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고미술의 밤 (1)2021.02.27.
고미술의 밤 하루 전. 김용식이 수행원들을 밀치고 들어와 이재근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박자 늦은 수행원들이 김용식을 끌고 나가려는데, 이 회장이 손을 들어 멈추라는 표시를 했다. 그 표시와 함께 수행원들은 움직임을 일제히 멈췄다.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김용식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아미타불화를 도강 그룹에 빼앗겼고, 이 상무는 이 모든 것을 김용식의 탓으로 돌리며 다른 손님들의 발걸음마저 끊기게 만들었다. 이대로라면 업계 매장이었다. 한평생 골동만 만지면서 살았던 그였다.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차가운 눈길로 응시하던 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일을 시킨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내게 잘못했다니, 어이가 없구만.”
“회장님이 이번 일에 큰 기대를 가지셨던 것 알고 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상무님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김용식에게 아미타불화를 의뢰한 사람은 이 상무였지만, 그 뒤엔 일을 맡긴 이 회장이 있었다. 이 상무에게 아무리 매달려도 소용이 없으니 먹이사슬의 가장 우두머리에 있는 이 회장을 찾아온 것이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그로서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오줌을 지릴 만큼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 회장이 말했다.
“네놈 따위가 감히 나에게 명령을 해?”
“그…… 그게 아닙니다. 회장님……. 저는 그저 저……한테 하……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벌벌 떠는 김용식을 보자 이 회장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래. 부탁을 해야지.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안 그래?”
“네…….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 회장이 창밖을 보니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회를 바란다. 어느 정도의 각오가 돼있어?”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김용식은 결연했다. 이 회장에게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김용식과 달리 이 회장은 같잖다는 듯 풋 웃음을 터트렸다.
“목숨? 네놈 목숨은 나에게 한 푼도 가치가 없어.”
“제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적어도 진짜를 가짜로 만들 정도의 배포는 있어야겠지. 내일 행사에서 네가 받은 대로 갚아줘.”
이 회장이 한쪽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김용식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한지감이 소개하는 강 회장의 유물을 가짜로 만들라는 말이다. 진품을 가품으로 만드는 것은 리스크가 크지만 업계에서 없는 일이 아니었다. 호리다시를 하기 위해 좋은 물건을 가치 없는 양 만들기도 했고, 경쟁 상대의 평판을 떨어트리기 위해 일부러 그런 짓을 벌일 때도 있었다.
“회장님이 함께해 주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한국 재계 서열 1위, 이재근 회장의 후광이 있으면 진짜를 가짜로 만드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대하겠어.”
씨익, 이 회장이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 고미술의 밤 행사 당일.
“도자기에 그려진 다섯 개의 발톱을 가진, 오조룡이 왕실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8세기에 들어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이전까지는 3-4개 발톱을 가진 용을 그렸습니다. 원래 오조룡은 황제를 뜻하는 것으로…….”
“정말 그 물건이 진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두의 시선이 날아든 목소리에 집중되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용식이었다. 나는 화가 났지만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네. 진품입니다.”
“그런 눈으로 골동상을 어떻게 하는지. 이건 조잡한 위조품입니다!”
제정신일까. 어떻게 이 유물이 위조품으로 보일 수가 있지? 그래. 굳이 그렇게 위조품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어디 그 근거나 들어보자.
“위조품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저벅저벅 걸어나온 김용식이 유물을 보면서 설명했다.
“이 칙칙한 색과 매끄럽지 않은 표면을 보세요. 저급 태토를 사용했습니다. 유약층도 얇습니다.”
색은 맑고 표면은 매끄러웠다. 저급 태토가 아닌 고급 태토였다. 유약층이 얇지도 않았다.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는 그때, 나는 내게 쏟아지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모두 나를 의심하고 있다. 김용식보다 한참 어린 나이, 무엇보다 이런 어려운 자리에서 당당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김용식의 모습이 신뢰감을 높였다. ‘저 정도로 이야기 할 정도면 확실한 무언가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위조품을 진품이라고 감정한 골동상이 되어버린다. 또한 나를 이곳에 전문가 자격으로 데려온 강 회장에게도 폐를 끼친다. 상황을 뒤엎어야 한다.
“입구는…….”
김용식이 내 말을 씹어버리고 관중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여기, 이 도자기가 진품이라고 생각하시는 분 있습니까?”
“…….”
의문을 보이는 몇몇 전문가들이 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김용식을 데려온 사람이 현성 이 회장이기 때문이다. 김용식의 의견에 반대하면 자연스레 이 회장에게 반발한 모양새가 된다. 그런 위험성을 감내하면서까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없었다. 아찔한 기분이 들면서 눈앞이 하얘졌다. 빌어먹을……. 시험 공포증이 여기서 나오다니……! 사실 이 상황은 시험과 근본적으로 같다. 풀어야 할 문제가 내 눈앞에 놓여 있고,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시험 볼 때는 마음 속 부담감뿐이었지만 지금 내게는 쏟아지는 시선들이 있다. 삐 소리가 귀에 들리면서 모든 소리가 윙윙거린다. 점점 모든 것이 아득해져 간다. 그때 선명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전 이 도자기 진품 같은데요.”
어둠속에 있던 목소리의 주인이 빛 가운데로 나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목소리의 주인은 권미애였다. 권미애를 알아본 김용식이 움찔했다. 전문가도 아닌 재계 참가자가 나설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기 때문이다.
“자…… 잘 보십시오.”
“잘 봐도 진품 같은데요. 무엇보다 전 한 선생의 말을 믿습니다. 여기에 도난품을 가져올 뻔한 것을 막아준 사람이 한 선생이거든요.”
나를 믿는 권미애의 눈빛이 닿자 윙윙거림이 사라지면서 시야도 선명해졌다. 당황한 김용식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그건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운이 좋았던 거죠.”
권미애가 대꾸해 주려는데 내가 끼어들었다.
“운도 실력이죠. 이번에도 저는 그 운을 가졌습니다. 눈이 안 좋으신 모양이니 색과 표면은 빼놓고 이야기하죠.”
“뭐? 눈이 안 좋아?”
씩씩거리는 김용식을 무시하고 말을 이어갔다.
“입구는 똑바로 서 있고 어깨가 떡하니 벌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아래로 갈수록 급격히 줄어들죠. 조선 후기 장신호(長身壺)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또한 굽다리에는 모래에 받쳐 구운 흔적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직접 제가 들어서 그 흔적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그런 건 솜씨 좋은 위조자들의 손에서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어!”
김용식이 핏대까지 세우며 눈을 부라렸다. 그 모습이 억지를 부리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좀 더 확실한 근거를 말씀해 보시죠. 정말 이 청화백자가 위조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렇다면 과학적인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겠군요.”
도자기의 진위 여부를 과학적으로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TL검사로 연대측정을 하는 방식이다. 그 경우 도자기 샘플이 필요해 구멍을 내야 하기 때문에 소유자가 기피한다. 김용식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검사가 어렵다는 핑계로 빠져나가려는 거야?”
“아니요. 먼저 물건의 주인께 허락을 맡으려구요.”
“뭐…… 뭐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김용식은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런 김용식에게 나는 싸하게 웃어주고 저벅저벅 강 회장의 앞으로 다가갔다.
“TL검사 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강 회장의 답을 기다렸다. 지그시 나를 보던 그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그렇게 하세.”
강 회장이 김용식을 매섭게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만약 청화백자가 진품이라면 자네는 이십억을 내게 지불해야 하네. 그 외에도 오늘 내가 받은 이 모욕의 값까지 치러야 할 걸세.”
“저…… 저는…….”
패닉에 빠진 김용식이 덜덜 떨었다. 그때 자리에서 이 회장이 일어났다.
“이거, 제가 데려온 사람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고미술에 대한 열정이 빚은 참사이니 강 회장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이 회장이 김용식을 보고 버럭 소리 질렀다.
“어서 사과드리게!!”
“죄……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강 회장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김용식을 봤다.
“열정이 넘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다음 유물로 넘어가도록 하죠.”
“네……!”
대답한 사회자가 다급하게 다음 유물을 설명했다. 그제야 권미애는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당장 달려가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지만, 괜찮다는 듯 손을 드는 권미애 때문에 멈춰 섰다. 눈빛으로 감사함을 전하는 내게 권미애가 환하게 웃어주곤 자리에 앉았다. 내가 마련된 자리에 앉자 강 회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 선생, 내가 나서지 않아서 서운해요?”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나서셨다면 자칫 상황을 덮으려는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현명하신 판단이었습니다.”
강 회장이 씨익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와 달리 이 회장과 김용식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 네 번째 유물 소개를 마쳤을 때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 회장이 김용식, 비서와 함께 라운지를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거리를 두고 그 일행을 따라갔다. 강 회장 덕분에 상황이 정리되고 두 번째 유물 소개가 시작되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김용식이 이 어려운 자리에서 독단적으로 나설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사주를 받았다면 그 사람은 이 회장일 가능성이 높다. 김용식과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강 회장이 김용식을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중재자로 나선 것이 이 회장이다. 단순히 자신의 전문가로 동행해서 그런 행동을 취했을 것 같진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 바람은 좌절되었다. 이 회장 일행만을 태운 엘리베이터 문이 재빠르게 닫혔기 때문이다. 뒤늦게 열림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봤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따라가도 소용없을 거예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권미애가 서 있었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어요. 도난품 가져와서 창피 당할 일, 지감 씨가 막아준 거잖아요.”
“하지만 저 때문에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권미애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있다가 창피를 당하는 것과 내 스스로 알리는 것은 천지차이예요.”
“이렇게 알려져서 난감하지 않으십니까?”
도난품을 아무도 모르게 갖고 있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말하기 좋은 내용이니 빠른 속도로 퍼질 터였다.
“전혀 상관없는데요.”
“네?”
“이제 연진사 철불은 더 이상 도난품이 아니예요.”
“그 말씀은……?”
권미애가 화사하게 웃었다.
“맞아요. 연진사에 돌려주기로 했어요. 이건 비밀인데, 한 시간 후면 기사가 나올 거예요.”
“아깝지…… 않으세요?”
“당연히 아깝죠. 근데 만약 아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돌려주자고 했을 거예요. 그런 아이였거든요.”
그렁해진 권미애의 눈을 보다 괜히 울컥해졌다. 부모는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와닿았다. 눈물을 훔친 권미애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기분이다. 이 회장이 왜 저러는지 살짝 힌트 줄게요. 정경유착.”
장난스럽게 웃은 권미애가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휙 돌아서 걸어갔다. 그래서 난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힌트 감사합니다!”
그녀는 이번에도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하고 멀어져갔다. 라운지로 돌아온 나는 전시된 유물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세 번째 놓인 청화백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감정한 청화백자와 형태는 비슷했지만 크기는 더 컸다. [ 4,000,000,000원 | 진 | 6,500,000,000원 | 1490년대 | 소장가 판매 고민 중 ] 부드러운 어깨선이 15, 16세기의 대표적 특징을 보여주었다. 문양이 특이하다. 매화, 대나무, 소나무가 그려져 있었고 11명의 인물이 그려졌기에 희소성을 높아 최고가가 65억이 되었을 것이다. 매화, 나무, 소나무는 사군자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리며 군자의 지조를 지녔다고 칭송 받았다. 세한삼우가 그려진 도자기는 이전에 본 적 있지만, 11명의 인물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이런 도자기는 궁중에서 장식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명품을 보게 되다니, 김용식에게 몰렸던 것이 순식간에 잊혀지면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그것도 잠시, 특이사항을 다시 보고 정신이 번쩍 났다. 소장가 판매를 고민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나에게는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