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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이 회장과 선택 (1) (40/226)

40화 이 회장과 선택 (1)2021.03.03.

16560253845254.jpg“눈물을 머금고 팔았죠. 그 필통도 소중하지만 지금은 손님들과 연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만약 청화백자 팔겠다고 결정하시면 제가 중개하는 것도 한번 고려해주세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한 경계심이 있는 사람에게 밀어붙이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이 난다.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다가오게 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신현숙이 내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16560253845262.jpg“잠깐만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돌아섰다.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한 신현숙의 표정이 나를 더 긴장시켰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었다.

16560253845254.jpg“말씀하세요.”

16560253845262.jpg“청화백자…… 위탁할게요.”

예스!!! 환호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누르고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16560253845254.jpg“감사합니다.”

16560253845262.jpg“가격은 최소 오십오억 이상으로 받아주세요. 인센티브는 판매액의 10%로 하죠.”

오십오억 정도면 문제없다. 육십억은 무난하게 받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또한 강 회장이 두둑이 쳐주겠다고 했으니, 더 높은 금액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16560253845254.jpg“네, 알겠습니다. 절 선택하신 것 후회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16560253845262.jpg“기대할게요.”

인사를 하고 대표실을 나왔다. 발걸음이 날아갈 듯이 가볍다. 바로 강 회장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까? 쇠뿔도 단김에 빼지 않는가. 전화를 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수지에게서 직접 온 전화였다. 예전에도 이렇게 직접 전화가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달항아리가 바꿔치기 되었을 때였다. 왠지 이번에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16560253845254.jpg“안녕하세요.”

16560253845298.jpg[호텔 스위트룸으로 지금 당장 와. 알았어?]

그렇게 뚝 전화가 끊겼다.

16560253845254.jpg“문자로 남기면 될걸, 괜히 전화하고 난리야.”

이수지의 성질에 빨리 안 오면 다시 전화 올 것이 뻔해서, 나는 서둘러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 이수지가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도대체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치솟는 불쾌함을 간신히 누르고 물었다.

16560253845254.jpg“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16560253845298.jpg“한서 미술관 신 대표한테 청화백자 위탁받았어?”

소름이 쫙 끼쳤다. 강정휘처럼 날 감시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렇지만 겉으로는 애써 담담한 척 물었다.

16560253845254.jpg“네. 위탁받았습니다. 정보가 빠르시네요. 어디서 들으셨어요?”

16560253845298.jpg“그건 알 바 아니고.”

그게 왜 내 알바가 아니야! 나를 무시하며 이수지가 말을 이어갔다.

16560253845298.jpg“청화백자, 내가 사고 싶어.”

도강 그룹 강 회장이 예약해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기에 나는 난감해졌다.

16560253845254.jpg“죄송합니다만 이 청화백자는 이미 예약해 놓은 손님이 계십니다.”

16560253845298.jpg“도강 그룹 강 회장?”

이제는 이 소름끼치는 정보력이 새삼 놀랍지도 않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16560253845254.jpg“네. 맞습니다.”

16560253845298.jpg“나한테 팔아. 아버지가 그 물건에 관심이 있어.”

예약해 놓은 손님이 있다는데 어떻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자기가 예약해 놓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팔면 난리를 피울 거면서.

16560253845254.jpg“정말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골동상의 신용이 달린 문제입니다.”

16560253845298.jpg“한지감, 내가 지금 너한테 허락을 구하는 것 같아?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아버지야. 대 현성 그룹 이재근 회장이라고!”

이수지가 사납게 나를 몰아세웠다. 대 현성 그룹? 그러면 이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가? 빈정이 상해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말이 너무 험하게 나갈까 봐 입을 닫아버렸다.

16560253845254.jpg“…….”

16560253845298.jpg“하. 빈정이 상하셨다? 뭘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는데, 이건 감정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야.”

생존의 문제? 그게 무슨 말이야.

16560253845298.jpg“우리한테 아미타불화 사기 치려고 했던 그놈,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너한테 ‘고미술의 밤’에서 창피당한 김용식도 더 이상 업계에서 일하지 못하고.”

겨우 찾은 내 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수지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16560253845298.jpg“그래. 내 아버지, 현성 그룹 이재근 회장은 자신이 갖지 못하면 부숴버려. 그게 뭐든. 네가 예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계속 골동상으로 일하고 싶으면 행동 똑바로 해. 딱 이틀 줄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수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현성 그룹에 청화백자를 팔지 않으면 골동상으로 계속 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게도 위험해질 수 있다. 극강의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한다.’ ‘두려움은 항상 효과적인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실패하는 경우가 결코 없다.’ 지금 내가 딱 그랬다. * 다음날, 나는 가게로 출근해 창고에 도자기들의 먼지를 털어냈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좀 진정될 줄 알았는데 20점이 넘도록 내 마음은 그대로였다. 어느새 창밖을 보니 노을이 붉게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보니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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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2539021.jpg“무슨 고민 있어?”

16560253845254.jpg“……그냥 좀 마음이 답답해서 그래요.”

가게도 걸린 일이어서 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

165602539021.jpg“그래. 그럴 때가 있지.”

나는 걸음을 옮겨 창고로 갔다. 먼지를 털어낼 도자기가 더 있나 둘러보는데 구석탱이 한곳에 있는 토기장경호(土器長頸壺)가 보였다. 장경호란 못이 그릇 높이의 5분의 1이상으로 길게 붙어있는 항아리를 뜻한다. 가로 길이가 15cm, 높이가 20cm 정도 되는 통일신라시대 토기였다. [ 600,000원 | 진 | 1,000,000원 | 800년대 | 없음 ] 천 년 이상 되는 토기가 백만 원이면 구할 수 있을 만큼 싸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른다. 시장 거래 가격이 이렇게 싼 이유는 물건이 많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중엽이후부터 토기가 대량생산 되어 물량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동품 어느 가게를 가나 토기는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우리 가게에는 몇 점 없었다. 아버지가 토기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천 년 넘게 살아남은 이 물건의 경제적 가치가 이렇게 낮다는 것이 어쩐지 서글퍼졌다.

16560253845254.jpg“아버지.”

165602539021.jpg“응?”

16560253845254.jpg“저 통일신라시대 토기는 왜 사셨어요? 토기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아버지가 물끄러미 토기를 보다 입을 뗐다.

165602539021.jpg“기특해서 샀다.”

16560253845254.jpg“기특해요?”

165602539021.jpg“천 년 넘게 버텨낸 것이 너무 기특해서 샀어. 통일신라 때부터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전란이 있었냐. 셀 수도 없지. 전란을 제외하고라도 깨질 일은 많았을 거야. 손이 미끄러져서, 뒷걸음질 치다, 뭘 떨어트려서……. 그런데 천 년 동안 저렇게 버텨냈다는 것이 너무 기특했다.”

인간은 백 세도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학이 발전된 지금도 백오십 세를 바라볼 뿐이다. 저 토기는 비록 경제적 가치는 낮을지라도 정말 기특하게 천 년의 세월을 버텨낸 것이다. 버텨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스스로의 노력과 누군가의 도움, 그리고 운이 합쳐져야 한다. 나는 지금 이 위기를 버텨낼 수 있을까?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길 수 있을까? * 나는 가게에서 나와 이수지의 수행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16560253931415.jpg[결정하신 겁니까?]

16560253845254.jpg“그것 때문에 연락드린 것이 아닙니다.”

16560253931415.jpg[그럼 뭐 때문에……?]

수행원이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려왔다.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16560253845254.jpg“이재근 회장님이 제가 청화백자를 위탁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강정휘에게 미행을 당했던 경험 때문에 이것만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16560253931415.jpg[그런 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해주기 싫다면 치사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

16560253845254.jpg“지난번에 제가 에둘러 말해서 상황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잊으신 것 같습니다.”

16560253931415.jpg[그…… 그건 모두를 위해서…….]

16560253845254.jpg“지금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직접 아가씨께 말씀드릴까요? 저는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고. 저는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겠지만, 수행원님은 그러지 못할 텐데요.”

16560253931415.jpg[…….]

긴 정적을 깨고 수행원이 말했다.

16560253931415.jpg[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서 미술관에 있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16560253845254.jpg“한서 미술관에 있는 누군가요? 직원을 말하는 거예요?”

16560253931415.jpg[직원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죠. 구경하러 온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회장님 정보원은 상상 이상으로 많습니다. 회장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무리한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도 많구요.]

새삼 더 이재근 회장이 무서워졌다.

16560253845254.jpg“알겠습니다. 내일 오후 2시쯤에 찾아뵙도록 하죠.”

16560253931415.jpg[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런 말씀 그렇지만, 대한민국에서 현성 그룹을 등지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16560253845254.jpg“자살을 할 수는 없지.”

이수지의 말대로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 다음 날, 나는 A호텔에서 이수지와 마주했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16560253845298.jpg“내가 원하는 대답을 가져왔겠지?”

16560253845254.jpg“원하는 대답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수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16560253845298.jpg“무슨 소리야?”

16560253845254.jpg“회장님을 직접 뵙고 싶습니다.”

16560253845298.jpg“뭐? 네가 아버지를 왜 만나?”

나는 짜증이 가득한 이수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봤다.

16560253845254.jpg“청화백자를 원하시는 분이 아가씨가 아니라 회장님이잖습니까?”

16560253845298.jpg“그래서?”

16560253845254.jpg“구매자를 직접 만나야 팔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수지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16560253845298.jpg“미쳤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대(大) 현성 그룹 이재근 회장이야.”

16560253845254.jpg“그럼 거절로 알고 청화백자는 원래 예약자인 도강 그룹 강 회장님께 팔겠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려는데 이수지가 직접 나를 막아섰다. 눈을 부릅뜬 그녀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16560253845298.jpg“꼭 이렇게 해야겠어?”

16560253845254.jpg“네. 꼭 이렇게 해야겠습니다.”

이를 악문 이수지가 수행원을 봤다.

16560253845298.jpg“정 비서에게 전화해.”

16560253931415.jpg“네. 알겠습니다.”

수행원이 전화를 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이수지가 죽일 듯 나를 노려봤지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잠시 후, 돌아온 수행원이 어두운 표정으로 이수지 앞에 섰다.

16560253931415.jpg“지금 당장 오라고 하십니다.”

이수지가 일어섰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 현성 그룹 본사 빌딩은 도강 그룹 빌딩보다 더 높았다. 빌딩에 압도되는 느낌을 뒤로하고 나는 로비로 들어섰다. 이수지의 등장에 모든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이수지가 회사에 직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너의 자식일 뿐인데 말이다. 하지만 화가 난 그녀는 쏟아지는 인사에 관심이 없었다. 딱히 화가 나지 않았더라도 인사를 받았을 것 같진 않았다. 이수지는 게이트를 프리패스했지만, 나는 보안직원의 몸수색을 받고서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고층으로 올라갔다. 회장실 앞에 서자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 쳤다. 이수지가 별다른 제재 없이 회장실로 들어설 줄 알았는데, 생각과 달리 문 앞에 멈춰 섰다. 이 회장의 성격이 꽤 엄격한 모양이다. 3명이나 되는 수행원들이 나를 주시했다. 그중 대장격인 사람이 전화로 허락을 받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떠밀리듯 소파에 앉고 상석에 앉은 이 회장을 봤다. 그는 딸인 이수지마저도 긴장시키는 맹수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16560253845298.jpg“죄송해요, 아버지. 거의 다 이야기는 되었는데, 구매자를 꼭 만나봐야 한다고 고집을…….”

이 회장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자 이수지는 그대로 말을 멈췄다. 이 회장이 나를 뚫어져라 보면서 말을 했다.

16560253845262.jpg“날, 보자고 했다지?”

그의 눈빛은 몇십 명의 시선이 모인 것보다 파괴력이 있었다. ‘고미술의 밤’ 때처럼 눈앞이 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나는 입안의 살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제야 조심 정신이 들었다.

16560253845254.jpg“네. 뵙자고 했습니다.”

16560253845262.jpg“그래. 말해봐.”

16560253845254.jpg“청화백자를 구매하고 싶으시다구요?”

16560253845262.jpg“맞아. 빨리 넘기는 것이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위탁이고 뭐고 직접 신 대표 찾아가서 살 테니까.”

나는 이 회장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16560253845254.jpg“그러실 수는 없을 겁니다. 청화백자, 이미 제가 구입했거든요.”

오늘 아침에 신현숙에게 오십육억을 송금하고 청화백자를 가져왔다. 아주 잠깐 이 회장이 움찔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16560253845262.jpg“그러니까 이제 네놈에게 사야 한다, 이 말이야?”

16560253845254.jpg“네. 그렇습니다.”

16560253845262.jpg“원하는 것이 뭐야?”

16560253845254.jpg“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뿐입니다.”

이제 내가 진짜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할 시간이었다.

16560253845254.jpg“회장님이 원하시는 청화백자를 넘기겠습니다. 그것으로 현성 그룹과 인연은 접겠습니다.”

이수지가 버럭 소리 질렀다.

16560253845298.jpg“지금 누구 앞에서 그딴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 회장이 이수지를 보지 않은 채 손을 들어 다시 그만하라는 표시했다.

16560253845262.jpg“그러니까 선택을 하라 이거구만. 네놈과 인연을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청화백자를 선택할지.”

16560253845254.jpg“맞습니다.”

이 회장이 내게 강요했던 선택을 돌려주었다. 그가 싸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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