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아미타불화 (2)2021.02.13.
다음날 오전, 나는 일찍 장문식의 가게로 찾아갔다. 갑작스런 방문에 그는 놀란 것 같았다.
“미리 전화라도 주시지…….”
“죄송합니다. 그림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요. 보여주실 수 있으신가요?”
“그럼요.”
장문식은 다시 창고를 열고 그림을 보여주었다. 이번엔 그림을 가리는 김용식이 없어 편하게 그림을 볼 수가 있었다. 한참 그림을 보고 나는 창고를 둘러봤다. 꽉꽉 차 있는 우리 가게 창고와 달리, 이곳은 도자기 몇 개와 그림 몇 개를 제외하고는 물건이 없었다.
“창고에도 물건이 별로 없으시네요?”
“그림 대금이 들어오는 대로 여기 정리하고 좋은 곳으로 이사하려고 물건 대부분을 처분했어요.”
이사 생각만 해도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이사 가서 잘되셨으면 좋겠네요.”
“그래야죠.”
장문식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가격은 결정하셨습니까?”
“네. 결정했습니다.”
들어오기 전부터 가격을 결정했지만 이곳에 오니 그 가격에 확신이 들었다. 장문식은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생각한 가격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육십억입니다.”
“유…… 육십억이요?”
생각했던 금액보다 많이 낮아 놀란 모양이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장문식에게 나는 확인시켜 주었다.
“네. 육십억 맞습니다.”
장문식이 마른 침을 삼키며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이런 말씀 좀 그렇지만, 현성 그룹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불렀습니다.”
“그럼, 육십억으로는 어렵다는 말씀이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차분히 응대했다.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상의하고 결정하겠습니다.”
“네. 저는 솔직히 가격만 맞으면 도강 그룹 강 회장님이 가져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워낙 현성 그룹에서 높은 가격을 불러서……. 지금보다 최소 이십억은 더 챙겨주셔야 합니다.”
도강 그룹을 생각해주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 본 목적은 경합을 붙여 높은 가격을 뜯어내려는 것이다. 그 마음이 빤히 보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가게에서 나온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바로 강석병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지감입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아미타불화의 실소유자가 장문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최근 장문식 계좌로 사십오억 정도 보낸 사람을 찾아주세요. 그 사람이 실소유자입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불안한 마음에 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어제 저 가게에서 나왔을 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성 그룹에서도 이 아미타불화가 꼭 필요한 모양이었다. 어제 김용식은 오십구억을 불렀다. 그런데 최종 구매액이 그보다 일억 높은 육십억에서 그칠 수 있을까? 하지만 안경이 보여준 이 불화의 최고 가격은 육십억이다. 그보다 높은 금액으로 거래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최소 육십오억을 지불할 생각을 했다. 어떡해서든 현성 그룹에 이 불화를 빼앗기면 안 되니 말이다. 나도 육십오억을 생각했으니 최고가는 육십억이 아니라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경이 틀린 것일까?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문이 시작되었다. 골동상에서 십억 이상의 물건을 사들이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 아미타불화의 구매 가격은 사십오억이다. 이 정도 액수면 대다수의 골동상들은 중개를 택한다. 물론 사채업자에게 아미타불화를 저당잡히는 조건으로 급전을 당길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또한 아무리 이사를 간다고 하지만 최고가가 천만 원 이상인 물건이 하나도 없는 것도 이상했다. 매장은 그렇다고 쳐도, 창고에도 값나가는 물건은 아미타불화뿐이었다. 꼭 그거 하나 팔아치우고 떠날 사람처럼 보였다. 바로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의문점을 공유하는 것이 나을까? 그런데 만약 혹시라도 내 생각이 틀리다면? 밤새 집 안을 서성이면서 고민한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오전에 가서 다시 한번 아미타불화를 확인하기로. 그러고도 여전히 안경이 보여주는 최고가가 육십억이고, 장문식이 육십억에 만족하는 모습이 아니라면, 아미타불화의 실소유자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서, 물건이 옮겨지기 전 아미타불화의 실소유자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그림을 손에 넣을 수 있다.
* 창 너머 가게 안을 정리하는 장문식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벽에 적당히 몸을 숨긴 채 계속 그를 주시했다. 벌써 여섯 시간째 이 카페에 앉아있었다. 내 앞에는 긴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얼음이 완전히 녹아버린 아이스커피가 있었다. 목이 말랐지만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행여나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상황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잠복하는 형사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도강 그룹의 엄청난 정보력으로 실소유자를 알아냈다. 미국 워싱턴에 거주하는 전종학이었다. 하지만 실소유자를 알아낸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와 연락이 닿아야 한다.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강 회장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빛의 속도로 전화를 받았다.
“연락되셨습니까?”
[아직입니다. 미국 지사에 있는 직원이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고 있습니다.]
하긴, 지금 미국은 새벽이었다. 누가 새벽에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겠는가.
“알겠습니다. 저는 계속 여기서 지켜보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최후의 수단은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었지만, 실소유자가 미국에 있는 상황에서 협조가 잘 될지 의문이었다. 또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서실장이 경찰의 개입을 꺼렸다. 그 말인즉슨, 공권력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저 그림을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실소유자랑 연락이 닿아야 하는데…….”
6시까지는 3시간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 초가 흐를 때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 장문식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벌써 저녁 6시가 지났지만 한지감은 아직도 가격을 보내오지 않았다.
“그냥 현성 그룹으로 가. 아니면 한 번 더 찔러 봐?”
장문식은 늘 그렇듯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한지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지감 씨. 아직 가격이 오지 않아서 연락드렸습니다.”
[저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 없을까요? 도강 그룹에서 최대 금액을 칠십억까지 해주실 수 있다고 해서요. 설득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욕망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목소리는 공손한 톤을 유지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사정상 기다려 드릴 수가 없네요.”
[7시까지만 기다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장문식의 눈알이 돌아갔다. 기다리는 것이 이익이 될지 셈을 하는 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적어도 팔십오억은 주셔야 강 회장님께 이 귀한 불화를 안겨드릴 수 있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를 마치고 그는 소파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7시가 넘어갔지만 한지감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장문식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어쩐지 한지감에게 농락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한지감 이 자식, 오늘 아침에 육십억을 불렀을 때부터 쎄하더니……. 뭐하는 자식이야?”
그는 육십억이 푼돈인 양 굴었다. 처음에는 한지감을 봤을 때만 해도 어리고 사근사근해서 입맛에 맞게 굴리기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하는 꼴을 보니 만만치 않았다. 오늘 오전에 갑자기 들이닥친 것만 해도 영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씨. 싫으면 말라고 하지 뭐. 어차피 현성 그룹에서 팔십억 불렀는데.”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만하면 나쁜 가격은 아니었다. 장문식이 이 상무를 대리하는 김용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성 그룹에 물건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대금 넣어주시면 바로 물건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대금 입금하고 물건 가지러 가겠습니다.]
전화를 마치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장문식의 통장에 팔십억이 찍혔다. 그의 입꼬리가 흡족하게 올라갔다.
“장문식, 팔자 폈구나!”
장밋빛 미래들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더 이상 이 지긋지긋한 골동품과 함께 있지 않아도 되었다. 유물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머리를 싸매며 생각할 필요도, 증거해 낼 필요도 없다. 그는 오늘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나 몰타로 갈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맑은 하늘, 넘실대는 바다를 보면서 평화로운 매일을 맞이하면 된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문소리가 들렸다. 김용식이 건장한 남자 두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건장한 남자 중 한 사람은 불화 액자가 들어갈 만한 합판 상자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중성 종이, 방수 종이 등 액자를 포장하는 데 필요한 종이를 들고 있었다. 김용식의 흥분감이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건 가지러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포장은 저희가 할 테니 문만 열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장문식이 비밀번호를 눌러 창고문을 열었다. 김용식의 진두지휘에 따라 남자들은 아미타불화를 포장했다. 그림이 합판상자에 들어갔다. 이제 마지막으로 방수 종이에 그림을 싸서 들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저 그림이 이곳을 나가면 장문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항으로 향할 것이다. 로마를 경유해서 몰타로 넘어갈 작정이었다. 장문식이 단꿈에 빠져있는 그때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한지감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장문식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버스 떠난 뒤에 후회하는 한심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아미타불화는 이미 현성 그룹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창고에서 나온 김용식이 한지감을 보며 보란 듯이 웃었다. 어째서인지 한지감은 그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럴 권리가 장문식 씨한테는 없을 텐데요?”
“장문식 씨? 어린놈이 어디서!!”
버럭거리는 장문식을 같잖다는 표정으로 보며, 한지감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종이를 본 장문식이 움찔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한지감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미타 불화의 실소유자인 전종학 님께 받아온 위임장입니다.”
“네…… 네가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실소유자가 아미타불화를 저한테 위탁했다는 것이 중요하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김용식이 달려들어 위임장을 가로채듯 가져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넋이 나간 장문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김용식이 위임장을 던져버리고는 장문식의 멱살을 잡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잖아!”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장문식이 아닌 한지감이었다.
“맡아놓은 물건을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판 거죠. 실소유자인 전종학 님은 미국에 거주합니다. 문화재보호법상 우리나라 문화재는 해외에 반출할 수 없습니다. 해외에 나가려면 전시회 대여 등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죠.”
그렇기에 미국으로 가져갈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두었던 것이다. 한지감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전종학 님은 시설이 갖춰진 수장고에 아미타불화를 보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자 전종학 님과 오랜 친구이자 물건을 중개했던 장본인인 장문식 씨가 나섰죠. 전문 수장고에 보관하는 것은 돈이 많이 드니 자신의 창고에 보관해주겠다고요.”
전종학은 이를 받아들였고, 장문식은 이런 일을 벌였다. 한지감이 창고로 가서 포장이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나왔다.
“이해가 다 되셨을 테니, 저는 그림과 함께 사라지겠습니다. 부디 좋은 합의점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문을 나서려는 그를 김용식이 막아섰다.
“이렇게는 못 나가지! 막아!!”
김용식의 한마디에 건장한 신체의 두 남자가 움직여 한지감을 제압했다. 그 순간에도 한지감은 그림만은 놓치지 않으려 잡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 의지가 무색하게 김용식은 그림을 빼앗았다. 한지감은 저항했지만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힘을 이겨내기는 힘들었다. 한지감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실소유자가 권리를 위임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여기서 그만하면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김용식이 코웃음쳤다.
“나는 오늘 여기 온 적이 없어. 이 그림은 나랑 상관없이 이곳에서 사라졌고, 뒤늦게 넌 그림이 없어진 이곳에 온 거야.”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한지감이 매서운 눈빛으로 김용식을 노려봤지만 그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내 뒤에는 현성 그룹이 있어. 알아? 현성 그룹의 권력이면 네까짓 놈의 말은 아무 쓸모도 없어.”
김용식이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정말 이대로 그림을 가지고 사라져버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