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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사과(謝過)의 가격 (29/226)

29화 사과(謝過)의 가격2021.02.06.

그래. 이수지가 사과를 한다 한들 그게 진심일 리 없었다. 진심 없는 사과보다는 이억이 현실적으로 훨씬 더 위로가 된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6560250541784.jpg“실망스럽습니다.”

표정과 다른 말이 나오자 이수지는 멈칫했다. 그렇지만 곧 도도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16560250541789.jpg“뭐가 실망스럽다는 거지?”

16560250541784.jpg“자신의 말의 무게가 이억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16560250541789.jpg“이억밖에? 지금, 더 달라는 거야?”

이수지가 앙칼지게 나를 쏘아봤고, 나도 지지 않고 봤다.

16560250541784.jpg“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고 했습니다. 평범한 사내의 말이 무게가 그 정도인데, 현성 그룹의 따님이자 곧 현성 미술관의 주인이 될 분의 사과의 가격이 이억밖에 되지 않다뇨.”

이수지는 돈을 더 뜯어내기 위해 하는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것 같았다.

16560250541789.jpg“그래서 얼마를 원하는데?”

16560250541784.jpg“현성 미술관의 주인이 되고 그 이상의 자리에 오르실 분이라면 그 말의 값을 감히 저울에 달 수 없겠죠. 저울에 달 수 없으니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받지 않겠습니다.”

16560250541789.jpg“정말 받지 않겠다고?”

나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16560250541784.jpg“네. 그 대신 나중에 제가 원할 때 한번 도와주십시오.”

이수지가 성은을 내리는 임금처럼 위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60250541789.jpg“알았어. 기억해 두지.”

나는 겉으로는 흐뭇한 듯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비꼬았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

16560250571278.jpg“푸하하! 하하하!”

깔깔거리며 웃는 다영을 보면서 나는 썩은 표정을 지었다.

16560250541784.jpg“재밌냐?”

이수지하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더니 저렇게 숨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그 말의 당사자는 나는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한참 지나서야 다영의 웃음이 멎었다.

16560250571278.jpg“오빠 완전 간신이다. 간신!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세 치 혀로 충신 여럿 날렸겠어요.”

16560250541784.jpg“간신이 아니고 지략가거든! 기분 안 나쁘게 말하려다 보니까 설탕 발린 말한 거야.”

16560250571278.jpg“에이. 아닌 것 같은데?”

16560250541784.jpg“맞거든!”

사실 나도 말하면서 민망해서 닭살이 돋았다. 아닌 척 표정관리를 하느라 애먹었다. 머리로는 돈 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은 아니라 부정했고, 그러던 중에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아부인 듯 아부 아닌 아부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16560250571278.jpg“하긴, 돈 많은 사람들은 맞는 말을 해도 거슬리면 끝이죠.”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16560250541784.jpg“그래! 난 사과를 돈으로 받기 싫었어. 그렇다고 완전 포기하자니,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고.”

16560250571278.jpg“잘했네요. 결국 원하는 걸 얻어냈잖아요. 혹시 이수지가 사과 값, 그냥 주지 않았어요? 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그런 것 나오잖아요. 거절했더니 괜찮은 사람이다 싶어서 오히려 가지라 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소신을 지킨 것이 도리어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 그래서 실리까지 챙기게 되는 상황. 정말 아름다운 그런 장면 말이다. 가득 기대감을 안은 다영을 보면서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16560250541784.jpg“안 주던데? 성격이 칼 같더라고. 순식간에 사과 가격을 딱 빼고 가져가라고 하더라.”

현실은 냉정했다. 이수지가 직접 돈을 뺀 것은 아니었고 수행원이 움직였다. 어찌나 빨리 돈을 빼는지, 숙달된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16560250571278.jpg“있는 사람이 더한다더니 정말 그렇네요.”

16560250541784.jpg“그러게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다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평소에는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더니 오늘은 한 모금씩 마신다. 갤러리에서 많이 힘든가?

16560250541784.jpg“이제 곧 있으면 일 시작한 지 한 달째지?”

16560250571278.jpg“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16560250541784.jpg“일하는 건 어때?”

다영이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16560250571278.jpg“쉽지 않네요. 잡일하는 건 강정휘 갤러리랑 마찬가지인데, 여긴 사람이 없다 보니 바로 실무에 투입돼요.”

16560250541784.jpg“아무래도 그렇겠네.”

16560250571278.jpg“요새 하도 욕먹어서 배가 불러요. 작가한테 욕먹고, 손님한테 욕먹고, 갤러리에서 욕먹고. 욕이 풍년이에요.”

16560250541784.jpg“처음인데 잘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다영이 푹 한숨을 쉬었다.

16560250571278.jpg“저도 잘하고 싶은데 따라 주지 않아요. 아직 잘 걷지도 못하는데 뛰어야 하는 것 같아 버겁네요. 좋게 말하면 일을 빨리 배울 수 있는 건데, 당장 적응하기가 어려워요.”

16560250541784.jpg“좀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느낌을 공무원 시험 준비할 때 느꼈던 것 같아.”

다영이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16560250571278.jpg“시험 공포증 때문에요?”

16560250541784.jpg“그것도 그렇지만, 고등학교 때 같이 다녔던 애들은 좋은 대학 가서 바로 좋은 직장에 취직했거든.”

다들 한참 앞서가서 더 이상 등조차 보이지 않는데, 더 뒤처지긴 싫어서 아등바등 뛰었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16560250541784.jpg“한 걸음 내딛을 힘도 남아 있지 않은데도, 멈추면 실패자가 될 것 같아서 억지로 갔어. 그러다 어느 순간 주저앉아 버렸어.”

16560250571278.jpg“저도 그러면 어떻게 해요?”

16560250541784.jpg“못 견디겠을 때 전화해. 맥주 마시면서 이야기 들어줄게.”

그제야 다영이 빙그레 웃었다.

16560250571278.jpg“전화 피하면 알아서 해요.”

16560250541784.jpg“안 피해. 근데, 다영아.”

16560250571278.jpg“네?”

16560250541784.jpg“이런 말 좀 그렇지만, 소고기는 언제 사 줄 거니?”

흐뭇한 감정이 와장창 깨진 다영이 샐쭉하게 나를 봤다.

16560250571278.jpg“아직 월급이 안 들어왔다구요! 오빠는 돈도 나보다 훨씬 많이 버는 사람이 소고기에 연연해야겠어요? 국밥이면 된다고 했던 그 초심을 떠올려 봐요. 요새 재벌들하고 어울리더니 사람이 너무 기름져졌어!”

16560250541784.jpg“내가 사 달라고 그랬냐? 네가 사 준다고 했잖아.”

다영이 새침하게 말했다.

16560250571278.jpg“어쨌든요.”

16560250541784.jpg“뭐가 어쨌든이냐?”

16560250571278.jpg“너무해요.”

한마디를 안 지는 다영을 보니 아직 힘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안도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소고기를 안 얻어먹겠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건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 이를 악문 강정휘가 테이블에 놓인 달항아리 가품을 응시했다. 김 비서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대표실에서 나가면 숨이라도 편히 쉴 것 같은데 강정휘는 나가 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가도 되냐는 말을 꺼내는 것은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지감을 구덩이로 밀어 넣고 손을 내밀 생각이었는데 본인이 당했다. 이수지가 고소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눈에는 경멸감이 가득했다. 다시 이수지가 갤러리에 발걸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 남아 있지도 않은 재벌가 연 하나를 잃었다. 또한 원래 어젯밤 나까마에게 물건을 넘기고 25억을 받기로 했던 것이, 이수지가 달항아리 진품을 가져가면서 무산됐다. 그녀 입장에서는 25억이 날아간 것이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강정휘가 책상 뒤편에 있는 골프채를 들었다. 저벅저벅 테이블로 걸어가 사정없이 달항아리를 갈겼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달항아리가 산산이 부서졌다. 한때는 재현품이었지만 강정휘와 나까마로 인해 가품이 되어버린 불쌍한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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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250657513.jpg“하아…… 하아…….”

강정휘가 거친 숨을 뱉었다. 김 비서는 마른 침을 삼킬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16560250657513.jpg“지방대나 나온 거지같은 놈이 나를 엿먹여?”

한지감을 엿먹이려다가 되레 당했다. 본인이 자초한 상황이건만 당했다고만 생각했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김 비서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16560250657521.jpg“하…… 한지감 그 자식을 잡아 족치겠습니다!”

16560250657513.jpg“족쳐? 그럼 이 상황이 해결될 것 같아? 그 자식이 가만히 있겠어? 우리 평판만 바닥을 칠 거야!”

16560250657521.jpg“죄……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김 비서가 죄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겨우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16560250657513.jpg“서인범 다시 찾아내.”

16560250657521.jpg“찾아서…… 어떻게 할까요?”

16560250657513.jpg“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경을 벗기는 방법을 알아내!”

  * 나는 차를 마시는 황덕현을 힐끗 보았다. 어제 대뜸 전화를 해서 부탁할 것이 있으니 집에서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개인적인 일이라고 말할 뿐,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옥션에 필요한 작품이 있는데 소유자가 위탁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부른 건가? 그건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옥션 직원들이 있는데 뭣하러 나를 부르겠는가. 그럼 개인적으로 필요한 유물이 있는 건가? 설마 팔아야 할 작품? 옥션 대표가 돼서 자기 옥션이 아닌 다른 곳에 파는 것이 민망해서 조용히 진행하려고 날 부른 건가? 실마리라도 잡아 보려고 요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황덕현의 얼굴을 살폈지만 느긋한 표정만이 보였다. 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16560250686597.jpg“첫 감정 어땠어요?”

16560250541784.jpg“여러 작품을 봐야 해서 어려웠습니다.”

16560250686597.jpg“고미술 감정 위원 중, 가장 막힘이 없었다고 정연주 사원이 말하던데요?”

16560250541784.jpg“좋게 봐주신 거죠.”

싱긋 황덕현이 웃었다.

16560250686597.jpg“곧 프리뷰 하는데, 올 거죠?”

16560250541784.jpg“당연히 봐야죠. 제가 감정한 유물들이 어떻게 전시될지 궁금해요. 다른 유물들도요.”

16560250686597.jpg“고미술만 볼 생각인가 봐요? 현대미술은 관심 없어요?”

건민대 졸업전시회에서 봤던 난해한 작품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16560250541784.jpg“현대미술은 어렵더라구요. 고미술은 그림 속에서 의미를 찾기 어려워도 화제로 의도를 짐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현대미술은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16560250686597.jpg“하하! 그렇죠. 심지어 제목도 무제인 경우가 많으니.”

정말 그랬다.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려놓고 무제라고 해서 더 미궁으로 빠졌다.

16560250541784.jpg“왜 무제라고 짓는 거예요? 그림으로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으면 제목으로 유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지 않나요?”

16560250686597.jpg“만나 본 작가들의 말로는, 자신의 작품 그대로를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짓는다고 하더군요.”

16560250541784.jpg“작품을 한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의미인가요?”

16560250686597.jpg“비슷하죠.”

고미술과 너무 다르다.

16560250541784.jpg“어렵네요. 고미술이 훨씬 명확한 것 같아요.”

16560250686597.jpg“가끔 시간 있을 때 현대 미술 전시회 가 보세요.”

16560250541784.jpg“봐도 그림의 의미를 전혀 모를 것 같아요.”

실제로 건민대 졸업전시회에서 나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16560250686597.jpg“무언가를 알 때만 예술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알지 못해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16560250541784.jpg“그렇네요.”

멋있는 대답이었지만 현대 미술과 마음의 거리를 좁히긴 부족했다.

16560250686597.jpg“오늘 집으로 불러서 놀랐죠? 개인적인 부탁이기도 하고, 또 사무실로 부르면 괜한 말이 나올 것 같아서요.”

옥션 최고 경영자와 감정위원이 사무실에서 단둘이 만난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그림이었다.

16560250541784.jpg“네. 괜찮습니다.”

16560250686597.jpg“제 부탁은 그림을 받아와 달라는 거예요.”

16560250541784.jpg“사고 싶은 그림이 있으신 겁니까?”

황덕현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16560250686597.jpg“아니요. 이미 구매한 그림이에요. 지감 씨는 그냥 가서 그림만 받아오면 돼요.”

그냥 그림만 받아오면 되는데 왜 날 불렀을까? 의아해하는 내 얼굴을 보고 황덕현이 말을 이어갔다.

16560250686597.jpg“김세안 화가님 들어보셨죠?”

한국화 서양화 할 것 없이 근현대 화가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김세안 화가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수묵으로 추상화를 그려 한국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분이었다.

16560250541784.jpg“수묵 추상화로 유명하신 분 아닌가요?”

16560250686597.jpg“맞아요. 한국화 화가 최초로 국제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하셨죠. 옥션에서 거래 되는 몇 안 되는 생존 한국화 화가이기도 하구요.”

비엔날레는 2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 또는 미술전시를 뜻하는 말로, 미술계에서는 올림픽으로 비유되곤 한다고 들었다. 비엔날레에서 상을 수상하는 것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화 화가 중에 해외 비엔날레에서 수상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김세안 화가이다.

16560250541784.jpg“그림을 받아 오는 것이라면 전문 업체한테 맡기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16560250686597.jpg“성격이 특이하셔서 어림도 없어요. 원래 제가 직접 가야 하는데, 요새 일이 너무 많아서요. 보수는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성격이 특이해서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황덕현의 부탁이라 수락했다. 나름 처음 믿어준 사람 아닌가.

16560250541784.jpg“잘 가져오겠습니다. 추상화인가요?”

16560250686597.jpg“아니요. 산수화예요.”

권미애 집에서 불꽃 튀는 식사를 하고 부산까지 가서 ‘퇴우이선생진적첩’을 대여한 나였다. 그림 받아오는 것쯤이야. 김세안 작가를 만나러 간 날, 이것이 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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