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위조자 (1)2021.01.23.
그림을 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생생한 인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안경이 없었더라면 단원의 그림이라고 확신했을 작품이다. 어쩐지 이 그림, 낯설지가 않다. 이건 분명 그 사람 작품이다. 지난번 나까마에게 산 단원의 위작, 그걸 그린 바로 그 사람이다. 얼어버린 날 보고 정연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감정사님, 괜찮으세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좀 무리해서 그런지 멍해졌나 봐요.”
“죄송해요……. 저희도 시간이 얼마 없어서, 이렇게 무리를 하시게 했네요.”
“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마지막 작품이니까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네.”
나는 천천히 풍속화첩을 봤다. 단순히 감정하는 시늉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림이 궁금했다. 투전판에서 패를 보면서 기 싸움 벌이는 모습, 쫙 펼치진 논 옆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노동의 고단함을 잊는 모습, 아비가 짚신을 삼으면서 집중해 있는 틈을 타 아이가 물건을 갖고 도망치는 모습 등등이 화첩에 실려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그림이 없었다. 위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료됐다. 자세히 보니 단원의 그림과 다른 점이 보였다. 힘 있는 필선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단원 특유의 투박함보다는 섬세함이 느껴졌다. 내 표정을 본 정연주는 진작이라 확신을 얻은 것 같았다.
“감정 끝나셨나요?”
“네.”
정연주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진작이죠?’
규정상 감정사한테 그런 질문을 먼저 하면 안 되기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심리적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위작입니다.”
“저…… 정말 위작이에요?”
“네. 위작이에요. 아주 잘 그린 위작이요.”
“아……. 그렇군요.”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능이 아깝네요.”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왜 위작을 그리는 걸까? * 나는 가게로 오자마자 창고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나까마에게서 산 단원의 위작, 바둑 그림이 있었다. 같이 샀던 고려청자는 이미 팔았지만, 이건 위작이라 팔 수 없었다.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존재 자체로 멋있기에 그러고 싶진 않았다. 바둑 그림을 지그시 보았다. 필치, 구도, 화풍까지 옥션에서 본 그림과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한결같이 느껴지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생생함, 이건 같은 사람이 그렸다고밖에 볼 수 없다. 따라 들어온 아버지가 물었다.
“왜 그러냐?”
“이 그림 그린 위조자요, 이것만 그린 게 아닌 것 같아요. 오늘 옥션에 가니까 이 사람이 그린 화첩이 있더라구요.”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 안타깝구나. 풍속화를 그리는 재능이 타고난 것 같은데…….”
“그렇죠? 화첩에서 본 것도 풍속화인데, 정말 하나하나 그림이 너무 좋았어요.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이 왜 자신의 그림이 아닌 위작을 그릴까요?”
아버지가 지그시 그림을 보다 입을 열었다.
“위작밖에 그릴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하지만 곧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더 이상 한국화로 풍속화가 그려지기 어려워서 하시는 말씀이죠?”
“그렇지. 풍속화는 인간의 생활상을 그린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야. 그러니 한국화로 풍속화를 그린다면 뭔가 어색한 느낌이 날 거다.”
“하지만 조선시대 풍속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그리는 작가들이 있잖아요. 잘 모르지만 TV나 신문 기사에서도 몇 번 본 적 있어요.”
“지감아. 언론에 비춘다고 해서 그게 주류라는 것은 아니다. 한국화는 이미 주류에서 밀려 있다. 몇몇 유명 작가들에 의해서 언론에 비춰질 뿐이지, 그 저변은 얕아.”
그 말을 보고 그림을 보니, 재밌는 그림인데도 마음이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시대를 잘못 탄 비운의 작가의 작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누군가의 그림을 위조하는 사람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 통화하던 강정휘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멈칫했다.
“현성 미술관에 대여해주시기로 하셨다구요?”
[네. 덕분에 아버지 유품을 팔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찾아오셔서 이제는 팔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강정휘의 눈에 경련이 일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당연히 그런 압박감을 느끼죠.”
[근데 팔지 않고도 많은 분들과 작품을 공유할 수 있어서 기분이 정말 좋네요.]
“다행이에요. 근데 이거 어쩌죠? 제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바쁜 분 너무 붙잡고 있었네요. 다음에 서울 올라가면 인사드리겠습니다.]
“네. 꼭 봬요.”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자연히 그 얼굴을 보는 김 비서는 움츠러들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강정휘는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대여를 해 줬다고? 내가 그렇게 팔지 말라고 말했는데!”
한지감이 ‘퇴우이선생진적첩’을 구매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는 소리를 듣고, 강정휘는 유동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하는 것처럼 통화를 시작했다. 자연스레 ‘퇴우이선생진적첩’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도 팔라고 찾아오는 사람 있어요?
[얼마 전에도 현성에서 팔라고 왔어요. 솔직히 좀 흔들립니다. 저 같은 그림 무식자보다는 아버지처럼 이 유물을 아껴 줄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모든 사람들이 그림을 잘 알아서 소유하는 건 아니에요. 중요한 건 소중한 사람과 함께했던 추억이죠. 아버님과 소중한 추억을 돈으로 계산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죠.]
추억 타령을 늘어놓으면서 그림을 파는 것이 아버지와 추억을 파는 것인 양 몰아갔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그림을 파는 걸 죄스러워하는 유동진의 마음을 이용했다. 그렇게까지 했으니 유동진이 당연히 유물을 팔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대여’라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번 일로 이수지가 한지감을 신뢰하게 되었을 것이다. ‘퇴우이선생진적첩’을 구매하진 못했지만 대여했다. 어쨌든 현성 미술관에 ‘퇴우이선생진적첩’이 걸리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한지감, 아주 많이 컸네. 머리를 잘 써. 지방대 출신 주제에 말이야. 그 바쁜 분이 오늘은 또 어디를 가셨을까?”
“탑 옥션에 갔습니다. 아무래도 옥션에 감정위원으로 위촉된 것 같습니다.”
“위촉이 되었다? 이제 다른 재벌가에서도 접촉을 하겠네. 그지?”
강정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김 비서가 눈치를 보다 말했다.
“제가 다시 놈을 데려오겠습니다. 어차피 안경의 존재를 대표님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까.”
“어떻게 데려올 건데? 때려서? 이제 한지감은 물리적인 힘으로 다룰 급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다른 힘을 빌려 봐야지.”
강정휘는 악에 차 있었다. * 집으로 가는 길에 핸드폰이 울렸다. 경환에게서 온 전화였다.
[형, 집이야?]
“지금 지하철에서 집으로 가는 중, 왜?”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고.]
“오늘 데이트 있다고 하지 않았어?”
[취소됐어. 급한 일이 생겼대.]
그럼 그렇지. 연애 사업으로 바쁘신 양반께서 웬일로 날 찾나 했다.
“꿩 대신 닭이다 이거냐?”
[에이. 형이 무슨 닭씩이나 해.]
“닭도 아닌 이 몸은 집에 들어가서 쉴 테니, 밥은 너 혼자 먹어라. 응?”
[그러지 말고 밥 먹자. 형도 배고프잖아.]
안 그래도 허기지긴 했다.
“그래. 밥 먹자. 뭐 먹을 건데?”
[고기! 소고기!!]
경환을 만나 근처 고깃집으로 갔다. 눈을 반짝이면서 고기를 굽는 경환을 보자니 의심이 피어올랐다.
“고기 먹고 싶어서 전화했지?”
“아니. 내가 그럴 사람이야?”
경환은 흠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근데 이 자식이!
“고기가 먹고 싶으면 그냥 먹고 싶다고 하지.”
“아니라니까.”
“그래, 아닌 걸로 하자.”
고기가 익자 우리는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배가 찬 뒤에야 비로소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형은 연애 안 해?”
“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그 갤러리 다닌다는 동생, 귀엽다며.”
“그냥 동생이거든?”
“남녀 사이에 그냥 동생이 어딨냐?”
경환이 음흉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이가 없어서.
“내 연애사업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연애나 신경 써.”
“나는 신경 쓰고 할 것도 없지. 아아주 잘 진행되고 있거든.”
경환이 바보스럽게 헤벌쭉 웃었다. 생각만 해도 좋은 모양이다. 저런 감정을 느낀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경환이 으스대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 봐. 부럽지?”
“그래. 엄청 부럽다! 그 예쁜 여자 친구, 도대체 언제 소개시켜 줄 거야?”
“곧 소개시켜 줄게. 안 그래도 우리 채령 씨도 형 궁금해하더라구. 아! 사진 보여 줄까?”
대답도 안 했는데 핸드폰을 꺼내더니 사진을 냉큼 내 앞에 대령했다. 사진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여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긴 생머리에 하얀 얼굴, 한 떨기 백합처럼 청순해보였다. 왜 그렇게 오랜 시간 경환이 끙끙거리면서도 마음을 접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예쁘지?”
“정말 예쁘다. 김경환이 좋아할 만하네. 근데 너, 너무 얼굴만 본 것 아니냐?”
“우리 채령 씨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야. 마음이 더 예쁘다고! 완전 천사야.”
사진 속 여자 친구를 보는 경환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아주 단단히 빠진 것 같았다. 문득 경환의 여자 친구가 한국화 전공자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한국화 전공자라며. 그림 그린 건 없어?”
“왜 없어. 당연히 있지!”
사진이 얼마나 많은지, 경환의 손이 빠르게 돌아가는데도 좀처럼 찾아내지를 못했다. 기다림이 길어져 나는 흥미가 떨어졌다.
“나중에 보여줘.”
“아니, 있다니까!”
말리는 내 손을 뿌리치며 경환은 사진 찾아내기에 열을 올랐다. 잠시 후, 마침내 사진을 찾아낸 경환이 밝은 미소로 말했다.
“여기 있다! 멋지지?”
경환이 내게 사진을 보여주었고, 그 순간 나는 멈춰버렸다. 경환의 여자 친구가 그리는 그림은 짚신 삼는 풍속화였다. 아비가 짚신을 삼으면서 집중해 있는 틈을 타 아이가 물건을 갖고 도망치는 모습이 담겨 있는 그림. 바로 내가 오늘 옥션에서 감정했던 위작이었다.
“감명 받았구나? 이 그림도 있어.”
넘긴 사진 속 나타난 그림은 쫙 펼치진 논 옆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노동의 고단함을 잊는 모습이었다. 이 그림 역시 화첩에 있는 그림이었다.
“모두 여자 친구가 그린 거야……?”
“응!”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경환의 여자 친구가 단원의 그림을 흉내 낸 위조자이다.
“정말 잘 그리지 않아? 그림 그린 것을 볼 때마다 내가 정말 엄청난 사람이랑 사귀고 있는 것 같아.”
달콤한 꿈에 젖어 있는 경환의 앞에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머…… 멋지네.”
* 토요일 아침, 나는 일찍 집에서 나왔다. 경환과 마주치기 싫어서였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며칠 동안 계속 이랬다. 딱히 갈 곳이 없어 가게로 갔다. 그리고 창고 속 단원의 위작을 보았다.
“이제 누가 그렸는지 알게 됐네.”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며칠 동안 바쁘게 일하면서도 계속 고민했다. 이 사실을 경환에게 말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경환을 생각하면 말하는 것이 맞다 싶다가도, 저렇게 빠져 있는데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러다 또 위조자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맞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경환을 생각하면 신고는 안 될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위조자의 재능이 아깝게 느껴졌다. 몇 시간 동안 그렇게 그림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아무래도 혼자 결정을 내리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으셨다. 누구라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연락처를 뒤적이는데 다영의 이름이 보였다. 나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다영아. 출근 준비는 잘 하고 있어?”
[준비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떨리네요.]
“그러겠다. 나도 며칠 전에 옥션에 처음 감정하러 갔는데 좀 떨리더라구.”
[나만 쫄보는 아닌 것 같아서 위로가 되네요.]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닌데…….”
고민하다가 나는 경환의 일을 털어놓았다.
[어려운 일이네요. 오빠 여자 친구도 아니고 아는 동생 여자 친구이니까.]
“너라면 어떻게 할 거야?”
[저라면 동생한테 말할 것 같아요.]
“역시…… 그래야겠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고 다영이 말했다.
[뜬금없지만 저는 그 위조자 좀 부럽네요.]
“부럽다고?
[위작인 것을 아는데도 빠져든다면서요. 그러기 힘들잖아요. 일단 가짜라고 하면 그림이 좋아도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인데요.]
“그건 그렇지.”
그래. 말을 하자. 입이 차마 떨어지진 않겠지만 어떻게든 말하자.
[거장 미켈란젤로도 한때는 위조꾼이었대요.]
“정말?”
[네. 고대 로마 작품을 위조했는데, 너무 잘해서 추기경에게 팔렸다고 해요.]
“안 들켰어?”
[나중에 밝혀지긴 했는데, 미켈란젤로 명성이 높아진 뒤라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어요.]
“어째 좀 불공평하네.”
수화기 너머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죠. 애초에 재능 자체가 불공평한 거예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결정을 마친 나는 경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