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퇴우이선생진적첩 (2)2021.01.18.
멘트는 나쁘지 않았다. 이제 유동진의 대답만 남아 있었다. 유동진은 대답을 미룬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기다리는 그 짧은 몇 초가 내게는 몇 년처럼 느껴졌다. 제발 빨리…… 빨리 대답을……! 하지만 타 들어가는 내 마음과 달리 유동진은 대답을 망설였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돈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이수지의 말대로라면 돈이 목적이니, 뭐라도 반응을 보이지 않겠는가.
“의뢰인께서는 사십오억에서 오십억까지도 지불할 마음이 있으십니다. 그 정도 가치가 있고, 오랜 시간 봐오셨지 않습니까.”
사십오억에서 오십억. 결코 작은 가격이라 할 수 없다. 물건을 아직 보지 않아 최고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알기로 이 유물은 삼십억에서 사십억 사이가 적정가였다. 그러니 사십오억에서 오십억이면 정말 좋은 가격을 제안했다고 할 수 있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갈 때쯤 유동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은 제안입니다만, 저는 팔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고 차분한 톤으로 물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저보다야 현성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갖고 있는 게 공익적인 측면에서 좋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 이 유물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물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물어볼 새도 없이 유동진이 몸을 일으켰다.
“먼 길 오셨는데 이런 이야기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럼, 살펴 가세요.”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유동진이 회의실을 떠났다. 텅 빈 회의실에서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일말의 여지도 없는 거절이네.”
이 소식을 그대로 이수지에게 전한다면 난리를 칠게 불 보듯 뻔했다.
“난리 치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나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할 수 있을까?”
이수지 성격에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 같았다. 보는 사람마다 내 이야기를 해서 신용도를 급락시킬지도 모른다.
“괜히 받아들였나?”
후회가 밀려들었다. 지금이라도 전화 걸어서 이수지에게 싹싹 비는 게 나을까?
“아니야. 겨우 한 번 시도하고 이렇게 끝낼 순 없지. 유물을 가져가진 못하더라도, 한번 확인이라도 하고 간다!”
어깨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정말 유동진은 돈이 목적인 걸까? 유동진은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건 그냥 핑계에 불과한 것일까? 만약 정말 돈이 목적이라면, 내 인센티브로 돈을 더 주는 한이 있어도 구매해야 한다. 회의실에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준 훤칠한 남자 직원이 들어왔다.
“아직 계셨네요…….”
내 존재가 꽤나 불편한지 난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어색해졌다.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럼 이…….”
잠깐만, 이 직원은 ‘퇴우이선생진적첩’ 이 긴 이름도 기억하고 있다. 이 유물을 구매하고 싶어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렇다면 왜 유동진이 거절했는지 그 이유도 알고 있지 않을까? 나는 얼른 영업용 미소를 띠었다.
“제가 불편하게 해 드렸나 봐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요. 전 그저 사장님이 나오신 지 좀 돼서, 당연히 손님도 나오셨을 줄 알았어요.”
“그랬군요. 근데 여기서 일하신 지 오래되셨어요?”
직원은 이런 걸 왜 물어보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넉살 좋은 척 말했다.
“나이가 비슷한 것 같아서요 전 일을 늦게 시작했거든요.”
“3년 정도 되었습니다.”
“저는 1년 안 됐어요. 훨씬 선배이시네요.”
내가 웃으니 직원은 예의상 웃어 주었다. 거 참,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일세. 훤칠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성격은 활달하지 않았다. 나랑 이야기하는 걸 불편해하니 어쩔 수 없이 본론으로 빨리 들어가기로 했다.
“저, 하나만 여쭤 봐도 될까요? 사장님께서 왜 퇴우이선생진적첩을 안 파시는지 알고 싶어서요.”
제발 말해줘. 그럼 이만 여기서 사라져 줄게.
“그건. 제가 말씀 드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직원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장이나 직원이나 단호박인 회사일세. * 이수지는 호텔 룸 안을 쉼 없이 서성거렸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수행원을 노려봤다.
“아직도 연락이 없어? 벌써 사흘이나 지났잖아!!”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수행원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감히 내 전화를 피해! 한지감, 간이 부었구만!!”
이수지가 소파에 있는 쿠션을 마구 잡아서 던져댔다. 수행원은 움찔하면서도 다른 곳을 봤다. 이미 여러 차례 있었던 일이라 인이 박힌 탓이었다. 그나마 사람에게는 물건을 던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쿠션 던지기가 끝날 때쯤, 수행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부산에 사람을 보내서 확인할까요?”
이수지가 씩씩 거친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일단 한지감 가게 쪽으로 사람 보내. 올라왔으면서도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는지 누가 알아?”
“네, 알겠습니다.”
“거기 없는 것 같으면 부산 쪽으로도 사람 보내고.”
“네, 그러겠습니다.”
“물.”
수행원이 재빠르게 물을 가져와 내밀었다. 이수지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한 컵을 깨끗이 비워냈다.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퇴우이선생진적첩을 가져오라는 거야……!”
“미술관에 필요한 유물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수지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처음부터 전략을 잘못 세웠어. 아버지가 고미술을 좋아하셔서 몇백억대 가는 작품들 뒤로하고 고려청자를 산 건데……!”
“저…… 미천한 생각이지만 전략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확실히 금액대에서 밀린 건 사실이지만, 회장님이 마음에 드신 것은 고려청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생신 선물로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신 것도 제가 보기엔 묘접도였습니다.”
냉정을 되찾은 이수지가 새침하게 물었다.
“근거는?”
“부사장님과 상무님께는 어떤 유물을 사오라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필 주어진 일도 ‘퇴우이선생진적첩’이지 않습니까?”
“그게 왜?”
“회장님뿐만 아니라 도강그룹의 강 회장님, 한서그룹 임 회장님도 그 물건을 원하셨지만 손에 넣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수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랬지.”
“그렇게 쉽지 않은 물건을 굳이 찍으신 걸 보면, 능력 검증 차원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물건을 손에 넣어야 해.”
이수지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 편의점에서 나는 두 손 가득 커피를 사서 나왔다. 택시를 타고 곧바로 유동진의 공장으로 갔다. 부산에 온 지 벌써 삼 일이 지났다. ‘퇴우이선생진적첩’을 보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힘겹다. 두 손이 무거우면 마음은 가벼울 만도 하건만, 나를 처음 맞아주는 저 훤칠한 남자 직원은 늘 표정이 어둡다.
“또 오셨어요?”
“네 또 왔어요. 점심 드시면 커피 생각날 것 같아서요.”
나는 무작정 직원의 손에 봉지를 쥐여줬다.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셔도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직원이 봉지를 다시 나한테 주려는 것을 뒤로 슬쩍 빠져서 피했다.
“그냥 드세요. 제가 계속 귀찮게 해드리고 있잖아요. 저도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그 말에 직원은 나에게 봉지를 돌려주는 것을 포기했다. 직원은 사람들한테 커피를 나눠주고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곧 점심인데 식사나 하고 가세요.”
“저야 좋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여기까지 나를 들인 것을 보면, 관계의 진전이 아예 없진 않다고 위안을 삼았다. 반찬은 제육볶음과 메추리알조림, 배추김치였다. 배가 고팠지만 굳은 표정의 남자직원을 앞에 두고 입맛이 돌지 않을 것 같아서 적게 펐다. 식당 규모가 크지 않아서인지 4인용 테이블마다 수저통이 있었다. 직원이 수저통에서 숟가락 젓가락을 꺼냈다. 나도 내 것을 꺼내려 수저통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굳어 버렸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수저통이 아니라 필통이었다. 붓을 꽂아 두는 목적으로 쓰인 백자 필통 말이다. [ 20,000원 | 진 | 200,000,000원 | 1880년대 ] 위아래 어느 정도 제외하고 몸통 전체를 가락지 모양으로 투각했다. 총6단으로 길이는 15cm, 지름은 10cm 정도였다. 가락지의 모양은 기계로 찍어낸 듯 균일했다. 도공의 정교한 솜씨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백자필통의 장식성이 더 두드러져 안료로 꾸며진 작품들이 많다. 하지만 이 작품은 투각만으로도 화려함을 드러냈다. 또한 100년 이상 지났음에도 빙렬도 없고 광택도 좋다. 무엇보다 구매가격이 이만 원인데 최고가가 이억 원인, 엄청난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물건이다. 물론 이건 소유자가 이 가치를 모를 때 이야기다. 하지만 이렇게 수저통으로 쓰는 것을 보면 가치를 모르는 게 분명하다.
“저기…… 괜찮으세요?”
멍한 나를 보고 직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 네. 배가 너무 고파서 정신이 없나 봐요. 하하하.”
밥을 먹으면서도 내 신경은 온통 수저통에 쏠려 있었다. 저런 귀한 물건이 어떻게 여기서 수저통으로 쓰이고 있을까?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곳은 다 나무 수저통인데 유일하게 우리 테이블만 백자 필통이다.
“이 테이블만 수저통이 다르네요?”
“아, 수저통 하나가 없어져서요. 이건 제가 근처 시장에서 산 건데, 수저통으로 써도 될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그야말로 밀리언달러베이비다. 모든 상품이 1센트에 판매되는 1센트 가게에서 백만 불 이상의 가치를 가진 물건을 발견하는, 그 흔치 않은 경우! ‘퇴우이선생진적첩’을 뒤로하고 이 필통을 사서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쯤에서 나는 선택해야 했다. 이 필통을 택할지, 아니면 이 도도한 직원의 마음을 택할지. 먹는 둥 마는 둥 식사가 끝날 때쯤 겨우 결정을 내렸다.
“이 수저통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아세요?”
“네? 갑자기 왜 수저통은……. 아, 이거 정교하게 보이지만 공산품이예요.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까 이만 사천 원이면 살 수 있더라구요.”
직원은 가짜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아니요. 못해도 일억은 되는 물건이에요.”
“에이 설마…….”
직원의 눈이 커졌지만 쉽게 믿지 못했다.
“못 믿겠으면 저한테 백만 원에 팔아요. 이거 이만 원에 샀으니까 백만 원이면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거잖아요.”
직원이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었다.
“만약 정말 그런 물건이라면, 저한테 왜 말해 주시는 거예요? 다른 핑계를 대서 살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럴 수 있죠.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정말 그랬다가는, 사장님이 물건을 팔지 않으시는 이유를 영영 알지 못하게 될 거 같아서요.”
“세상에, 정말 일억짜리 물건이구나…….”
직원은 고민이 되는지 한참을 입을 다문 후에 열었다.
“저도 정확하게는 몰라요. ……2년 전에 회사가 많이 어려워서 직원들 월급도 주기 어려운 시기가 있었어요. 직원들은 사장님이 비싼 미술품 물려받은 것을 아니까 은근히 기대했었죠.”
“미술품을 팔아서라도 회사가 정상화되길 바랐군요.”
“네. 맞아요.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사장님은 팔지 않으셨어요. 구매자까지 만났는데 결국 팔지 못하셨죠……. 이게 제가 아는 전부예요.”
돈이 정말 필요한 상황에서도 미술품을 팔지 않았다. 하나는 명확해졌다. 유동진은 돈 때문에 물건을 팔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럼 대체 뭐 때문에? * 고급 한정식 집에서 나는 유동진과 마주했다. 웃고 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열에 아홉 나는 ‘퇴우이선생진적첩’을 사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마지막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 없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닙니다. 며칠 동안 직원들 간식을 챙겨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 인사하러 나왔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런 것도 아닌데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써주신 건 맞지 않습니까?”
유동진은 시선은 어느새 창 너머 중앙정원에 가 있었다. 꽃과 나무로 꾸며진 정원은 아름다웠고, 돌로 된 작은 우물은 운치를 더했다.
“예전에 아버님과 자주 오셨던 곳이라고 들어서 예약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유동진이 고개를 젓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듯 애틋한 눈길로 중원을 훑어봤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오니 좋군요.”
그를 가만히 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지금 다니는 가게는 아버지 가게입니다.”
“아버님이 자랑스러워하시겠군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내심 뿌듯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들이 며칠째 부산에 있으니 아버님이 걱정하시겠습니다.”
“하루 빨리 올라오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빈손으로 가기 싫어 버티고 있습니다.”
“미안하군요.”
나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길 원했다면 5일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했을 터였다.
“미안하시라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저 저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장님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