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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도강 그룹 강 회장 (2) (26/226)

26화 도강 그룹 강 회장 (2)2021.01.30.

16560249746887.jpg“거두절미하고 나는 이 필통을 사고 싶어요. 내가 얼마에 사면 되겠어요?”

드디어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 도래했다. 골동상으로서는 당연히 팔아야 하지만 내 마음은 팔고 싶지 않다. 나는 고민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16560249746892.jpg“이억에 드리겠습니다.”

거래를 터는 시작이니 조금은 싸게 해주는 것이 맞겠지만, 나는 최고가를 불렀다. 소장하고 싶은 물건을 파는 마당에 싸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비싼 가격 때문에 강석병이 물러서기를 기대하기도 했다.

16560249746887.jpg“이거 생각보다 비싸네요.”

16560249746892.jpg“네. 이 필통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가격입니다.”

놀랐는지 강석병의 눈이 동그래졌다.

16560249746887.jpg“가장 높은 가격이라, 이거 어째 바가지 쓰는 기분이네요.”

16560249746892.jpg“다른 물건이라면 저렴한 가격으로 말씀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 물건은 저한테 특별해서 가장 높은 가격을 말씀드렸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버지 말씀이 맞았다. 나는 이 물건과 사랑에 빠졌다. 정말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그것이 맞았다. 강석병이 화를 내면 어쩌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예상외로 껄껄 웃었다.

16560249746887.jpg“특별한 물건이라면 그럴 수 있죠. 나도 수장가이니 이해해요. 좋아요, 이억에 사죠.”

처음으로 물건을 팔고도 희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16560249746892.jpg“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일어서야 하지 않을까 눈치를 보는데, 강석병이 말했다.

16560249746887.jpg“아, 지금 생각났는데, 물건 하나 봐줄 수 있어요?”

16560249746892.jpg“네.”

강석병이 비서실장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움직였다. 잠시 후, 비서실장은 액자를 갖고 나타나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가로 40cm, 세로 80cm 정도 되는 수월관음도였다. [ 1,200,000,000원 | 진 | 1,200,000,000원 | 1350년대 ] 보존 상태가 안 좋은 고려불화였다. 관음(觀音)은 중생을 돌보고 구제하며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수월관음(水月觀音)은 관음보살의 한 모습으로, 물속에 비친 달을 바라보는 보살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수월관음도는 대나무를 배경으로 등지고 물가의 암좌 위에 앉아 있고 선재동자가 그런 수월관음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주로 표현된다. 이러한 도상은 화엄경에 근거한 것이다.

16560249746892.jpg“고려 수월관음도네요.”

16560249746887.jpg“맞아요. 진품인지 아닌지, 가격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요.”

나는 천천히 그림을 눈으로 보고는 확대경을 꺼내 세밀하게 다시 봤다. 대나무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흐릿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얹고 왼발은 내린 반가좌의 자세와 염주를 감은 오른손, 원형의 거신광과 두광 등 고려 수월관음도가 갖춘 통상적 특징들이 보였다. 현존하는 고려불화는 전 세계적으로 80~100점 정도이고, 그중 한국에 있는 것은 10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하나였다.

16560249746892.jpg“좋은 작품이네요. 진품 맞습니다. 가격은 칠억에서 십억 정도 됩니다.”

16560249746887.jpg“그래요.”

십이억이 최고가지만 적정가라고 보긴 어려웠다. 회장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십이억을 주고 산 물건인데 십억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최고가가 십이억인데 그냥 높여서 말할까 고민도 됐지만, 가치를 정확히 말해 주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다.

16560249746887.jpg“이거 내가 돈을 더 주고 산 모양이네요. 손해를 엄청 본 것 같아서 갑자기 기분이 영 안 좋아요.”

16560249746892.jpg“죄송합니다.”

16560249746887.jpg“지감 씨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강석병이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그러이 넘겨준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신경은 온통 백자 필통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16560249746887.jpg“오늘 급하게 불러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하루 전에 꼭 연락 줄게요.”

이제 가 보란 말이었다.

16560249746892.jpg“감사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서기 전 백자 필통을 보면서 속으로 미련 뚝뚝 떨어지는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비서실장이 말했다.

1656024977004.jpg“물건 대금 이억과 시가감정 비용 천만 원, 도합 이억 천만 원 계좌로 송금하였습니다.”

시가감정 비용으로 천만 원이라니,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다. 10억의 1%에 해당되는 돈이기 때문이다. 기관마다 개인마다 시가감정 비용 차이가 있지만 보통 감정액의 0.2~0.3% 정도를 받았다.

16560249746892.jpg“너무 많이 주신 것 같은데요?”

1656024977004.jpg“회장님 뜻이었습니다. 사양치 마십시오.”

진지한 비서실장의 표정은 절대 거절할 수 없다는 압박을 느끼게 했다.

16560249746892.jpg“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정문으로 나가니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차가 대기 중이었다.

1656024977004.jpg“그럼 조심히 가세요.”

16560249746892.jpg“네. 감사합니다.”

내가 타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좋은 차의 성능에 감탄할 만도 하건만 그러지 못했다. 불과 30분전까지 내 무릎 위에 있던 백자 필통이 이제는 없다는 것이 헛헛했다. * 비서실장이 회장실로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백자 필통이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강석병은 백자 필통을 지그시 보고 있었다.

16560249746887.jpg“잘 배웅했어?”

1656024977004.jpg“네.”

강석병은 집안사람과 비서실장에게만은 말을 놓았다. 강한 경상도 억양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

16560249746887.jpg“자네, 내가 왜 필통을 샀는지 알겠어?”

강석병은 백자 필통에 관심 없었다. 백자 필통은 한지감이란 사람을 불러내기 위한 하나의 핑계였다. 몇 년 동안 설득해도 꿈적도 안 했던 유동진이 ‘퇴우이선생진적첩’을 현성 미술관에 대여하게 만들었다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런 강석병이 백자 필통을 보자마자 사겠다고 한 것이다.

1656024977004.jpg“한지감 씨에게 소중한 물건이기 때문 아닙니까?”

16560249746887.jpg“하하! 하하하!! 역시 자네는 나를 잘 알아.”

한지감의 애틋한 눈빛을 강석병은 놓치지 않았고, 그 순간 바로 백자 필통을 사겠다고 했다. 그가 사람을 테스트하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소중한 물건이나 존재는 사람의 우선순위를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한지감은 백자 필통에 남다른 감정을 느끼면서도 강석병에게 팔았다. 소중한 물건이어서 가격이 높다는 것까지 숨기지 않고 밝혔다.

16560249746887.jpg“한지감은 장사꾼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어. 그러면서도 실리는 챙겼지. 게다가 고동(골동의 옛 이름)으로는 기분 맞춰 주려는 거짓말도 안 하더군.”

수월관음도의 적정가를 강석병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옥션에서 현성 그룹 이 회장과 경합이 붙는 바람에 십이억까지 올라간 것뿐이다. 그런데도 굳이 모른 척했던 이유는, 한지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였다. 강석병을 가만히 살피던 비서실장이 입을 열었다.

1656024977004.jpg“회장님, 한 말씀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16560249746887.jpg“해봐.”

1656024977004.jpg“한지감 씨,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번 거래는 좀 더 신중하셨으면 합니다.”

한지감에게 급하게 연락이 간 이유는 강석병이 지시를 늦게 내려서만은 아니었다. 그를 부르기 전 비서실장은 한지감에 대한 기본적 신변조사를 진행했다.

16560249746887.jpg“자네는 너무 딱딱해서 탈이야. 세상만사 어떻게 다 그렇게만 돌아가나. 그래도 걱정 말게. 당분간은 부를 생각 없으니.”

1656024977004.jpg“강정휘 때문입니까?”

강석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동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강정휘는 한지감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신변조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강정휘 밑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 그만두었다는 걸 보니,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모양이었다.

16560249746887.jpg“강정휘 그 독사 같은 여자가 가만히 있겠어? 방해도 제대로 안 먹혔겠다, 단단히 독이 올랐겠지.”

분명 한지감을 수렁으로 빠트릴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 토요일. 단잠에 취해 있고 싶었지만, 오후가 되기 전 일어나 건민대학교로 향했다. 고3 때는 생각도 않았던 곳이지만 재수생이 되었을 때는 이곳에 정말 들어오고 싶었다. 입학하고 싶었던 곳을 사회인이 되어서 찾으니 기분이 묘했다. 미대 건물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16560249811277.jpg“오빠! 여기예요!”

다영이 아담한 몸으로 손을 든 채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나는 픽 웃으면서 다가갔다.

16560249746892.jpg“다 보이거든? 뭘 그렇게 깡충깡충 뛰냐. 토끼도 아니고.”

16560249811277.jpg“반가워서 그러죠.”

16560249746892.jpg“내가 반가운 것이 아니라 벌금 안 내도 돼서 좋은 거잖아.”

오늘 다영이 이곳으로 날 부른 이유는 벌금 때문이었다. 친구의 작품이 전시되는데, 남자와 함께 와야만 벌금을 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피 같은 휴일 아침부터 이렇게 동원됐다. 다영이 애교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16560249811277.jpg“제가 벌금 때문에만 오빠 불렀겠어요? 겸사겸사 얼굴도 보고 싶어서 그러지이.”

16560249746892.jpg“어이구.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해라.”

16560249811277.jpg“얼른 들어가요.”

다영이 나를 끌어당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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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비 정중앙에는 잔칫날인 양 김밥, 잡채, 제육볶음 등등 음식이 쫙 깔려 있었고, 좀 더 안으로 들어가니 일정한 간격을 띄고 그림과 설치 미술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태까지 내가 봐왔던 서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다영은 재빨리 나를 친구에게 데려가 보란 듯이 인사시켰다. 친구는 내가 골동상을 한다는 말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봤다. 그 눈빛에 내가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다영이 나섰다.

16560249811277.jpg“작품 설명 좀 해 줘 봐.”

친구의 작품은 조명이었다. 작은 스탠드 조명에 푸른색 한지를 두른 네모난 곽이 씌워져 있었고 그 위엔 ‘My brother’이라고 쓰여 있었다.

165602498293.jpg“어렸을 때 동생이 어두운 걸 무서워했거든. 그러면 나는 동생이 좋아하는 바다 소리를 냈어.”

다영의 친구가 곽을 앞뒤로 움직이면서 말을 이어 갔다.

165602498293.jpg“이건 바다 물결이 철썩철썩 치는 것을 형상화한 거야.”

저건 좀 과장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남동생과의 추억을 깎아내리는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다영이 깔깔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16560249811277.jpg“웃기고 있네. 너 남동생이랑 만나면 욕하는 사이잖아. 지어낸 이야기 치고는 그럴듯하다. 교수님이 좋아하셨어?”

165602498293.jpg“완전 흡족해하셨지. 쓸모없는 동생,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써먹냐.”

나는 이게 뭔가 싶어 멍해졌다. 친구와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한 바퀴 전시회를 둘러봤다.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가장 이해가 안 갔던 그림은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이 마구 뒤섞여 있는 그림이었다. 거기에다 제목이 무제여서 도무지 무슨 의도로 그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건물에서 나와서도 나는 문화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거짓으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가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들……. 도대체 현대 미술은 뭘까?

16560249811277.jpg“오빠, 왜 그러세요?”

16560249746892.jpg“왜 지어낸 이야기를 작품에 붙이는 거야?”

16560249811277.jpg“아아. 그거 때문이구나. 원래 그렇게 해요. 조금 사기 같죠?”

16560249746892.jpg“완전히 사기 같은데?”

16560249811277.jpg“왜 그런 말도 있잖아요. ‘예술은 사기다.’ 물론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16560249746892.jpg“예술이 어떻게 사기야? 현대미술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정색하는 나를 보고 다영이 큭큭대며 웃었다.

16560249811277.jpg“언젠가 이해가는 날이 있겠죠. 제가 그날까지 많이 알려 드릴게요!”

16560249746892.jpg“됐거든!”

문득 고미술을 한다는 것이 감사해졌다. 적어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 나까마가 갤러리 정문으로 들어섰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던 것과 달리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 앞에 김 비서가 섰다. 김 비서의 다부진 체격 때문에 그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165602498293.jpg“가…… 강정휘 대표 만나러 왔습니다.”

16560249859162.jpg“이쪽으로 오시죠.”

김 비서는 나까마를 대표실 앞으로 데리고 가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16560249885016.jpg“들어오세요.”

강정휘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문이 열렸고 나까마가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강정휘가 가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16560249885016.jpg“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165602498293.jpg“으흠……. 왜 불렀습니까? 애송이 시켜 사람 등쳐먹을 때는 언제고.”

치솟는 짜증을 잠시 뒤로하고 강정휘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지감을 넘어트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연극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6560249885016.jpg“화 많이 나셨죠? 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렇죠. 한지감에게 계속 강조했어요. 돈 때문에 양심을 저버리지 말라고, 제대로 가격을 쳐주라고. 근데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그 말에 나까마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165602498293.jpg“……알면 됐습니다.”

16560249885016.jpg“계속 이야기하는데도 돈만 쫓아서 그만두게 했어요. 얼마 전에서야 들었습니다. 탑 옥션 로비에서 한지감이 못할 짓 했다면서요?”

그때를 떠올리는 나까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165602498293.jpg“내가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이 바닥에 오래 있지도 않은 애송이가 말이야, 감히 나를 창피 줘?”

16560249885016.jpg“당연하죠. 저라도 그렇게 느꼈을 겁니다. 일 년도 채 일하지 않은 사람이 뭘 알겠습니다.”

165602498293.jpg“내 말이 바로 그거야!”

16560249885016.jpg“그래서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앞으로 한지감 씨가 계속 돈만 쫓으면서 고미술계를 어지럽히는 건 아닌지요.”

나까마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165602498293.jpg“그런 녀석은 애초에 싹을 잘라버려야 하는 건데!!”

16560249885016.jpg“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한지감을 이 업계에 들여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도와주십사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겁니다.”

부자들의 비위를 지겹게 맞춰 온 강정휘였다. 감정적인 나까마를 상대하는 건 그녀에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어느새 나까마는 강정휘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165602498293.jpg“그 방법이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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