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바꿔치기 (1)2021.02.01.
“제가 한지감에게서 산 달항아리 백자가 있습니다. 그걸 이수지에게 판매하려고 합니다.”
나까마가 괜한 기대를 했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걸로 뭐가 되겠습니까!”
“판매한 달항아리 백자가 가품이라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죠.”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나까마가 눈을 반짝였다.
“바꿔치기를 하자는 겁니까?”
“네. 큰돈이 오가는 거래이니 분명 이수지는 한지감을 부를 겁니다. 감정 받을 때는 진품을 보여 주고…….”
“줄 때는 가품을 준다?”
“네. 바로 그겁니다.”
강정휘는 사냥을 성공한 사람처럼 여유로워졌다. 제대로 걸려든 나까마가 조바심을 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달항아리 백자, 가품을 구해 주시면 됩니다.”
“달항아리 백자 항아리를 재현에 낸 것 중에 지다이 맛(옛맛) 나게 구워진 걸 가져오면 되겠구만!”
나까마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실제로 재현품 중 옛맛이 나게 구워진 것들이 진품의 탈을 쓰고 시장에 돌아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문외한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이되, 전문가가 볼 때는 가품인 것이 확실한 정도여야 해요. 무엇보다 진품과 그 모습이 비슷해야 하고요.”
“알겠소.”
“잘 준비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씨익, 강정휘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 ‘강정휘 갤러리’ 간판을 보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아……. 내가 여기 또 오게 될 줄이야. 이수지의 수행원에게 몇 시간 전 급하게 전화가 왔다. 강정휘에게서 고미술품을 사서 감정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개인 감정사에게 맡기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이수지는 내가 왔으면 좋겠다고 끝끝내 억지를 부렸다. 오늘 가게에 손님이 오는 날이기도 하고, 강정휘와 대면하고 싶지 않았기에 강력히 거절 의사를 전달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어차피 계속 강정휘를 피하기도 힘들 것 같아 결국 이수지의 요구를 수락했다. 대표실로 가기 전 먼저 화장실에 가서 손을 깨끗하게 씻었다. 면장갑을 준비하긴 했지만, 유물을 손으로 만져야 할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대표실 앞으로 가니 험악한 김 비서가 보였다.
“안녕하셨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노크를 한 뒤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어 주었다. 수행원을 대동한 이수지가 강정휘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중 처음 입을 연 사람은 이수지였다.
“한지감 씨, 제가 불렀어요. 큰 거래다 보니 정확한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불편할 리가 있나요? 안 좋게 끝난 것도 아닌데. 안 그래, 지감 씨?”
한결같이 가식적인 모습에 속이 메슥거렸다. 그렇지만 난 이 자리에 전문가로 와 있었다. 그러니 아마추어 같은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 나는 강정휘 같이 가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럼 다행이구요.”
“근데 이래도 괜찮나? 이거 지감 씨 가게에서 산 물건인데.”
이수지의 얼굴에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 스쳤다. 그 이야기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보나마나 비싼 물건이란 이야기만 오갔겠지. 두 사람 밑에서 모두 일해 봤기에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이수지가 재빠르게 도도한 표정으로 바꾸고 말했다.
“상관없어요. 한지감 씨 손을 거쳐 갔다면 확실한 물건일 테니까요.”
분명 신뢰를 받았다 좋아해야 하는데, 그 상대가 이수지라서 그런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때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강정휘가 나를 묘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저 기분 나쁜 눈빛은 뭐지? 그녀가 시선을 거두고 이수지를 보면서 말했다.
“곧 김 비서가 물건을 가져올 거예요.”
말 끝나기가 무섭게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김 비서가 조심스레 달항아리가 들어간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 가게에서 가져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상자가 테이블에 놓이고, 김 비서가 끈을 풀려고 하자 내가 막았다.
“여기부터는 제가 하겠습니다.”
귀한 유물을 비전문가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다. 김 비서가 미간을 구겼지만 이수지 앞이라 순순히 물러났다. 끈을 풀어 오동나무 상자를 열고 달항아리와 상자 사이의 솜 포대기를 빼냈다. 그런 뒤 조심스럽게 엉덩이 쪽을 양손으로 받쳐 달항아리를 꺼내놓았다. [ 3,500,000,000원 | 진 | 3,500,000,000원 | 1780년대 ] 달항아리 하나가 놓였을 뿐인데 온 방이 환해 보였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뽀얀 흰색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달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전에는 달항아리를 봤을 때는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미션이 뜨기 전에는 유물을 닦기만 하는 입장이라 불만이었고, 미션이 뜬 이후에는 파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감상을 와장창 깨부수는 이수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판매한 물건이라면서 왜 이렇게 감정이 오래 걸려?”
감상도 못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고객에게 그런 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영업용 미소와 함께 말했다.
“진품 맞습니다.”
“대금은 통장으로 넣어 드릴게요.”
“그러세요.”
강정휘가 찻잔을 들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또 저렇게 웃는다. 저 미소가 왜 이렇게 난 찜찜할까. 나는 달항아리 백자를 다시 싸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이수지가 물었다.
“상자 때깔이 좋네. 무슨 나무야?”
“오동나무입니다. 방습하고 방충 효과가 좋거든요.”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솜 포대기를 달항아리와 상자 사이에 넣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손님이 올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지감 씨, 바쁜 일 있으면 이만 가 봐요. 나머지는 김 비서 시키면 되니까.”
강정휘의 친절함이 꺼림칙하고, 김 비서에게 이 일을 맡긴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제 남은 건 솜 포대기를 꽉 차게 넣은 후 뚜껑을 덮고 끈으로 묶는 일뿐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대표실에서 나왔다. 허둥지둥 가게로 향하면서도, 강정휘의 묘한 미소가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 강정휘는 사무실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하하!! 하하하!!!!”
한지감에게 한 방 먹였다는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김 비서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가 있었다.
“대표님, 정말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래. 맞아. 계획도 완벽했고, 타이밍도 좋았지.”
한지감이 급하게 가서 정리가 다 되지 않은 것이 호재였다. 강정휘는 이수지와 데리고 사무실을 먼저 나섰고, 수행원에게는 갤러리 담당자가 붙게 만들었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김 비서는 진품 달항아리를 그냥 두었다. 그러고는 나까마가 준비해 놓은 가품 달항아리가 든 상자를 갖고 나가 차 앞에서 수행원에게 건넸다. 강정휘가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경이 있다고 해도 이번에는 빠져나오지 못할 거야. 이건 돈하고 관계가 없으니 안경이 도와주지 않을 거거든.”
김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수지가 달항아리 백자가 가품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한지감은 추락할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김 비서. 잘해 줘도 붙잡히지 않는 사람을 권력자들이 어떻게 갖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처참하게 무너트려. 그러고 나서 손을 내밀지.”
김 비서가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자신을 무너트린 사람의 손을 잡을까요?”
“잡을 수밖에 없지. 그게 유일한 살길이니까. 지금 이건 시작일 뿐이야. 산산이 조각내서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야지.”
강정휘는 어느 독재자처럼 잔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다음날, 이수지는 서울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창 앞에 서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한강까지 보였다. A호텔 스위트룸에서만 누릴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내가 왜 여기를 좋아하는 줄 알아?”
이수지 뒤에 서있던 수행원이 대답했다.
“서울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 아닙니까?”
“아니. 이런 곳에 자주 와야 내가 올라갈 곳이 어딘지 몸이 기억하거든. 그게 본능이 되는 거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역시 아가씨께서는 보는 눈이 다르십니다.”
수행원의 칭찬에 이수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때 달항아리 감정을 마친 감정사가 다가왔다. 어제 한지감의 가게에서 샀다는 말을 듣고 불안한 마음에 부랴부랴 오늘 아침 호출했다. 이수지가 힐끗 감정사를 봤다.
“끝났어?”
“네.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가품입니다.”
“뭐?”
이수지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그럴 리가! 한지감 가게에서 팔았고, 어제 한지감이 감정까지 했는데!!”
“18세기 유색이 아닙니다. 거기에다 약품으로 오래된 것처럼 가공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산화와는 다르게 균일한 손상이 보입니다. 한눈에 가품이라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개인 감정사는 겉으로는 심각한 척하고 있었지만 반짝이는 눈이 신났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자기 가게 물건이니 가품이라고 하지 못했겠죠. 거래되는 장소에 제가 있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신난 감정사와 반대로 이수지는 분노로 들끓었다.
“나한테 가품을 팔아?”
이수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 여느 때처럼 가게에서 유물에 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대장을 정리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이수지였다. 직접 전화를 건 적이 없기에 직감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지감입니다.”
[나한테 가품을 팔아? 죽고 싶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달항아리 가품이잖아!!]
“가품이라니요. 진품입니다.”
이수지가 귀청이 나가떨어질 듯 소리 질렀다.
[당장 와서 해명해!!]
그렇게 뚝 전화가 끊겼다. 아니, 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히 말이나 하고 끊든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예쁜 달항아리가 가품이라니. 개인 감정사가 뭔가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본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수행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지난번 호텔 스위트룸으로 오면 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런 일로 불려가야 한다는 것이 짜증나면서도 한 가지는 다행스러웠다. 마침 아버지가 화장실에 가셔서 이런 상황을 숨길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나갈 채비를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어디 가?”
“이수지가 급하게 감정해 달라고 하네요.”
“그래. 다녀와라.”
“네. 금방 다녀올게요.”
이때까지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눈앞에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수지의 말대로 달항아리 백자는 가품이었다. [ 3,000,000,000원 | 위 | 3,000,000,000원 | 2010년대 ] 어떻게 이게 가품일 수가 있지? 어제 봤을 때는 분명히 진품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멍한 나에게 이수지가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왜 또 진품이라고 말하고 넘어갈 생각이야?”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분명히 진품이었는데.”
“어제는 진품이었다고? 그럼 지금 진품이 발이 달려서 어디로 갔고 가품이 오기라도 했다는 거야!”
“…….”
상황이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소리만 질러대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삼십억으로 가품을 산 꼴이 되었지 않는가.
“이걸 감정사에게 안 보여주고 미술관으로 가져갔으면, 나는 가품을 삽십억이나 주고 산 멍청이가 됐을 거야!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됐을 거라고! 알아?”
이수지는 삼십억으로 가품을 샀다는 것보다 자신의 이미지 타격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뒤에 서 있던 이수지의 개인 감정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당하는 이 상황이 아주 고소한 모양이다. 불안했던 그간의 지위가 이번 일을 통해 견고해졌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어제는 진품이었는데 오늘은 가품이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거기에다 강정휘의 묘한 웃음, 확신이 든다.
“중간에 물건이 바뀐 것 같습니다.”
이수지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식으로 빠져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나 현성 그룹 이수지야. 어제 네가 분명히 진품이라고 했잖아! 그 물건을 애초에 판매한 것도 너고!”
“네. 맞습니다. 근데 어제까진 분명히 진품이었습니다. 어제 차에 물건을 직접 실으셨습니까? 사무실에서 나와서 물건이 실리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가게 일 때문에 나는 감정만 하고 급히 대표실을 떠났다.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네가 가품을 팔았다는 거야!! 말 돌리지 마, 한지감!”
나는 이수지를 똑바로 보고 소리쳤다.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말씀해 주세요!”
내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이수지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김 비서라는 사람이 들어 줬어.”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세요.”
“기억 안 나!”
이수지를 지나쳐 나는 수행원에게 다가갔다.
“기억하고 계시죠?”
“아…… 그게, 아가씨는 먼저 나가서 강정휘 대표님과 이야기 나누셨고, 저는 직원분이 할 이야기 있다고 해서 나갔어요. 김 비서님이 자신이 포장해서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구요.”
“그러니까 나중에 김 비서가 달항아리 상자를 들고 나왔군요?”
“네, 맞습니다.”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이수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쇼 그만하고 인정해. 괜히 강정휘에게 덮어씌우려고 하지 말고. 강정휘가 뭐하러 그런 일을 해?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자야. 난 현성 그룹 이수지라고!”
“이렇게 생각할 테니까요.”
“뭐?”
“자길 절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화살은 저를 향하게 되겠죠.”
이수지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게 정말 맞은 거라면 증명해 봐. 강정휘가 바꿔치기를 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