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나비와 여인’ 시리즈 (2)2021.02.20.
“전 근현대 미술은 잘 모릅니다. 근데도 이건 진작이라는 걸 알겠더라구요.”
“그 이유를 들어나 보죠.”
나의 입에서 그 어떤 근거가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이는 다영밖에 없었다. 여섯 개의 눈이 나를 향하자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마음을 정돈한 후 입을 열었다.
“서명입니다.”
나는 도록을 펼쳐 작가의 이름이 한글로 적힌 부분을 각각 짚었다.
“전체적으로 둥글고 흘리듯 쓰는 글씨체죠. 이 특징은 드림 갤러리에서 판매한 그림의 서명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조 사모가 기가 막히다는 듯 나를 봤다.
“여기 이 그림 서명도 둥글고 흘리듯이 쓴 글씨체예요.”
“그렇게 쓰려고 노력을 했죠. 하지만 쓰는 사람의 원래 버릇이 나온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명’ 자에서 ‘ㅕ’부분을 가리켰다. 궁서체로 쓰는 글씨처럼 맨 위부분이 각이 져 있었다.
“보이시죠? 하지만 도록 어떤 서명에도 이런 글씨의 특징이 나타나는 부분은 없습니다.”
박 사모의 눈이 동그래졌다. 슬슬 내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조 사모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거야 그날 어쩌다 그렇게 적힌 거겠지!!”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근거가 더 있습니다.”
나는 위작의 보증서를 들어올렸다. 오래된 보증서라서 그런지 맨 밑에 갤러리 이름이 수기로 적혀 있었다. ‘대원 갤러리’ 거기에서 ‘ㅣ’ 부분들이 하나같이 윗부분이 꺾여 있었다.
“보이시죠? 하나같이 윗부분이 꺾여 있는 거 말입니다. 그림 서명하고 비슷한 특징이 나타나네요. 마치 한 사람이 쓴 것 같이.”
위작의 주인의 눈동자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스카이 옥션에서 샀다고…….”
듣고 있던 박 사모가 인상을 찌푸렸다.
“스카이 옥션에서 직접 산 거 아니었어?”
“그게 그러니까…… 딜러가 직접 샀다고…….”
“하……!”
그럴 줄 알았다. 옥션의 감정이 항상 맞는 건 아니겠지만, 근현대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보는 것을 감정 위원들이 놓쳤을 리 없다.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딜러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림을 구매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쐐기를 박기로 했다.
“이 그림 아직도 환불을 원하시면 제가 사도…….”
박 사모가 황급히 내 말을 잘랐다.
“아니요.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환불 요구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미안해요, 다영 씨.”
그나마 눈치가 있어서 사과가 빠른 건 다행이었다. 한없이 가벼운 사과였지만 말이다. 다영은 사무적 미소로 답했다.
“아닙니다.”
대답이 마침과 동시에 다영은 날 보고 진짜 미소를 보여주었다. 조 사모는 아직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지 멍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박 사모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괜히 안목 없는 사람 때문에 일이 커진 것 같네요.”
조 사모가 노려보자 박 사모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내 안목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죠, 언니?”
이제 주도권은 박 사모에게 가 있었다. 조 사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벌떡 일어났다.
“나는 바빠서 이만.”
픽 웃은 다영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오빠.’
* 일주일 후, 한우가 지글지글 눈앞에서 구워지는 모습을 보자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와아. 한우다! 한우!!”
“맛있게 드세요!”
다영이 환한 미소로 말했다. 잘 익은 한 점을 소금도 찍지 않은 채로 입안에 집어넣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진짜 맛있다!”
“어떻게 맛이 없겠어요오. 한우인데.”
다영도 한 점 입에 집어넣더니 돌고래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직원이 계산서를 갖다주었다. 슬쩍 보니 만만치 않은 금액이 적혀있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오억 해결됐는데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죠 뭐.”
다영은 확실히 하기 위해서 협회 감정을 받고 그 이후 다른 감정기관에서도 감정을 받았다. 두 번의 감정에서 모두 진작이라 판명되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았어도 시간이 해결해 줄 상황이었다.
“나 이렇게 한우 먹어도 되는 건가? 사실 나 아니었어도 해결될 상황이었잖아.”
“그러느라 일주일은 걸렸을 거고, 저는 그 시간 동안 공포에 떨었겠죠. 그림을 팔았던 저조차도 위작이라고 의심했으니까요. 오빠 덕분에 그 지옥 같은 시간이 하루로 줄어든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다면 다행이구. 아! 근데 그 위작을 판 아트 딜러는 누구야?”
그 아트 딜러가 누구길래 조 사모는 위작을 진작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걸까 궁금했다. 주변을 살피며 다영이 말했다.
“이종수라고 웬 날건달 같은 놈 있어요. 그림에 대해 안목도 없으면서 사람을 기가 막히게 잘 구워삶아요. 그 사람한테 딱 물린 거죠.”
“어딜 가도 그런 사람은 있구나.”
고미술계에도 그렇게 사람 후리는 재주만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문가라고 하지만 사실 전문지식은 하나도 없고 그럴듯한 말로 포장만 잘하는 이들 말이다.
“그림 판매자하고는 연락됐어?”
다영이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어제 연락됐어요. 외국에 있었더라구요. 몰랐는데 그분이 사실 전 정부 주요 인사 중 하나였대요. 외국에 딸이 사는데 송사에 휘말렸고, 급전이 필요해서 그림을 파셨던 거래요.”
“아. 그렇구나. 근데 그 정도 사람이면 큰 갤러리하고 인연이 있지 않나?”
“그게 오히려 문제였던 거죠. 남한테 안 좋은 모습 보이는 것을 되게 싫어하는 성격이시더라구요.”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왜 큰 갤러리에 팔지 않고 작은 드림 갤러리를 선택했는지, 왜 연락이 안 되었는지 말이다.
“하필 운 안 좋게 딱 그때 일이 터진 거구나?”
“그렇죠. 저한테 엄청 미안해하시더라구요. 그런 일 생겼는지 몰랐다면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다영이 음흉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뭐라고 하긴요. 괜찮다고, 다음에 또 파실 그림 있으시면 꼭 불러달라고 했죠.”
녀석. 이제 제법 사회인 티가 난다. 흐뭇한 마음이 들어 괜히 장난이 치고 싶었다.
“와우. 진짜 간신은 여기 계셨네.”
“간신이라뇨. 저는 ‘간’의 기역 자도 모릅니다.”
“글쎄. 아닌 것 같은데에.”
“쳇. 고기나 많이 드세요.”
새침한 다영의 표정을 보며 나는 픽하고 웃고 보란 듯 세 점을 동시에 입안에 넣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다영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웃었다. * 이수지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 이 상무가 아미타불화를 구매하지 못한 이야기를 수행원으로부터 막 전해들은 참이었다.
“오빠가 한 방 제대로 먹었네?”
“네. 그런 셈입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수행원이 맞장구쳤다. 이수지가 즐거움을 참지 못하고 폴짝 소파에서 일어섰다. 기분이 정말 좋을 때만 보이는 발랄함이었다.
“대선 주자한테 줄 댄다고 꿈에 부풀어 있었을 텐데, 속 좀 쓰리겠어.”
이수지의 얼굴에서는 안타까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쟁자의 실수는 기회였다. 수행원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답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이번 일 강 회장에게 위탁받아서 성공시킨 사람이 한지감이라고?”
“네. 맞습니다. 강 회장이 한지감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이수지의 표정이 순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지난번 한지감이 사과 가격을 거절한 것이 마음에 들어 개인 감정사로 제안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개인 감정사로 들여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말이야.”
“저도 괜찮다고 생각은 들지만 응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번 일로 강 회장에게 엄청난 인센티브를 받았다고 합니다. 프리랜서로 일할 때 더 많은 수입을 벌어들이니, 응할 가능성이 적지 않겠습니까?”
“흐음……. 괜찮은 조건을 제시하면 되지 않겠어?”
수행원이 조심스레 이수지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예를 들면 어떤……?”
“매일 나를 볼 수 있는 특권?”
순간 수행원은 멈칫했지만 이수지는 이를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사과 가격 안 받겠다고 했을 때 말이야. 이런저런 핑계들을 댔지만 결국 날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꼴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말이야.”
수행원은 난감했다. 착각이라는 것을 짚어주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그런 것 같다고 맞장구를 치고 넘어가야 할지 말이다. 하지만 이수지의 새침한 표정은 그 착각의 벽이 꽤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럴 때 바른말을 했다가는 된서리 맞기 딱 좋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쩌자고 손님한테 그런 감정을 갖는지, 보는 제가 다 불쾌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불쾌하시지 않으십니까?”
이수지가 오만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뭐. 이런 경험이 처음도 아니니까. 알잖아, 나 짝사랑한 남자 일일이 셀 수 없이 많은 것.”
“그럼요. 정말 셀 수도 없죠.”
수행원은 맞장구를 쳤지만 그건 사실과 많이 달랐다. 예쁜 외모 때문에 정말 많은 남자들이 호감을 보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수지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보고 99%가 빠르게 호감을 정리한다. 나머지 1%는 현성 그룹이란 이름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감내하기로 결심한 이들이었다.
“그 많은 남자들 중에 하나인 거지 뭐. 난 그 감정을 살짝 활용할 생각이고.”
“좋은 생각입니다.”
수행원은 웃고 있었지만 속은 불안했다. 활용할 감정이 1%도 없을 것 같은데, 거절당한 이후 이수지가 부리는 성질을 어찌 감당해야 할지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 월요일. 차를 끌고 권미애의 집으로 향했다. 길이 막히지 않는데도 나의 얼굴은 어두웠다. 꽤 오랜 시간 4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4단계가 마지막인가?”
4단계가 마지막이 아니라면, 5단계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걸까? 의문만 생길 뿐 답이 나오진 않았다.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권미애의 집에 도착했다. 처음 봤을 때는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이었는데, 두 번째 봐서인지 조금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권미애가 환한 미소로 날 반겨주었다.
“지감 씨. 어서 와요.”
“그동안 잘 계셨어요?”
“저야 잘 있었죠. 내가 너무 급하게 부른 건 아니죠?”
“급하긴요. 주말에 연락 주셨잖아요.”
“일단 차 한잔해요.”
권미애와 나는 소파에 앉아 홍차를 마셨다. 홍차의 떫은맛이 나를 곤욕스럽게 했다. 녹차는 산뜻한 맛이라도 있는데 홍차는 그렇지도 않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손님 앞이기에 최대한 미소를 유지하면서 차를 마셨다. 그런 나를 보면서 권미애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차 맛이 어때요?”
“홍차는 잘 모르지만 괜찮네요. 향도 좋구요.”
“다행이다. 지감 씨 온다고 해서 특별히 골든 팁스로 준비했거든요.”
나는 순간 사래를 걸린 뻔한 것을 겨우 침을 삼켜 위기를 넘겼다.
“골든 팁스라면 스리랑카 고원에서 일일이 손으로 찻잎을 따서 햇빛에 건조하는 그…… 차요?”
“네 맞아요. 벨벳 천 위에서 건조하죠.”
내가 이토록 놀라는 이유는 이 차의 가격 때문이다. 영국 어딘가에 이 홍차를 파는 곳이 있는데 대략 한 잔에 24만 원이라고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24만 원을 마시고 있는 셈이었다. 특별히 나를 위해 내온 것 같아, 떫은맛만 나는 차를 정말 맛있다는 듯이 연기를 하며 마셔야 했다. 반쯤 마시다 더 이상 못 마시겠어서, 나는 이곳에 온 용무를 권미애에게 상기시키기로 했다.
“‘고미술의 밤’은 오래된 모임인가요?”
“한 10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어요. 현성 그룹 이 회장님과 도강 그룹 강 회장님이 만드셨죠.”
‘고미술의 밤’은 고미술을 좋아하는 재계 인사들의 모임이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권미애가 ‘고미술의 밤’에 가져갈 물건이 진품인지 가품인지 확인해주기 위해서였다. 이 모임은 표면적으로는 고미술을 함께 보고 감상을 나누는 모임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유물을 소유하고 있다는 과시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는 유물을 옮기는 그 섬세하고 신경이 곤두서는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러기에 유물의 진위 여부는 매우 중요했다. 혹여라도 위조품을 가져간다면, 앞에서는 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뒤로는 안목이 없는 수장가라는 비웃음이 따를 것이 자명했다. 내게 ‘고미술의 밤’에 가져갈 유물을 감정해 달라는 사람은 권미애뿐만 아니라 도강 그룹 강 회장도 있었다. 두 사람 다 나에게만 감정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고 다수의 학계인사나 상인들을 통해 크로스 체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 행사는 참가자들의 자존심이 걸린 행사였다. 권미애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차도 다 드신 것 같으니 유물을 보러 갈까요?”
“네. 좋습니다.”
약 20도로 수장고가 관리되고 있었기에 들어서자 한기가 느껴졌다.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감정할 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높이 50cm, 폭 30cm 정도 되는 묵직한 느낌의 철불이었다. [ 1,000,000,000원 | 진 | 2,000,000,000원 | 1380년대 ] 와우! 최고가 20억이나 되는 고려시대 유물이다. 흥분되는 감정을 채 느끼기도 전, 메시지가 다시 떴다. [미션 : 24시간 내에 이 유물의 특이사항을 찾아내면 마지막 단계인 5단계 정보가 공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