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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고미술의 밤 (2) (39/226)

39화 고미술의 밤 (2)2021.03.01.

소장가 판매를 고민하고 있다고? 그렇다면 나에게는 기회다! 도자기 앞에는 소장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한서 미술관 신현숙 대표’. 신현숙 대표? 못 들어본 이름인데. 나는 재빠르게 핸드폰으로 신현숙의 이름을 검색했다. 남편이 한서 그룹 임종열 회장이다. 나는 행사장 안을 둘러보며 사진 속 인물을 찾아내려 애썼지만, 행사장을 나간 것인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을 감싼 답답한 검은색 디자인 원피스를 입은 70대 여자와, 숨쉬기도 어려워 보이는 딱 달라붙은 정장을 입은 50대 여자만 스쳐갔다. 이제 쉬는 시간은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지금 얼굴이라도 익혀 놔야 소개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유물을 감상할 때 말이라도 걸어볼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강 회장의 비서실장이 보였다. 강 회장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고, 비서실장은 한걸음 뒤에서 언제나처럼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시간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비서실장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16560253073981.jpg“한서 미술관 신현숙 대표님 보시면 알려주실 수 있나요?”

비서실장이 매우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16560253073986.jpg“저기 계시지 않습니까?”

비서실장의 시선이 닿은 곳은 온몸을 감싼 답답한 검은색 디자인 원피스를 입은 70대 여자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내 눈 앞에 있는 70대 여자와 핸드폰 속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봐도 동일인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달랐다. 사진 속 여자는 얼굴이 부어 있지 않았는데, 내 앞에 있는 여자는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이목구비가 많이 달랐다. 당황한 나를 보며 비서실장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16560253073986.jpg“최근에 시술을 좀 하셨는데 부기가 안 빠졌습니다.”

16560253073981.jpg“부기뿐만 아니라 이목구비가 많이 다른 것 같은데요……?”

16560253073986.jpg“요즘 그대로 프로필 사진을 올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비서실장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신현숙에게 다가가려는데,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16560253074008.jpg“유물 소개를 이어가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어쩔 수 없이 나는 지정석에 앉았다. 다섯 번째 유물 소개가 이어졌지만 내 시선은 계속 세 번째 전시품인 청화백자에 머물렀다. * 유물 소개가 모두 마치자 사람들은 자유롭게 유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회를 엿보다가 신현숙에게 다가갔다.

16560253073981.jpg“안녕하세요. 신현숙 대표님, 골동상 한지감이라고 합니다.”

16560253074008.jpg“아…… 네.”

경계심 가득한 신현숙의 표정이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물러날 수 없기에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16560253073981.jpg“대표님이 소장하고 계신 청화백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꼭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물건 보시는 안목이 정말 탁월하시네요.”

칭찬에 신현숙의 경계심은 조금 풀어져 어깨를 으쓱 올리며 말했다.

16560253074008.jpg“뭐 없는 편은 아니죠.”

다시 나를 본 신현숙의 눈이 동그래졌다.

16560253074008.jpg“아까 처음에 설명한 분인가요?”

16560253073981.jpg“네. 맞습니다. 아까 너무 당황해서 머리가 새하얘졌어요.”

16560253074008.jpg“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러고도 남죠. 그래도 차분하게 잘 대응하던데요? 인상적이었어요.”

새옹지마라더니, 아까 그 거지같은 상황 덕분에 신현숙의 경계심이 조금 풀어졌다. 쓰윽 그녀의 주변을 둘러봤다. 수행원 한 명만 있을 뿐, 전문가 자격으로는 아무도 데려오지 않은 것 같았다.

16560253073981.jpg“물건을 가져다 주신 분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주로 거래하시는 골동상이 따로 있으신가요?”

신현숙이 고개를 저었다.

16560253074008.jpg“아니요. 주로 거래하는 골동상은 없고, 여러 곳과 거래하고 있어요.”

신현숙이 이 유물을 팔려는 이유가 뭘까? 물건 보존 상태도 좋고, 조형적 회화적 아름다움까지 갖춘 작품이었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하긴, 아무리 비싸고 좋다 하더라도 마음이 가지 않은 유물이 있었다.

16560253073981.jpg“이 도자기는 어떻게 얻으신 겁니까?”

16560253074008.jpg“대구에서 지인분이 갤러리를 하고 있는데, 갔더니 이 도자기가 있더라구요. 한눈에 반했죠. 1년을 설득해서 겨우 사왔어요.”

유물을 보는 신현숙의 눈에 애정이 뚝뚝 흘러넘친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아니다. 1년이나 설득해서 겨우 사 왔을 정도로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 딱히 그 마음이 식은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왜 판매를 고민할까? 슬쩍 찔러 볼까?

16560253073981.jpg“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팔고 싶지 않은 물건이겠네요.”

16560253074008.jpg“……아무래도 그렇죠.”

대답을 하는 신현숙의 낯빛이 어두웠다. 팔고 싶지 않지만 팔아야 할 사정이 있어 보인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다. 멀지 않은 곳에 신현숙을 보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불가하다. 지금은 치고 빠져야 할 때이다. 나는 재빠르게 명함을 꺼내서 신현숙에게 내밀었다.

16560253073981.jpg“혹시 찾으시는 물건 있으시면 전화 주세요.”

16560253074008.jpg“좋은 물건 있으면 연락 줘요.”

신현숙이 고갯짓을 하자 비서가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연락처는 주고받았지만 아직 저 백자를 내 손에 넣기까지는 많은 절차들이 필요했다. * ‘고미술의 밤’ 행사가 끝나고 강 회장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 비서실장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타지 않았기에 자리가 넉넉했다. 강 회장이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물었다.

16560253125435.jpg“오늘 행사 힘들었죠?”

내가 김용식에게 공격받은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16560253073981.jpg“그때는 정말 아찔했지만 재밌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좋은 유물도 많고 또 평소에 뵐 수 없었던 분들을 보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16560253125435.jpg“그중에서 단연 최고는 한서 미술관 신현숙 대표겠죠?”

나는 놀라서 움찔했지만 이내 무마용 미소를 지었다. 강 회장이 하도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서 나는 보지도 못한다고 여겼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16560253073981.jpg“네. 세한삼우를 그린 청화백자가 정말 아름답더라구요.”

16560253125435.jpg“거기에서 인물이 11명이나 그려져 있고 정말 특이한 물건이에요. 그죠?”

16560253073981.jpg“네.”

그 물건을 내가 노리고 있다는 것은 모르겠지?

16560253125435.jpg“신 대표가 물건 팔겠다고 하면 가장 먼저 가져와요. 두둑이 쳐줄 테니까.”

알고 있구나…….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애써 웃었다.

16560253073981.jpg“네. 기억하겠습니다!”

로비에서 내려서 강 회장을 배웅했다. 강 회장을 태운 차가 떠나자마자 나는 울상이 되었다.

16560253073981.jpg“내가 너무 속 보이게 행동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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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피함을 뒤로하고 나는 다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60253073981.jpg“다영아. 혹시 한서 미술관 신현숙 관장에 대해서 좀 알아?”

16560253148505.jpg[또 정보가 필요하시구만.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16560253073981.jpg“그래. 부탁 좀 할게.”

일단 신현숙이 왜 저 유물을 파려고 하는지 알아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이 잡힐 것 같았다. 신현숙은 청화백자에 애정을 갖고 있으니 결코 쉽게 판매하진 않을 터였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놓치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청화백자를 판다고 해도 내가 살 수 있을까? 최소 50억은 지불해야 하는데, 내 통장에 있는 돈은 30억뿐이다. 그러니 내가 살 수는 없고 중개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 다음 날, 이재근 회장 앞에는 막내딸인 이수지가 앉아 있었다. 집이 아닌 사무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이수지는 열에 아홉, 현성 미술관 대표에 관한 이야기라는 기대를 품었다.

16560253148512.jpg“아버지, 무슨 일로 부르신 거예요?”

16560253074008.jpg“명품 골동상 한지감, 네가 부리는 사람이라지?”

예상치 못한 이 회장의에 이수지는 당황했다.

16560253148512.jpg“네. 맞아요.”

16560253074008.jpg“일을 꽤 잘하더군.”

16560253148512.jpg“뭐. 못하진 않죠. 사실 제 전속으로 두려고 했는데 조건이 안 맞아 틀어졌어요.”

언뜻 이수지의 얼굴에 우쭐거리는 표정이 스쳤다. 한지감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착각이 변함없는 까닭이었다. 한지감이 일을 거절한 것도, 얼마 전 우연히 본 백화점에서 촌스러운 갤러리스트와 핑크빛 모드였던 것도, 이수지는 모두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이수지의 화를 면하고 싶었던 수행원의 호응이, 이러한 착각이 고착화되는 데 한몫했다.

16560253148512.jpg“조금 시간을 뒀다가 다시 제안하려구요.”

16560253074008.jpg“그래. 가까이 둬. 써먹을 데가 많겠어.”

16560253148512.jpg“그 이야기 하려고 부르신 건 아니죠?”

기대를 놓지 않은 이수지가 눈을 반짝였다. 이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16560253074008.jpg“그 이야기 하러 불렀다. 미술관에 제대로 된 유물로 채워지려면 그런 녀석이 옆에 있어야지. 알겠냐?”

이수지의 눈이 커졌다. 미술관에 제대로 된 유물을 채우는 것은 대표의 일이었다.

16560253148512.jpg“그럼 제…… 제가 현성 미술관 대표가 되는 거예요?”

16560253074008.jpg“아직 확정한 건 아니다. 하지만 네 오빠 쪽 사람보다야 네가 낫지 않겠냐.”

16560253148512.jpg“당연하죠!”

16560253074008.jpg“앞으로 계속 괜찮은 유물들을 사들여라. 그럼 어느 순간 현성 미술관 대표 자리에 네가 앉아 있을 거다.”

이수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게 사무실을 떠났다. 비서가 이 회장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16560253074008.jpg“한지감을 처리하실 생각 아니셨습니까?”

한지감 때문에 아미타불화를 도강 그룹에 빼앗겼고 ‘고미술의 밤’에서는 창피를 당했다. 뼈를 씹어 먹어도 화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 회장의 입가에 싸한 미소가 맺혔다.

16560253074008.jpg“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러면 그놈의 능력을 내가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겠지.”

이 회장은 사람의 능력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그도 옛날 사람이라 아들에게 더 마음이 갔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미타불화를 아들인 이 상무에게 맡겼다. 그런데 기회를 준 보람도 없이 이 상무가 양아치 같은 김용식을 통해 일을 진행했고 이 사달이 났다. 김용식에게 진짜를 가짜로 만들라고 했을 때는 그저 한지감을 짓밟고 강 회장이 창피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지감은 상황을 돌파했고, 이 회장에게 매우 수치스런 일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관심이 갔다. 고미술을 보는 정확한 눈, 당황스러운 상황을 대처하는 능력.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 탐이 났다. 이 회장의 얼굴을 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16560253074008.jpg“만약 한지감의 능력을 이용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16560253074008.jpg“내가 쓸 수 없다면, 남도 쓸 수 없어야지.”

이 회장의 한쪽 입꼬리가 소름끼치게 비틀어졌다. 언제라도 이 회장은 필요 없는 사람을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가질 수 없으면 아무도 가질 수 없게 망가트린다. 그것이 현성 그룹이 대한민국 1위 기업이 된 비법이었다. * 나는 다영이 사준 정장을 차려 입고 한서 미술관으로 갔다. 대표실에서 신현숙과 차를 마셨다.

16560253073981.jpg“이렇게 빨리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16560253074008.jpg“그러게요. 물건 좀 볼 수 있을까요?”

나는 상자에서 조심스럽게 흑유 편병을 꺼냈다. 높이와 넓적한 면 지름이 20cm 정도 된다. 전면에 사화철료를 두껍게 바르고 구우면 검은색 철의 변화가 나타나 흑유자기가 만들어진다.

16560253073981.jpg“16세기 호남지방에서 구워진 유물입니다. 둥근 원과 검은 유색의 느낌이 잘 어울리는 명품이죠.”

16560253074008.jpg“가격은요?”

16560253073981.jpg“팔백만 원입니다.”

정성스레 설명했지만 힘을 주진 않았다. 이곳에 온 목적은 ‘판매’가 아니다. 흑유편병은 그저 신현숙을 만날 하나의 구실이었다. 다영이 준 정보에 의하면 신현숙의 상황이 난감하다 했다. 신현숙과 임 회장에게는 무남독녀 딸이 하나 있어, 자손이라고는 외손녀 한 명이 전부였다. 이 외손녀가 곧 결혼한다. 하나뿐인 손녀이니 마음이 애틋해 한껏 챙겨서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을 터였다. 원래 재벌가에서는 딸을 시집보낼 때 귀하게 여겨 달라는 뜻으로 억대 그림을 가져간다. 신현숙은 50억대 유명 화가의 그림을 사서 주고 싶었다. 문제는 한서 그룹 현금이 말랐다는 데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바이오산업에 뛰어들면서 그룹 자금이란 자금은 다 가져가서 회사에 돈이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들어 검찰의 주시를 받고 있어, 섣불리 비자금에 손을 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기에 청화백자를 팔기 싫으면서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천천히 흑유 편병을 훑어보고 신현숙이 말했다.

16560253074008.jpg“좋은 물건이네요. 감정하고 구매 결정할게요.”

16560253073981.jpg“네.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지난번 ‘고미술의 밤’에서 본 청화백자가 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나요?”

16560253074008.jpg“전시되어 있지는 않고 수장고에 있어요. 앞으로 전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신현숙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푸념 같은 말이 나에게는 호재였다.

16560253073981.jpg“많은 사람이 명품을 보면 좋을 텐데요. 전시하기 어려운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16560253074008.jpg“……실은 판매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근데 자꾸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네요.”

내가 더 캐물을까 봐 신현숙은 눈은 피해버렸다. 나는 넉살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16560253073981.jpg“골동품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죠. 저도 그랬거든요. 처음 강 회장님 뵌 게 백자 필통 때문이었거든요. 근데 제가 마음을 많이 준 물건이라 저엉말 팔기 싫더라구요.”

내 이야기를 하자 신현숙은 이내 눈을 맞추고 물었다.

16560253074008.jpg“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16560253073981.jpg“눈물을 머금고 팔았죠. 그 필통도 소중하지만 지금은 손님들과 연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만약 청화백자 팔겠다고 결정하시면 제가 중개하는 것도 한번 고려해주세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한 경계심이 있는 사람에게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이 난다.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다가오게 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신현숙이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16560253074008.jpg“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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