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미타불화 (1)2021.02.10.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림을 가져오셔야 합니다.”
왜 또 반드시야? 재벌들은 성격이 극단적인 걸까, 아님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나를 부르는 걸까? 우선 강석병과 비서실장의 얼굴을 살폈다. 굳어진 표정을 보니, 단지 소유하고 싶어서는 아닌 것 같았다.
“반드시 그 그림을 가져와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비서실장이 대답했다.
“귀중한 분께 드릴 선물입니다. 다음 주까지 그 물건이 필요합니다. 가격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그림을 가져와 주십시오. 그림 가격의 30%를 인센티브로 드리겠습니다.”
“매력적인 조건이네요.”
재벌들은 절대 돈을 그냥 주지 않는다. 인센티브가 높다는 건 그만큼 녹록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이수지가 제시했던 인센티브도 30%다. 이거 왠지 쎄하다. 제일 쎄한 부분은, 이수지는 가격 제한을 두었지만 강석병은 가격 제한조차 두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풍부한 자원을 약속했는데 좋은 것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많은 자원을 준비했는데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핑계 댈 것이 없게 된다. 이번 의뢰에 실패하면 강석병과의 신뢰관계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이 업계는 좁고 비밀이 없다. 따라서 이번 일을 실패한다면 전반적인 업계 평판도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인센티브 30%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내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통장에는 이미 15억이 넘는 돈이 있다. 재벌들 입장에서 볼 때는 별것 아닌 금액이겠지만 나한테는 충분한 돈이다. 또한, 판돈이 큰 도박판은 그만큼 위험한 법이다. 그러니 돈만을 생각한다면 이쯤 꼬리를 내리고 거절하는 것이 맞았다.
“그럼 수락하시겠습니까?”
확답을 하지 않는 것에 조바심이 났는지 비서실장이 재촉하듯 물었다.
“수락하겠습니다.”
담담히 답하는 나를 강석병은 흥미롭다는 듯 보았다.
“기대할게요. 한지감 씨.”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건 진짜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내가 이 일을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는,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고려시대 독존 아미타불화를 실제로 보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욕망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을 부정할지언정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 다음 날, 나는 아미타불화를 보기 위해 소장자를 만나러 갔다. 소장자는 나와 같은 골동상이었다. 당연히 만나는 장소는 소장자의 가게였다. 가게는 우리 가게와 비슷한 정도로 깔끔했고 가품도 많지 않았다. 진품을 볼 줄 아는 감식안이 있다. 좀 의외인 것은, 물건들의 최고가격이 거의 오백만 원 이하라는 것이다. 큰손님이 와서 물건을 쓸어갔나? 아니면 비싼 물건은 창고 안에 넣어두는 것일까? 잡다한 생각을 뒤로 하고 나는 소장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한지감입니다.”
“장문식입니다. 반갑습니다!”
장문식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악수했다. 그는 50대 후반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강 회장님 쪽에서 사람을 보낸다고 해서 당연히 나이가 있으신 분이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젊은 분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업계 선배이신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이번 일 끝나면 놓도록 하죠.”
어리다고 막 말을 놓지는 않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
“네. 그 전에라도 마음이 바뀌시면 말씀해 주세요.”
장문식은 미소로 답하고 창밖을 보며 서성였다. 물건은 안 보여주고 뭐하는 거지?
“누구 기다리는 분이라도 있으세요?
“아. 제가 말씀을 안 드렸나요? 현성 그룹 이 상무님께서도 사람을 보낸다고 해서, 함께 보여드리려구요.”
“아…….”
현성 그룹 이 상무라면 이수지의 오빠다. 경쟁자와 함께 그림을 보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보통 이렇게 파는 입장에서 사겠다는 사람을 동시에 부르는 경우는 없었다.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인지 의아해하는데, 문이 열리면서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장문식이 남자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현성 그룹 이 상무님이 보낸 김용식입니다.”
“반갑습니다.”
김용식의 눈이 희번덕거려 살짝 소름끼쳤다. 풍기는 느낌으로 봐서 골동 쪽 일을 오래 한 사람 같았다. 장문식과 인사를 나눈 그의 시선은 곧바로 나를 향했다.
“도강 그룹 강 회장님이 보내셨다구요?”
뭐야. 김용식은 내 존재를 알고 있다. 이거 내가 불리한 판이잖아. 속으로는 혼란스러웠지만 겉으로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을 몰랐다는 사실을 노출하는 건 상대에게 우위를 선점하도록 허락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 이 상무님이 보내셨다구요?”
“막내 아가씨 일도 하시는 걸로 들었습니다.”
“네.”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참 다양한 의뢰인이 있네요.”
언뜻 들으면 칭찬이었지만, 번들거리는 눈빛이 빈정댄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자신은 현성 그룹 이 상무 밑에서 충성스럽게(?) 일하는데 나는 여기저기 일을 하는 것이 마치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지기 싫은 마음에 여유로운 척 말했다.
“그러게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러 곳에서 저를 찾으시네요.”
여러 곳에서 찾을 수밖에. 오래 일한 너에게는 없는 능력이 나한테는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어? 말을 알아들은 김용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 상태로 나에게 돌진하려는 것을 장문식이 끼어들었다.
“인사는 이쯤하시고, 물건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장문식은 가게 뒤편으로 우리를 데려가더니, 창고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김용식가 내 어깨를 툭 치고 먼저 창고로 들어갔다. 그래, 먼저 들어가라. 선착순으로 아미타불화를 가져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 벽 정중앙 액자에 걸려 있는 아미타 불화가 보였다. 그림은 가로 60cm, 세로 100cm 정도 되는 크기였다. [ 4,500,000,000원 | 진 | 6,000,000,000원 | 1330년대 ] 최고가가 60억이나 되는 유물이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아미타불이 정좌하고 설법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깊이감은 전혀 달랐다. 이목구비가 흐릿해져 있는데도 아미타불은 흔들림 없는 눈빛을 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 살아있는 아미타불 앞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 느낌은 오래가지 못했다. 김용식이 확대경을 들고 설쳐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나는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진작이네요. 구매하고 싶습니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밝은 장문식의 반응을 보고 조급해진 김용식이 헐레벌떡 합류했다.
“좋은 작품이네요. 감정을 하다 그만 그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림에 빠지긴, 감정도 겨우 끝냈구만. 장문식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이해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 한참 빠져서 봤습니다.”
나는 장문식의 얼굴을 살폈다. 나도 김용식도 유물에 관심을 보이는 이 상황을 매우 흡족해하고 있다. 제 소유의 유물이 관심받는다는 사실이 순수하게 좋은 것이 아니라, 이 관심이 돈으로 이어지기에 좋은 것이다. 그러니 장문식이 나와 김용식을 나란히 불러들인 이유는 단 하나, 경쟁을 붙이기 위해서다. 예전에 이수지 때문에 경매를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매에서는 경합을 벌여 추정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낙찰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이 참여해 경합을 벌이는 장면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단 두 명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장문식은 지금 나와 김용식을 놓고 경합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중이었다. 훨씬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서. 아까는 서글서글하게 보였던 장문식의 얼굴이 지금은 징글징글하게 보였다. 장문식을 보면서 김용식이 입을 열었다.
“얼마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듣던 중 반가운 질문이었다. 장문식은 은근슬쩍 몸을 빼면서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림은 하나이고 사려는 분들은 두 분이니, 어느 정도 가격을 생각하는지 말씀하셔야 제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용식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십억.”
처음부터 오십억이라고 세게 나간다. 하지만 이쪽 자본도 충분하겠다,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오십일억.”
김용식이 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오십삼억.”
이렇게 나오시겠다?
“오십육억.”
“오십구억!”
내가 다시 가격을 부르려는데 장문식이 끼어들었다.
“자자! 진정하세요. 너무 과열되었습니다.”
자기가 과열시켜 놓고 너무 과열되었다고 진정시키는 건 뭘까? 보면 볼수록 능구렁이 같은 면이 있었다. 장문식이 뱀 같은 눈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내일 저녁 6시까지 얼마를 생각하는지 가격을 말씀해주시면 결정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 6시도 아니고 내일 저녁 6시. 아주 고단수다. 고민할 시간을 더 주면 상대가 자신보다 높은 가격을 불렀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 높은 가격을 부르게 된다. 이거 완전 입찰인데? 장문식 이 사람의 목적은 오직 돈 하나다. 그래, 풍부한 자원이 있으니 두려울 것은 없다. 김용식보다 높은 가격만 쓰면 된다. * 강석병은 직접 백자 필통을 솔로 털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비서실장이 강석병을 말렸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냥 두십시오.”
“됐어.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이 물건이 마음에 들어서 사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강석병이 픽 웃었다.
“마음에 들어서 샀는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해. 내 손에 들어왔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이번 일, 정말 한지감 외엔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을 작정이십니까?”
“사람을 쓰기 전까지는 의심하더라도, 사람을 쓰면 믿어야 해. 내 스타일 잘 알잖아.”
비서실장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잘 아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번 일은 그룹과 관련된 거잖습니까.”
“그렇지.”
거리낌 없이 대답하는 강석병의 모습은 얼마나 큰일인지 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차기 대선주자에게 보낼 선물입니다.”
선물이라 쓰고 뇌물이라 읽는다. 미술품은 흔적이 남지 않아서 뇌물로 제격이었다. 차기 대선주자는 고미술, 그중에서도 고려불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이 50억대 아미타불화를 어떡해서든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였다. 대선주자의 취향에 맞으면서도 고가인 선물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한지감에게 맡겼다. 강석병이 생각하는 바가 있겠지만, 비서실장 입장에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아미타불화가 현성 그룹의 손에 들어간다면…….”
“현성 그룹이 특권이란 특권은 다 가져가겠지. 내가 겪은 대통령이 몇 명인데 그걸 모르겠어? ……자네도 이제 늙었어. 어떻게 나보다 더 걱정이 많아?”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강석병은 자신만만했다.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6.25 때보다 더 하겠어? 총알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았고 도강을 일으켰던 나야. 현성 그룹이 줄 먼저 선다고 해도 안 죽는다 이 말이야.”
“회장님…….”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지감 그 녀석이 나한테 그 아미타불화를 꼭 가져올 것 같아.”
강석병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비서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강석병이 저런 눈빛을 낼 때는 항상 그가 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비서실장이 신뢰하는 것은 한지감이 아니라 강석병이었다.
* 장문식은 아미타불화 앞에 서서 김용식과 통화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뒤집힌 눈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공손했다.
“저야 웬만하면 현성 그룹으로 그림을 보내고 싶죠.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역시 보시는 눈이 있으십니다.]
“가격만 맞으면 좋을 텐데요.”
[칠십억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문식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거 어쩌나? 도강 그룹에서는 칠십오억 이상을 생각하는 눈치던데요.”
[다시 상의하고 내일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넉넉하게 쳐드릴 테니 꼭 저희 쪽에 파셔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화를 끊자마자 장문식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 많이 주는 사람한테 파는 것이 당연하지.”
돈만 많이 준다면 누가 사가도 상관없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누구 손에 들어가든 무슨 상관이야.”
사실 이 아미타 불화는 그의 소유가 아니다. 진짜 소장자는 지금 외국에 있었고, 그는 지금 물건을 잠시 맡아놓은 상태였다. 실소유주는 이 물건이 팔린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지만 당장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마 그는 물건이 팔리고 한참 지난 이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법정 분쟁이 나겠지만 장문식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돈만 내 손에 들어오면 그림을 넘기고 나는 여길 뜨면 그만이야.”
장문식이 씨익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아미타불과 눈을 맞췄다. 욕망에 희번덕거리는 장문식의 눈빛은 모든 것을 초월한 아미타불의 눈빛과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