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특이사항 (1)2021.02.22.
[ 1,000,000,000원 | 진 | 2,000,000,000원 | 1380년대 ] 와우! 최고가 20억이나 되는 고려시대 유물이다. 흥분되는 감정을 채 느끼기도 전 메시지가 다시 떴다. [미션 : 24시간 내에 이 유물의 특이사항을 찾아내면 마지막 단계인 5단계 정보가 공개됩니다.] 기다렸던 5단계 미션이 눈앞에 떠올랐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특이사항이 무슨 뜻이야? 작품에 쓰인 기법이나 작가의 특징들을 이야기하는 건가? 혼란스러워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더니, 권미애가 조심스레 물었다.
“가품 인가요?”
“그…… 그냥 좀 특이해서 놀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철불이 흔하지 않은 편이잖아요.”
“그렇죠.”
“자세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면장갑을 끼고 확대경을 들었다. 철불은 금동불보다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산화가 쉽게 되고 질감이 거칠어지는 철의 특성 때문이다. 철불은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유행했다. 하지만 이 철불은 고려 초기가 아닌 고려 후기의 것이다. 오른쪽 어깨를 덮은 둥근 형태의 옷자락과 왼쪽 어깨에 표현된 Ω 모양의 옷 주름은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이다. 가슴 위에 표현된 가슴과 배 위를 수형으로 가로지르는 옷깃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에 나타나는 요소이다. 무엇보다 고려 초기의 개성 강한 특징이 아닌, 단아함이 보이는 고려 후기의 특징을 함께 보이고 있다. 손은 아미타불의 상진인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 아미타불상은 대개 전법륜인(轉法輪印)을 하기에 드문 모습이었다. 유물의 상태가 양호하고 희소성 있다. 광배(인물의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광명)와 대좌(부처나 보살 등이 앉는 자리)가 없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정말 상태가 좋았다.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유물의 특이 사항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미스터리한 특이사항 때문인지 유물을 보는 내내 찜찜한 느낌이 든다.
내 오랜 침묵에 권미애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떤가요?”
“좋은 물건입니다. 광배와 대좌가 없긴 하지만 철불인데 상태도 좋고, 고려시대 아미타불인데 선정인을 한 것도 희소한 가치가 있어요. 혹시 복장이 있나요?”
복장(腹藏)은 불상 내부에 사리와 불경들을 넣는 것을 뜻한다. ‘복장이 터진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복장을 물어본 이유는, 보통 거기에 발원문이 있고 이를 통해 이 불상이 언제 어떤 이유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유물이 어디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 가운데서 ‘특이사항’이 나올지도 모른다. 고개를 저으며 권미애가 말했다.
“아니요. 복장은 구매할 때부터 없었어요. 그게 있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권미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적당히 뭉그러트렸다.
“아직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유물 말고 다른 것을 가져가시면 좋겠습니다.”
권미애가 지그시 날 보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참고할게요. 대신 확실해지면 반드시 말씀해줘요.”
“그럼요.”
부디 24시간 내에 확실해지길 누구보다 내가 바랐다. * 권미애 집에서 나와 바로 가게로 가고 싶었지만, 이수지의 연락 때문에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벨을 누르자 잠시 후 수행원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막고 수행원이 밖으로 나왔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나는 의아했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시든 반박하지 마시고 에둘러서 말씀해주세요.”
“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때 안에서 이수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얼른 안 들어오고 뭐해?”
수행원이 설명은 하지 않고 간절한 눈으로 말했다.
“잘 하실 거라 믿습니다.”
뭘 믿는다는 거야. 반문할 틈도 없이 수행원이 나를 룸 안으로 끌어당겼다. 룸 안에 들어선 수행원은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이 되어 이수지 옆에 섰다. 나는 갸우뚱하면서 이수지에게 인사를 했다. 이수지가 도도하게 말했다.
“내가 오늘 왜 불렀는지 알겠어?”
“혹시 ‘고미술의 밤’ 때문이신가요?”
이수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썼다.
“늙은이들 모이는 곳에 젊고 예쁜 내가 왜?”
안 끼는 게 아니라 못 끼는 조건 아닌가. 이수지의 아버지인 현성 그룹 이 회장, 도강 그룹 강 회장 화이트 백화점 권 대표. 다 회장이나 대표인데 본인은 아무것도 맡고 있지 않아 못 끼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기에 나는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네요. 제가 이렇게 센스가 없습니다.”
“알면 됐고.”
이수지가 선심 써서 봐준다는 투로 말하고는 차 한 모금을 여유롭게 마셨다. 무슨 일로 불렀는지 빨리 이야기나 하지, 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어떤 일로 부르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게 궁금해하니 말해줄게. 내 전속으로 일하는 것 어때?”
강정휘에 이어 두 번째 받는 전속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때 나는 자리 잡지 못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도강 그룹 강 회장, 화이트 백화점 권 대표, 내 앞에 있는 이수지까지 내 손님이고, 옥션에서도 감정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수지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저런 제안을 할 정도면, 엄청난 조건을 내세울 생각인가? 예를 들어 감정하면 시가의 1% 정도로 쳐주고 원하는 물건을 가져왔을 때는 30% 정도를 인센티브로 준다든지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내 궁금증을 풀어주듯 이수지가 대답했다.
“조건은 월급 천만 원에 감정하면 시가의 0.2%, 원하는 물건을 가져왔을 때는 15%를 인센티브로 주지.”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만 현재 내 상황에서 그 조건에 응할 이유는 없었다.
“죄…….”
거절하려는데 수행원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저어서 멈췄다. 내 말을 듣지 못한 이수지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나를 볼 수 있는 ‘특권’이 있지.”
이수지를 매일 볼 수 있는 특권? 그건 특권이 아니라 악몽이다. 그것도 현실이라서 깰 수도 없는 악몽. 기가 막혀서 보는데 이수지가 한껏 도도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대조적으로 수행원은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모든 정보들이 하나로 모이면서, 비로소 이수지가 나한테 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 알게 되었다. 이수지는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 정말 어처구니없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욕이 올라오는 것을 삼켰다. 잊지 말자, 한지감. 앞에 있는 사람은 손님이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특권도 좋지만 일단 제 일에 집중하는 것이 현재는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수지가 지그시 나를 봤고, 단호한 눈빛으로 재차 내 입장을 전달했다.
“알겠으니까 가 봐.”
수행원이 나를 보며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 가게로 와서 나는 아버지에게 5단계 미션을 간략하게 말씀드렸다. 특이사항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도움을 청한 것이다.
“특이 사항이라……. 어디가 손상되었는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 그런 걸 말하는 건가?”
“그걸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광배나 대좌가 없어진 걸 인지했는데도 성공했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유물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이런 유물 외에 무언가가 아닐까?”
유물 외의 무언가?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지 어떤 예도 떠오르지 않았다.
“예를 들면요?”
“예를 들면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떠올려봐라.”
국보인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에 큰 비가 온 뒤에 개어가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겸재의 절친이었던 사천 이병연 선생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자 그 병세가 빨리 낫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알겠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게 유물 외의 무언가일까요? 그것 때문에 작품이 만들어졌잖아요.”
“하지만 그 이야기가 작품 자체는 아니지 않니. 거기다가 인왕제색도만 봐서는 그런 사정을 알 수 없어.”
아버지의 말씀이 맞다. 그림 우측 상단에 ‘인왕제색’이라는 제목과 시기만 쓰여 있을 뿐, 작품의 의도를 짐작하게 하는 화제는 없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그렇네요.”
“발원문이 있다면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쉽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어떻게 해야 특이사항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걸까? 마음이 답답했다. * 다음날, 아침 일찍 도강 그룹 강 회장의 물건을 감정하기 위해서 출발했다. 특이사항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기에 내 표정은 밝지 못했다. 미션 시간까지는 이제 2시간 남짓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강 회장을 만나고 나오면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을 터였다. 그 시간 동안 내가 특이사항을 알아낼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하다. 어제 밤잠을 설치며 철불의 ‘특이사항’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일단 내가 정리한 ‘특이사항’의 조건은 이것이었다. 첫 번째, ‘고미술의 밤’과 연관되어 있다. 이전 미션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미션은 그때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천만 원을 오천만 원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3단계 미션으로 긍재의 매 그림을 6천만 원에 파는 미션을 받았다. 그러니 이번 ‘특이사항’은 권미애가 ‘고미술의 밤’에 참석하는 상황에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유물의 가격에 영향을 주거나 판매와 연관된 무언가이다. 안경이 현재까지 보여주었던 정보는 다음과 같다. 구매 가격, 진위 여부, 최고가, 제작시기, 작가. 이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키워드는 ‘돈’과 ‘판매’이다. 그러니 ‘특이사항’이 무엇이든, 유물의 가격에 영향을 주거나 판매와 연관된 것이다. 첫 번째는 조건은 진위여부 중점적이기에 제외하고 두 번째 조건만을 가지고 특이사항을 추측했다. 도록 수록여부, 희소성, 전(前) 소장자, 아버지가 말씀한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까지 다양한 경우의 수가 나왔다. ‘도록 수록’은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유물의 신뢰성을 높여준다. ‘희소성’은 말 그대로 높은 가치로 평가되어 가격을 높여준다. ‘전(前) 소장자’가 사회적 파급력이 있는 인물이면 가격이 올라간다. 재벌 회장이나 전 대통령이 소장했던 물건은 높은 값으로 거래된다. ‘관련된 이야기’는 유물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게 한다. 사연을 가진 물건은 사람을 끌어들이기 마련이다. ‘가격’과 관련된 부분은 이렇듯 명확하지만, ‘고미술의 밤’과 관련된 첫 번째 조건은 진위여부 외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고 거기서 딱 막혀버렸다. 머릿속으로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는 사이 나는 회장실 앞에 도착했고, 비서실장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한 선생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미타불화 사건 이후 비서실장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노크를 하고 허락이 떨어지자 비서실장과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강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특유의 경상도 억양으로 인사했다.
“한 선생, 일찍 왔네요.”
“회장님이 기다리시는데 제가 늦을 수야 없죠.”
테이블에 있는 청화백자는 60cm 정도의 높이에 구름과 용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탑 옥션에서 이수지의 개인 감정사가 현성 그룹 이 회장의 선물로 추천했던 그 청화 백자였다.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보니 반가웠다. [ 1,500,000,000원 | 진 | 1,800,000,000원 | 1750년대 ] 이 청화백자가 이 크기의 다른 백자보다 비싼 이유는 왕실에서 사용돼서다. 용의 발톱이 많을수록 도자기 값은 올라가는데, 이 도자기의 용은 발톱이 다섯 개다.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용, 오조용준(五爪龍樽)은 왕실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전에는 왕실용 도자기에 용 발톱이 3-4개였다가 18세기에 이르러 5개 발톱이 등장한다. 오조룡은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데, 이런 용이 왕실 도자기에 등장한 것은 조선의 자존의식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도자기, 회장님께서 사셨군요.”
“언제 봤어요?”
“탑 옥션 프리뷰에서 봤습니다. 반갑네요. 진품입니다. 도자기가 주인을 잘 찾아간 것 같습니다.”
왕실에서 쓰는 도자기이니 그 주인은 왕이 된다. 아니지, 오조룡이니 황제가 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강 회장이 싫지 않은 듯 웃었다.
“회장님께서 도자기를 ‘고미술의 밤’에 가져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불화를 가져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 불화를 더 선호하시는 것 같아서요.”
“나도 불화를 가져가고 싶죠.”
강 회장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불화는 혼자 보기는 좋아도 남하고 같이 보기는 안 좋잖아요.”
순간 머릿속에 섬광이 스쳤다.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철불의 특이사항이 뭔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