로 나 현혹시켜서 공사 치려는 거 아니야?”
공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기가 무슨 하우스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선생님에게 천만 원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 천만 원은 그렇게 큰 돈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는데 시간을 쏟을 정도로 제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구요.”
“나…… 나는 뭐 한가한 줄 알아!”
“그러니까 이만 가 보시죠. 그리고 가서 형님에게 한번 전화 드려 보세요. 돈 돌려받고 물건 돌려줬다고요. 아마 왜 그랬냐고 성질 부릴걸요?”
“지금 여기서 하지.”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나요. 그 반닫이인가 뭔가 말이오.”
[그래. 팔 생각이야?]
“돈 돌려받고, 물건을 돌려줬소.”
한순간에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너 생각해서 사준다고 했잖아……! 뭐하러 그런 치사한 짓을 해! 장부가!]
“치사한 짓이라니! 형님한테 피해준 것도 없잖소!”
그제야 남자는 그 ‘형님’의 검은 속내를 파악한 듯했다.
“정말 나한테…… 사기 치려고 한 거요?”
[사기는 무슨 사기! 너 도와주려 그런 거지. 허튼 소리할 거면 끊어!]
그렇게 뚝 전화가 끊겼다. 남자가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형님’은 받지 않았다. 너무 고소해서 낄낄거리고 웃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내가 말했다.
“이제 통화 끝나셨으면 나가 주시죠.”
“혀…… 형님이 지금 바빠서 그런 거야. 이런 걸로 사람 모…… 모함하지 마!”
끝까지 남자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믿고 싶지 않으시면 믿지 않으셔도 돼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으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진짜가 가짜가 되진 않아요.”
보란 듯 남자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충격을 받은 남자가 비틀거리면서 식당을 나갔다. 아주 쌤통이다, 이 자식아. 물건을 보는 안목이 없으면 인성이라도 좋든가. 덕분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서 정말 고맙다, 고마워. 고소해하고 있는 그때 아주머니가 덥석 손을 잡았다.
“미안해서 어떡해……. 돈은 내가 마련되는 대로 갚을게.”
“형……. 나도 갚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 반닫이, 제가 산 거니까요.”
내 말에 경환이와 어머니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마음의 짐이 덜어진 것이다.
“형, 그럼 반닫이 형네 가게로 보내주면 되는 거야?”
“아니. 난 반닫이 여기 두고 싶은데?”
“그러지 마. 지감아. 가져가. 그래야 우리 마음 편해.”
“그래. 형.”
“경환이랑 아주머니 마음 불편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여기 놓고 싶어서 그래요. 원래 물건은 소유주가 두고 싶은 곳에 두는 거잖아요. 나중에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 놓고 싶어지면 그때 가져갈게요.”
“지감아…….”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닌 척했지만 경환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고맙다……. 지감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밥이라도 먹고 가.”
“네, 그거면 충분해요.”
어머니는 바로 상을 차리셨다. 3뚝딱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는 상이 차려졌다. 보기만 해도 행복한 한편으로는 죄송스러웠다.
“이렇게 많이 차리실 필요 없는데…….”
“무슨 소리야. 앉아서 어서 먹어. 배고플 텐데.”
“그래 형, 어서 먹자.”
“잘 먹겠습니다!”
잘 먹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거 같아, 나는 따듯한 밥을 퍽퍽 퍼서 반찬과 먹었다. 밥은 정말 꿀같이 달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이렇게 맛있게 밥을 먹은 건 처음이었다.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네.”
흐뭇한 눈빛으로 아주머니가 날 보셨다. 덕분에 마음까지도 따듯해졌다. * 집으로 돌아오니 해가 주황색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공원으로 가서 천천히 걸었다. 몇 시간 후면 10시다. 그 전까지 감정위원과 분청사기에 대해 결정해야 한다.
“어떻게 할까?”
확실히 감정위원은 좋은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고민이 되는 건, 강정휘의 개인 감정사 제안을 받아들인 그 끝이 좋지 못해서였다. 또한 이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큰 갈림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쉬이 결정하기 힘들었다.
문득 황덕현의 집에 처음 갔을 때 후광을 봤던 것이 떠올랐다.
“그건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도 안경의 기능 중에 하나일까? 그렇다면 왜 거기에 대한 안내 메시지는 뜨지 않았을까? 여러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고민하게 할 뿐, 결정을 내리게 하진 못했다. 그러다 어제 황덕현이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미술이 예술이기 위해서 지켜야 될 선이라는 게 있어요. 그 선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죠. 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쉽게 잊어버려요. 내가 지감 씨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그래서예요. 지감 씨라면 이해관계가 얽혀있더라도 그 선만은 지켜줄 것 같아서.
선이라. 그 선을 난 정말 지켜줄 수 있을까?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해가 다 지고 완전히 깜깜해지고 나서야 나는 황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한지감입니다.”
[지감 씨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결정, 했어요?]
“대표님, 그 전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봐요.]
“어떤 유혹이 와도 제가 선을 넘지 않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황덕현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럴 거라 믿어요.]
내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감정위원 하겠습니다.”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군요. 실제 위촉 계약은 일주일 정도 후에 이루어질 거예요. 결단 내려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리고 도자기는 어제 말씀드린 대로 이억에 팔겠습니다.”
[좋아요. 내일 지감 씨 가게 들를게요. 그럼 내일 봐요.]
“네.”
통화가 끝난 전화를 멍하니 바라봤다. 사실 황덕현에게 전화를 한 그 순간까지도 결정을 하지 못했다. 마음을 정한 건, 믿는다는 황덕현의 그 말 때문이었다. 그저 의례적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바라 왔다. 누군가 나를 인정하고 믿어주기를. 여러 가지 고민거리 가운데 그 하나가 이 결정을 하게 했다. 그 말이 맞는 거 같았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무언가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 내가 그랬다. 제법 차가운 밤바람이 몸을 감쌌다. 그런데도 춥기보다는 상쾌하게 느껴졌다. * 일주일 후, 나는 탑 옥션 회의실에 있었다. 앞에는 김도균 총괄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계약서는 다 확인하셨습니까?”
“네.”
“그럼 도장 찍으시죠.”
인주를 묻히고 꾹 도장을 눌렀다. 계약서가 2부였기에 한 번 더 도장을 찍었다. 김도균이 계약서 1부를 서류봉투에 넣어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다 된 건가요?”
“아니요.”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은색 안경테까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자 괜히 움찔하게 됐다. 그런데도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뭘 더 해야 하나요?”
“더 하실 건 없습니다. 그저 드릴 말씀이 있을 뿐.”
김도균이 은색 테를 치켜세웠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드릴 말씀’이 좋은 말씀은 아닌 것 같았다.
“말씀하시죠.”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한지감 감정위원님을 위촉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래, 얼굴에 써 있더라. 등에 삐질삐질 땀이 났지만 담담한 척 말했다.
“그런데요?”
“그리고 아직도 그 의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니까 알아서 기라는 거야, 뭐야.
“그러니 실력으로 증명해 주세요.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거 말입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대표님에게 판매한 분청사기 잘 봤습니다. 좋은 물건이더군요.”
분청사기를 판매하겠다고 한 바로 다음날 황덕현이 와서 입금하고 물건을 가져갔다. 최고가 5억인 물건이라 아까웠다. 그렇지만 최고가에 집착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며 생각을 털어버렸다.
“역시 좋은 물건을 알아보시네요. 그럼 이만…….”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김도균이 나를 막아섰다.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뭐? 그만 좀 해라. 목구멍까지 이 말이 차오르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런데 이어진 김도균의 말은 의외였다.
“지난번에 권 대표님 집에서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도균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백화점 VIP고객에게 사과하듯이 말이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사실 전 그날 권 대표님을 만나는지도 몰랐습니다. 사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중하겠다는 것을 간신히 거절하고 탑 옥션 건물에서 나왔다. 들어갈 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나설 때는 기분이 가벼웠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김도균 같은 사람은 사과를 절대하지 않을 줄 알았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뿐더러, 인지하더라도 인정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모두 편견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 성공적인 시작이다. 비록 김도균이 아직 날 감정위원으로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말이다.
“반드시 인정하게 만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수지의 수행원에게서 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지?
“네. 한지감입니다.”
[지금 A호텔 VIP 라운지로 와주실 수 있습니까?]
다짜고짜 호텔 라운지로 오라니 이거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아가씨께서 직접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도 말 안 해 주면서 사람을 부르는 심리는 뭘까?
“저 오늘은 아무래도…….”
내 말을 끊고 수행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만약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인센티브로 30%를 지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뭔지는 몰라도, 이수지가 하는 일이라면 규모가 작을 리 없다. 그런데 인센티브를 30%나?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 A호텔 VIP 라운지는 블랙톤의 깔끔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라운지에 들어서서 이수지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라운지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자리에 앉아 있어서였다. 그 뒤에는 수행원만 있고 개인 감정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가가 인사를 했다.
“왔네. 앉아.”
내가 자리에 앉자 이수지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어쩐지 불안한 기색이 느껴졌다.
“퇴우이선생진적첩이라고 알아?”
“네. 당연히 알죠.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퇴계와 우암의 글씨와 겸재의 작품이 함께 있는 유물인데요.”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해석하면 퇴계, 우암 두 스승의 참된 자취를 모은 책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시작은 퇴계 이황이었다. 퇴계가 쓴 <회암서절요서>와 목록 초록이 손자의 외손자인 홍유형의 손에 들어갔고, 후에 사위 박자진에게로 전해졌다. 박자진은 무봉산에 숨어 살던 우암 송시열에게 두 차례나 가서 제발(題跋)을 받았다. 제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흰 버선으로 죄를 대하는 중임에도 오랫동안 어루만져 종이가 피는데도 놓지 못했다.’ 노론의 수장인 우암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남인의 뿌리 퇴계를 칭송한 것이다. 그러다 박자진의 외손인 정만수가 조르고 졸라 이를 받아낸 뒤, 아버지인 겸재에게 그림을 받고 아버지의 절친한 벗인 이병연에게 시를 받았다. 시간이 흘러 고종 때 임헌희가 후지를 추가했고, 김용진의 제서도 추가되었다. 이 책에는 천 원권 뒷면에 수록된 그림으로 익숙한 겸재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도 있다. 대가들의 글과 그림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이런 유명한 유물은 모르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렇지. 대단한 물건이지. 그 물건을 손에 넣어야겠어.”
이수지의 눈에 강렬한 욕망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감정이 아니라 물건을 찾아달라고 날 부른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인센티브 30%가 괜히 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서 이야기를 끊고 일어서야 했지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소장자가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
“알지.”
아. 다행이다. 적어도 유물 찾아 삼만 리를 해야 하는 건 아니구나. 이수지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열이 나는 듯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문제는 소장자가 팔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야.”
소장자의 반응은 사실 당연했다. 퇴계, 우암, 정선이 한 책에 담겨 있다. 희소할 뿐만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도 크다. 그런 유물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면 나 같아도 팔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제가 소장자를 설득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맞아. 바로 그거야.”
왜 지금 여기에 개인 감정사가 없는지 알겠다. 그 감정사는 상인이 아니라 정말 감정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건 내가 하기도 어려운 일이라는 데 있었다.
“일단 이야기는 해 보겠습니다만…….”
이수지가 단호히 고개를 저어서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야기를 해 보는 것으로는 안 돼. 반드시 그 물건을 가져와야 해. 물건 값으로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건 50억이야. 성공한다면 구매금액의 30%, 15억을 인센티브로 지불하지.”
15억?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