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김세안 화가2021.02.08.
나는 큰 그림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큰 차를 끌고 양평으로 향했다. 안개가 낀 호수는 그윽한 운치를 만들어냈다. 호수 끝자락에 있는 집 앞에 차를 멈췄다. 현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세 번 정도 눌렀지만 아무 기척이 없었다.
“집을 비우신 건가?”
황덕현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섯 번의 통화 연결음이 반복되어도 전화를 받지 않아 끊으려고 할 때였다. 달칵,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황덕현 대표님이 보내신 한지감이라고 합니다. 지금 집 앞에 도착했는데 안 계시나요?”
[있어. 현관 번호키 누르고 들어와. 1111이야.]
“네……?”
뚝 전화가 끊겼다. 내 반문을 못 들었는지 무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황당함을 뒤로하고 현관문 앞에 섰다. ‘1’에 손을 데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주인의 허락했다지만 남의 집 번호키를 누른다는 것이 찜찜했다. 찜찜함을 겨우 누르고 ‘1111’를 눌렀다. 현관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거실로 이어졌다. 거실을 보고 나는 흠칫 놀랐다. 거실 바닥에 김세안이 대자로 누워 있었다. 그것도 초점 없는 눈동자를 하고 말이다. 방금 전에 통화하지 않았더라면 죽었다고 생각했을 그런 모습이었다. 그제야 직감적으로 이 일이 쉬울 거라 여겼던 것이 큰 착각이란 것을 깨달았다. 조심스레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쉿!”
김세안이 검지를 입에 갖다 댔다.
“…….”
내가 조용히 있자 그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누우라는 것 같아 엉겁결에 옆에 누웠다. 아무 제스처도 취하지 않은 것을 보니 내 해석이 맞는 모양이었다. 일분일초가 더디게 흘렀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 누워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딘 걸까. 그 질문을 천 번 넘게 했을 때쯤 그가 일어났다.
“따라오게.”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10평쯤 되는 탁 트인 공간에 그림이 가득 차 있었다. 짙은 묵향이 진동했다. 김세안이 세로 110cm, 가로 90cm 정도 되는 그림 앞에 걸음을 멈췄다. 묵으로 동그라미가 불규칙하게 그려져 있는 추상화였다. 분명 황덕현은 추상화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김세안은 추상화를 보여주는 거지? 김세안이 지그시 그림을 보다 물었다.
“그림에서 뭐가 느껴지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동그라미가 보였다.
“제가 추상화를 잘 몰라서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김세안이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압박했다.
“느껴지는 것을 말하게. 그래야만 황 대표의 그림을 줄 것이네.”
아니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느끼는 걸 말하라는 거야! 목구멍까지 이 말이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어서 삼켰다. 당장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황덕현의 말 한마디가 나를 붙잡았다.
-부탁드릴게요.
“혼자 그림을 보면서 느끼고 싶습니다. 잠시 시간을 주세요.”
“알았네. 5분 주지.”
김세안이 나가고 나는 그림과 마주했다. 동그라미의 크기는 다 제각각이었다. 지름이 20cm 정도 되는 것부터 5cm 정도 되는 것까지 정말 다양한 크기들이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들은 때로는 맞닿아 있었고, 때로는 겹쳐져 있었다. 맞닿지도 겹쳐지지도 않은 동그라미들도 있었다.
“그냥 애들이 묵으로 동그라미 연습한 것 같은 느낌인데…….”
도대체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한참 들여다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그림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데 김세안이 돌아왔다.
“이제 말해 보게.”
“그…… 그게…….”
전 아직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구요! 그러다 문득 예전에 기사에서 읽었던 말이 떠올랐다. 예술의 주제는 모두 인생이라고 했던 말.
“이…… 인생이 느껴집니다.”
“어떤 인생 말인가?”
김세안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그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기에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맞닿지도 겹쳐지지도 않은 동그라미가 보였다. 동떨어진 느낌이 꼭 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섬과 사람……! 다른 사람과 전혀 교류하지 않는 사람을 섬으로 비유하지 않는가. 맞닿고 겹치지 않은 동그라미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보입니다. 전혀 교류하지 않는 섬 같은 사람, 맞닿아 있지만 자신의 인생이 더 중요한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보입니다.”
말은 마친 나는 김세안의 얼굴을 살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제 해석이 맞습니까?”
“그림에 정답은 없네. 사람에게 닿은 그림과 닿지 못한 그림이 있을 뿐.”
일리 있는 말이다.
“이제 그림 주시는 겁니까?”
“줄 테니 밥 먹고 가게.”
작업실에서 나와서 나는 문득 궁금했다.
“보여주신 그림의 제목이 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무제이네.”
작가들은 참 무제를 좋아한다. 밥을 먹고 나서야 나는 그림을 싣고 서울로 향했다. 정작 가져오는 그림은 이미 포장이 된 상태여서 보지도 못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실제로 김세안의 집에 머물렀던 시간은 두 시간 안팎인데 너무 피곤했다. 모르는 이의 집에 눕고, 추상화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등 전에 해본 적 없는 경험을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도 피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동그라미 그림의 의미를 추론하면서 조금은 추상화가 가깝게 느껴졌다. 현대 미술도 어쩌면 생각만큼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비서가 황덕현의 앞에 따듯한 차를 올려놓았다.
“고마워. 이 비서.”
이 말을 하면 돌아서 나가야 하는데 이 비서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 말 있어?”
“얼마 전에 집으로 한지감을 부르셨습니까?”
“응.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사모님께 들었습니다.”
황덕현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부르신 겁니까?”
“개인적인 일로.”
“어떤 개인적인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비서가 몰라도 되는 일이야.”
“비서인 제가 몰라도 되는 일을, 한지감 씨가 아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 비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한지감 ‘씨’가 아니라 ‘감정위원’이겠지.”
“네.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이제 한지감 ‘감정위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주시하시는 겁니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김도균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비서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어쩐지 심각해 보이는 김도균이 이 비서를 보고 말했다.
“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요?”
황덕현의 허락을 받고 이 비서는 사무실에서 나갔다.
“형. 아버지에게 한지감을 보냈어?”
“응.”
김세안은 김도균의 아버지였다.
“왜?”
“그림 받아올 사람이 필요해서. 작가님 그림을 샀거든.”
“형이 직접 가든가 하지, 왜 하필 한지감을 보내? 한지감, 우리 감정위원이야. 개인적으로 형 부탁 들어줬다는 말 퍼지면, 이상한 소문들 따라붙는다고. 몰라?”
자칫 대표가 감정위원에게 청탁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심각한 김도균과 달리 황덕현은 평온했다.
“그래서 화가님께 보낸 거잖아. 말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형.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원하는 대로 감정위원으로 들였으면 된 것 아니야? 무슨 또 다른 생각 있어?”
“글쎄.”
김도균은 기막혀했다.
“나 형에게서 ‘글쎄’라는 말 들을 때마다 살 떨리는 것 알아? 그게 꼭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 같다고.”
“그럼 나중에 밝혀지겠지. 그냥 좀 지켜봐. 공개채용이나 신경 쓰고.”
“그건 1년 후잖아.”
“1년 금방 간다. 앞으로 조심할 테니 그만 가 봐.”
김도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나갔다. 더 있어 봐야 황덕현의 입에서 아무 말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표실에 홀로 남은 황덕현이 김세안에게 전화 걸었다.
“선생님, 제가 직접 갔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은 친구를 보냈더군. 골동상이라고?]
“네. 맞습니다.”
[아쉽구만.]
“뭐가 말입니까?”
순간 황덕현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무섭게 집중했다. 기다렸던 말을 듣기 직전의 사람처럼 말이다.
[추상화를 보는 눈이 있어. 조금만 더 그림을 접한다면 좋은 갤러리스트가 될 재목이야.]
씨익, 황덕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습니까?”
곧 찾아뵙겠다는 말을 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갤러리스트가 아닌 스페셜리스트는 어떻습니까?”
옥션 스페셜리스트, 경매에 관련된 일을 전문가를 뜻한다. 그것이 지금 아직도 황덕현이 한지감을 주시하는 이유였다.
*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실에 들어선 나는 밝게 인사했다. 도강 그룹 강석병 회장이 일어나 나를 반겼다.
“어서 와요. 여기 앉아요.”
“네.”
“이번에는 급하게 안 불렀어요.”
장난스러운 강 회장의 말투에 나는 껄껄거리면서 웃었다.
“하하하!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안 좋은 일 있었다고 들었어요.”
강정휘가 달항아리를 바꿔치기한 일을 말하는 것을 나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강 회장의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심각하게 반응하지도 못했다.
“네. 좀 황당한 일이 있었죠.”
“마음이 넓네요. 경력을 망쳐버릴 수 있는 일인데 ‘황당한 일’ 정도로 표현을 하고.”
전반적인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벌들의 정보력은 이미 몇 차례 경험했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강정휘 갤러리 직원 중 한 사람만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다고 해도 강석병의 귀에 들어갔을 터였다. 그런데 과연 한 사람만 이야기했을까?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로 마음 넓지 못합니다. 그저 별일 아닌 것처럼 넘기고 싶습니다.”
“안 좋은 일을 그렇게 넘기는 건 이 늙은이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한지감 씨가 나보다 낫네요.”
“과찬이십니다. 오늘 어떤 일로 뵙자고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미리 연락을 준 것은 맞지만 어떤 일인지 설명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강석병이 비서실장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입을 열었다.
“고려 아미타불화를 구매하려고 합니다.”
“어떤 아미타불화를 말씀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부처로 고려시대에 특히 부흥했다.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한 번쯤 들어보았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아미타불에 돌아가 의지하겠다는 의미로, 죽고 난 이후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말이다. 주로 아미타불도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또는 지장보살)로 구성된 삼존도 형식이나 8대보살과 함께 있는 구존도 형식이 많이 알려져 있다. 설명을 원하는 나에게 비서실장은 핸드폰을 가리켰다.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드렸습니다.”
진작에 말하지. 속으로 꿍얼거리며 나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확인했다.
“이건…… 독존도네요.”
나는 눈빛을 반짝였다. 흔치 않은 형식이었다. 이런 형식을 취한 고려시대 아미타불화는 3점 정도 되는데, 모두 일본에 있었다. 강석병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맞아요. 흔치 않은 그림이죠?”
“네. 한국에 있는 그림인가요?”
“그래요.”
나는 핸드폰으로 들어갈 것처럼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림 속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아미타불이 정좌하고 설법하는 모습이었다.
“몇 세기 그림인 것 같아요?”
말하는 강석병을 보지도 않은 채로 나는 그림에 집중했다. 예의가 없어 보일지라도 불화가 언제 그려진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몸은 풍만했지만 힘이 떨어져 보였고, 얼굴은 둥글고 근엄한 느낌이었다. 또한 색감도 붉은색 녹색 청색이 계열이 어두워 전반적으로 화면이 무거운 느낌을 준다.
“14세기입니다.”
고개를 드니 강석병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가 있었다.
“도자기하고 서화 쪽을 주로 거래하는 것 같아서 불화는 보는 눈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아버지 덕에 어렸을 때부터 많이 봐온 덕입니다.”
골동상이라고 해서 모든 부분을 다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전공에 따라 의사의 진료 영역이 나뉘어 있듯이 골동상도 마찬가지였다. 도자기 위주로 거래하는 골동상도 있고, 고서 위주로 거래하는 골동상도 있었다. 아버지는 주로 조선시대 서화와 도자기 중심으로 가게를 꾸려 오셨다. 그렇지만 워낙 골동품 자체를 좋아하셨고 내가 이 일을 물려받기 바라셨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 박물관이나 다른 골동가게, 절 등등 여러 곳으로 나를 끌고 다니시면서 유물들을 보여주셨다. 물론 골동에 관심이 없던 나는 고등학교 들어가자마자 공부를 핑계로 이와 같은 시간을 거부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불화를 볼 줄 아는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조기 교육(?)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참 아들을 잘 키우셨네요.”
나는 멋쩍어서 웃음으로 무마했다.
“어디 가면 소유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웬만하면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비서실장을 보고 물었다.
“서울에 있습니다.”
서울이라면 어디든 두 시간을 넘어가지 않는다.
“소유자 연락처를 주시면 만나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비서실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림을 가져오셔야 합니다.”
왜 또 반드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