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퇴우이선생진적첩 (1)2021.01.16.
“이야기를 해 보는 것으로는 안 돼. 반드시 그 물건을 가져와야 해. 물건 값으로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건 50억이야. 성공한다면 구매금액의 30%, 15억을 인센티브로 지불하지.”
15억? 눈이 커졌다.
“하게…….”
15억에 눈이 멀어 하마터면 나는 하겠다는 말을 할 뻔했다. 정신 차려라, 한지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유 없이 비싼 건 있어도, 이유 없이 돈을 많이 주는 일은 없다. 나에게까지 온 거면 이 일이 꽤 어려운 일이란 뜻이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습니다.”
“한다고 하면 말하지.”
끙……. 역시 이수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나는 이수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평소 이수지와 달랐다. 왜 그녀는 이 유물을 사려는 것일까? 유물이 좋아서? 그렇다고 보기엔, 고미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았다. 지난번에 고려청자 앞에서 그녀의 태도를 떠올렸다. 수장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유물이 손에 들어왔을 때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이수지는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딱 돈 될 물건을 보는 장사꾼의 눈빛이었다. 이수지도 강정휘처럼 고미술품으로 돈을 벌고 싶은 건가?
“그 유물이 꼭 필요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반드시 그 물건을 가져와야 한다면 그 이유 정도는 알아야 한다. 이수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네깟 게 그런 걸 왜 알아야 하냐는 표정이었다.
“그건 왜?”
“소장자가 안 팔려고 하니까 알아야 합니다. 목적에 따라 소장가가 내어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권미애에게 미술품들은 죽은 아들을 대신하는 존재다. 그런 미술품들을 투기 목적이 가득한 눈으로 보면서 사고 싶다고 말하면 넘길 리가 없다. 퇴우이선생진적첩의 소장자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내 생각이 기가 차다는 듯 이수지가 코웃음을 쳤다.
“그쪽이 바라는 건 돈이야. 현성가에서 접근하니까 돈독이 오른 거지. 넌 잔말 말고 흥정해서 물건만 가져오면 돼.”
돈이면 다 된다는 저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왜 사려고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는데 상대를 어떻게 설득시킨다 말인가.
“그렇다면 이 건을 맡는 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깍듯이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 했다.
“잠깐!”
이수지가 버럭 소리 지르는 바람에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왜 필요한지 말해 주면, 의뢰를 받아들일 거야?”
그녀는 한껏 약이 올라 있는데도 일을 성사시키는 것이 더 급한 거 같았다.
“네. 말씀해 주시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수지가 다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더니 탁, 탁자에 빈 컵을 놓고 입을 열었다.
“현성 미술관에 놓을 거야.”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 물건을 원하는 건 이수지가 아니라, 고미술에 조예가 높은 이재근 회장인 것이다. 현성 미술관은 국립 박물관 못지않은 고미술 컬렉션을 자랑했다. 그중 대다수가 이 회장의 소유라고 들었다. 설마 이 사람, 미술관 관장을 노리고 있는 건가? 인센티브를 30%나 주겠다는 말이 심증을 굳혔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이수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이수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될 것 같아 다른 말을 했다.
“이제 소장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죠.”
“부산에 작은 사업체를 갖고 있는 40대 초반 사장이야.”
“직접 유물을 구매한 건가요?”
이수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려받은 거야. 구매한 사람은 아버지였지.”
이수지가 이를 악무는데,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가늠이 되었다. 직접 구매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걸로 자기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고 노여워하는 듯했다. 소시민인 나로서는 이수지도 비슷한 입장으로 보였기에 이 상황이 퍽 웃기게 느껴졌다.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말했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역시 이유 없이 돈을 많이 주지는 않는 법이다. 나는 솟아오르는 짜증을 감춘 채 밝게 웃는 낯으로 답했다.
“네.”
* 그 길로 나는 바로 부산으로 가는 KTX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다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뭘 알고 싶어서 전화 거셨을까?]
나는 정곡을 찔려 말을 더듬었다.
“우…… 우리가 무슨 일 있을 때만 연락하는 사이냐?”
[저는 오빠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오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단단히 삐쳐 있었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그게 아니면 강정휘 일 그만두고 연락 뜸한 거, 어떻게 설명하실 건데요?]
“그만둔 지 일주일밖에 안 됐다!”
[일주일이나 됐죠! 가뜩이나 백수 돼서 풀 죽어 있는데 서운하게 연락 딱 끊기 있어요?]
연락을 안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것을 괜한 핑계를 댔다.
“너 바쁠 거 같아서 그랬지. 취업 준비가 좀 힘드냐.”
[영 솔직하지가 않네. 그냥 끊어야…….]
“미안. 그동안 좀 바빴어. 용서해 주라!”
[오빠니까 특.별.히. 용서해 줄게요. 이제 말해 봐요. 뭐가 궁금한 건데요?]
역시 다영이! 아주 시원시원하다.
“현성 그룹 막내딸 이수지 말이야.”
[네.]
“혹시 현성 미술관 관장 노리고 있어?”
다영이는 생각보다 미술계 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공이다 보니 업계에 먼저 자리 잡은 선배들한테 듣는 정보가 나보다는 훨씬 많았다. 또한 강정휘 갤러리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다영이 앞에서는 입조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재벌가 사람들이 운전기사와 가정 관리사 앞에서 입조심을 하지 않듯이.
[맞아요. 근데 쉽지 않을 거예요.]
“왜? 현성 딸이면 끗발 장난 아니지 않나?”
[음……. 그게…….]
말하기가 껄끄러운지 다영이 말하는 것을 망설였다. 직감적으로 중요한 정보라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가서 니가 말했다는 말, 안 할게! 그러니까 말해주라. 응?”
[그래요. 뭐. 사실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모르는 사람도 없으니까……. 오빠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현성 비자금 세탁하는 곳이 현성 미술관이잖아요. 흔히들 말하는 미세탁이죠.]
미세탁은 미술품으로 돈세탁하는 것을 뜻한다. 재벌들이 갤러리나 미술관을 통해 돈 세탁을 하는 건 이제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강정휘도 그런 역할을 하다가 명성에 금이 가고 현재 꼴이 나지 않았는가.
“그래. 들어본 적 있어. 그래서 현성 미술관 세울 때 말이 많았잖아.”
[그러니까요. 최근에는 그 금액이 더 커졌다는 소문이 돌더라구요. 검찰에서도 주시하고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큰돈이 오고가는 곳인 동시에 절대로 드러나서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는 거죠.]
그제야 다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거 같았다.
“그럼 다들 거기에 자기 사람을 앉히려고 하겠구나? 거기 앉는 게 결국 권력이 될 테니까.”
[바로 그거예요. 그런 이유로 이수지의 언니 오빠 모두 거기에 자기 사람을 앉히려고 하고 있어요. 그래야…….]
“미세탁도 쉽게 하고, 밖으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도 막을 테니까.”
이수지와 언니 오빠는 형제지만 경쟁 관계다. 경쟁관계에 있는 존재에게 비자금 세탁이란 치명적인 정보를 알려줄 순 없는 노릇이다.
[네. 그래서 뜨거운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들리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이수지 입장에서는 똥줄이 타고 있는 상황일 터였다. 생각해 보면 여태까지 이수지와의 만남 세 번 모두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고려청자도 미술관에 들어갈 물건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회장의 생일 선물을 굳이 다른 사람의 개인 감정사인 나까지 빌려 가며 과하게 정성을 쏟았던 것도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이번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근데 이건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 삼파전으로 나도 모르게 뛰어든 거 같아.”
[설마. 이수지 일 받으셨어요?]
“응……. 걱정이다. 어떡해서든 유물 사 오라고 하는데…….”
[오빠…….]
다영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갤러리에서 일하면서 이수지를 몇 번 봤기에 성격이 어떤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다영아. 나 괜찮겠지?”
[부디 일이 잘 처리되길 빌게요.]
통화가 끝나고 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인센티브 30%에 정신이 팔려 이수지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니 나의 남은 선택지는 오직 흥정해서 퇴우이선생진적첩을 가져오는 것이다. * 강정휘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이수지에게 일을 받았다?”
“네. 소문에 따르면 이수지가 퇴우…… 무슨 첩을 사려고 하는 중이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의뢰했는데, 일이 어그러져서 한지감에게 맡긴 것 같습니다.”
“나에게서 사간 고려청자로는 현성 관장이 되기 모자랐나 보네.”
“그러게 말입니다.”
“하긴, 다른 쪽에서는 100억대 작품들을 내놓았으니까 30억 정도는 쨉이 안 되지.”
이수지의 언니 오빠들은 유명 현대미술 작품들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30억 고려청자는 당연히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고 요새 아주 한지감 잘나가네? 탑 옥션에 감정위원으로 위촉되고, 이수지의 픽까지 받고.”
같잖다는 듯 강정휘가 코웃음을 쳤다. 눈치를 보다 김 비서가 말했다.
“저희가 소장자에게 먼저 접촉해서 물건을 사들일까요? 그러면 이수지 성격에 난리를 칠 겁니다.”
“난리 치겠지. 하지만 한지감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쳐. 이수지 성격 몰라? 그리고 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청자 같은 물건을 원해. 이미 가격이 높은 그딴 물건은 필요 없어.”
강정휘가 매섭게 김 비서를 노려보았다. 25억의 이익을 얻게 한 고려청자가 생각나자 마음이 더 노여워졌다. 한지감만 자신을 위해서 일하면 계속 그런 엄청난 이익을 남기는 물건이 자신에게 굴러들어 왔을 터였다. 이제 그것들과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강정휘의 뒤틀린 심기를 파악한 김 비서가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머리 쓰지 말라고 했지. 안 좋은 머리는 왜 계속 써?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알았어?”
“네.”
강정휘가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나마 지금 위로가 되는 건, 자신이 안경을 알아차렸다는 걸 한지감이 모른다는 것이다. 알았다면 끝내는 마당에 분명히 한마디 했을 것이다.
“우린 그냥 일이 안 되게 하면 돼. 소장자가 유동진이라고 했지?”
“네.”
강정휘는 유동진을 알았다. 유동진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가장 큰 컬렉터였고 한때 강정휘 갤러리의 고객이기도 했다. 물론 강정휘가 한창 잘나갈 때 이야기지만.
“전화번호는?”
“번호가 바뀌어서 지금 확인 중입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부산까지 갈 것도 없어. 전화 한 통이면 되거든.
강정휘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 작은 공장에 내가 들어서자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저…… 유동진 사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약속은 되신 겁니까?”
“약속은 안 되었습니다. 고미술품 때문에 서울에서 왔다고 전해 주세요.”
“아……. 혹시 퇴우이선생진적첩 때문에 오신 건가요?”
직원이 퇴우이선생진적첩을 알고 있다.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네. 혹시 저 말고도 더 오신 분이 있으셨나요?”
직원은 답 대신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 좀 떨어진 곳에서 통화를 했다. 온 사람이 있었네, 있었어. 거기에 이수지만 있을 거 같진 않았다. 직원이 유물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면, 꽤 많은 사람이 그 유물을 얻으려 여기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문득 나는 몇 번째일지 궁금해졌다. 통화를 마친 직원이 다가왔다. 직원의 표정이 안 좋다. 어쩌면 이대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KTX 2시간에 택시 30분 타고 왔는데…….
“이쪽으로 오시죠.”
예상과는 달리 직원은 날 긴 책상이 있는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차까지 내어주었다. 이건 혹시 그린라이트? 잠시 후, 40대 초반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유동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명품 골동상 한지감입니다.”
“안녕하세요. 유동진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앉으시죠.”
동그란 얼굴형에 동그란 안경테를 한 그는 딱 봐도 선하고 순해 보였다. 이거, 해볼 만하지 않을까?
“퇴우이선생진적첩 때문에 오셨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좋은 물건을 가지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
유동진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아버지가 고미술에 관심이 많으셨던 거지, 저는 아닙니다. 아버지와 달리 식견이 없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 물건인지도 저는 잘 모릅니다. 그냥 들어서 막연히 알고 있는 것이죠.”
어떤 의미가 있는 그림인지도 모른다. 고미술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 팔지 않는 거라면, 이수지의 말처럼 돈을 올리려는 걸까?
“그렇군요. 그래도 오랜 기간 봐 왔으니 정이 드셨겠습니다.”
“정은 아버지가 많이 드셨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보고 또 보셨답니다. 퇴계, 우암, 겸재 거기에다 많은 수장가들의 손을 걸친 물건 아닙니까. 500년의 숨결이 묻어 있는 물건이라고 흡족해하셨죠.”
말하는 유동진의 눈가가 촉촉했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거 같았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나는 빙그레 웃었다.
“500년의 숨결, 표현이 정말 좋네요. 아버님과 추억이 있는 물건을 사 가겠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으실 것 같습니다.”
“의뢰인이 누구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현성의 막내 따님입니다.”
“그렇군요.”
“의뢰인께서는 현성 미술관에 퇴우이선생진적첩을 전시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500년의 숨결이 담긴 좋은 물건이니, 더 많은 사람이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멘트는 나쁘지 않았다. 이제 유동진의 대답만 남아 있었다. 유동진은 대답을 미룬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기다리는 그 짧은 몇 초가 내게는 몇 년처럼 느껴졌다. 제발 빨리…… 빨리 대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