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이 회장과 선택 (2)2021.03.06.
“그러니까 선택을 하라 이거구만. 네놈과 인연을 계속 이어갈지 아니면 청화백자를 선택할지.”
“맞습니다.”
이 회장이 내게 강요했던 선택을 돌려주었다. 그가 싸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네놈 따위가 나에게 청화백자보다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하나?”
“회장님께서는 저 말고도 연이 닿아 있는 골동상들이 많습니다. 또한 더 많은 골동상들이 회장님과 연을 맺기를 고대하고 있겠죠. 제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은 저 자신이 더 잘 압니다.”
“근데?”
“회장님께서 청화백자를 원하시는 만큼, 제게는 제 원칙이 중요합니다. 다른 손님이 예약한 물건을 회장님께 넘긴다면 적어도 그것이 마지막이어야 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떳떳합니다.”
매서운 눈빛을 뿜어내는 이 회장의 모습은 절로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이판사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이유는 없었다.
“이런 오만함을 보이고도 골동상으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회장님께서 그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아량이라.”
이 회장이 눈알을 굴리며 나를 훑어보는데 속이 바싹 바싹 타들어 갔다.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정말 이 회장이 내가 원하는 대로 아량을 베풀어 줄 것인가. 자신이 갖지 못하면 남도 갖지 못하도록 망가트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인데도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있었다. 이번 일을 시작으로 이 회장은 모든 거래에서 자신이 제1의 우선순위를 갖기 원할 것이고, 그것이 골동상으로서 원칙을 버리는 지름길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한번 원칙을 어기면 그 다음 원칙을 어기는 것은 정말 쉬웠다. 그런 일들이 쌓이면 나는 아무런 원칙 없이 ‘돈’을 위해서만 이 일을 하겠지. 돈을 위해서 이 업계에 뛰어든 것은 맞지만, 돈만을 쫓으며 살고 싶진 않았다. 만약 내가 돈만 쫓으며 살게 된다면 돈을 많이 벌더라도 강정휘 같은 모습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런 모습의 나를 마주한다면 내 스스로를 경멸하게 될 것이다. 긴 정적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청화백자를 강 회장에게 양보하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할 것 없어. 내가 오만함을 감내할 정도로 네가 가치 있다는 것을 앞으로 보여 줘야 할 거야.”
그 정도 가치가 없다면 당장에라도 나를 무너트릴 터였다. 이 회장에게 나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만 나가 봐. 수지, 너도.”
회장실에서 나와 이수지가 나왔다. 비서들이 대기하고 있는 공간을 지나 복도로 나오자마자 이수지가 소리쳤다.
“제정신이야? 감히 너 따위가 아버지에게 건방지게 선택을 하라고 해? 그것도 나를 속여서!!”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조아리고 최대한 자세를 낮췄다. 나에게는 최선의 방어였지만 이수지 입장에서는 공격으로 느꼈을 테지. 이 정도도 감내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수지가 더 쏘아붙이려는데 저 멀리서 이곳으로 오는 중역이 보였다. 수행원이 재빠르게 이수지를 제재했다.
“아가씨 참으세요.”
중역을 본 이수지는 간신히 화를 누르고 앞으로 걸어갔다. 수행원이 나를 보고 짧게 한숨을 쉰 이후 이수지를 따라갔다. 그제서야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장문식의 생사는 확인할 수 없었으며 김용식은 이제 업계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 회장의 권력이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원칙을 위해 나와 청화백자 중에 선택하라 했다. 남이 보기에 무모하고 바보 같은 행동이란 것을 안다. 하지만 다시 이런 순간이 와도 나는 똑같이 할 것이다. * 다음 날, 나는 청화백자를 들고 도강그룹 강 회장을 찾았다. 청화백자를 보고 그는 손주를 보는 것 같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귀한 도자기가 나에게 왔네요. 고마워요. 한 선생.”
“아닙니다. 원래 예약하신 물건인데요. 저야말로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 이수지에게 가기 전 먼저 강 회장을 만났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며 열에 아홉 이 회장에게 도자기가 갈 수 있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은은한 미소를 지은 강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한 선생, 가만 보면 사람이 용감해요.”
“제가요?”
정말 의아했다. 용감하다는 말을 서른 살이 되도록 들어본 적이 없다. 공부는 잘했어도 앞에 나선 적이 없었다. 대학교 때 과대를 한 적이 있었지만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데 주력했지, 무언가 주도한 적은 없었다. 시험공포증 이후로 그런 성향이 짙어졌다.
“지난번 ‘고미술의 밤’에서 TL검사하자고 배짱 좋게 나온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잖아요. 현성 그룹 이 회장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정말 두려웠다. 이대로 고미술계에서 사장되는 것은 아닌지. 벌벌 떨고 또 떨었다. 그런데도 내가 내린 결정이 최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한 선생에게는 좋은 일인데 이거 나에게는 별로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네요. 이거 이 도자기를 마지막으로 좋은 물건 이 회장한테 다 뺏기는 거 아니에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 아주 단단한 뼈가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예약 순서는 절대적으로 지킬 겁니다.”
“한 선생이 그렇게 말하니 마음이 놓이네요.”
* 신현숙이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밝은 미소를 지었다. 청화백자의 판매가 빨리 처리되어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이렇게 물건이 빨리 팔릴 줄은 몰랐어요. 정말 고마워요.”
“워낙 희소성 있는 물건이다 보니 빨리 팔린 거죠.”
“그래도요. 강 회장님에게 도자기가 간다니 안심이에요. 인센티브는 오늘 중으로 넣어 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슬쩍 신현숙의 눈치를 보다, 해야 할 말을 위해 입을 열었다.
“오늘 미술관을 둘러보니 이기환 화백 작품이 있더군요. 아주 멋있던데요.”
“이기환 화백을 좋아해요?”
“높은 그림 가격 때문에 막연하게 알고만 있었죠. 실제로 그림을 보기 전까지는 왜 그렇게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는 동생이 갤러리에서 일하는데 이기환 화가의 작품이 25호(세로 80cm, 가로 60cm 정도)에 기본 15~20억으로 거래된다고 했을 때 정말 놀랐거든요.”
신현숙이 흥미를 가진 눈빛으로 나를 봤다.
“그런데요?”
“직접 그림을 보니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파란색으로 뒤덮여 있는데도 차갑다는 느낌보다는 바다 속 같은 따듯함이 느껴지더라구요.”
신현숙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맞아요. 정말 대단한 화가시죠. 형태가 없는데도 정확하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전달해요. 그분의 그림을 보면 철학 이전에 미술이 있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직접 보러 갤러리에 한번 가려구요. 비싼 가격이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 같아서요.”
“이기환 화가의 작품은 언제나 좋죠. 어떤 작품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직접 보게 되면 대표님께도 사진 보내겠습니다.”
“그래요.”
그 대답을 들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미술관에서 나와 곧바로 드림 갤러리로 갔다. 갤러리로 들어서니 다영이 달려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일단 사진은 보내겠다고 해 놨어.”
“잘했어요오. 흐흐!”
다영이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신현숙에 대한 정보를 그녀가 제공한 대가였다. 나는 예전처럼 식사나 술로 해결되길 바랐지만, 갤러리스트인 다영은 일적인 보상을 원했다. 신현숙 대표가 외손녀에게 줄 그림을 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그 빌미를 제공했다.
“좋냐?”
“뭐 일단 그림을 팔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 거니까요.”
“근데 이기환 화가의 작품은 어디서 받았어?”
“지난번에 전명자 작가 작품 주신 분이 또 위탁하셨어요!”
아! 기억난다. 다영이 위작 시비가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미안해하는 판매자에게 그림을 또 맡겨 달라고 했었지.
“정다영 완전히 꾼 됐네.”
“꾼은 무슨! 갤러리스트라구요!!”
“아이구 무서워라.”
눈썹까지 꿈틀거리면서 나름 인상을 쓰지만, 얼굴이 귀염상이라 전혀 무서워 보이지가 않았다.
“아! 나 그림 보여 줘.”
“네. 이쪽으로 오세요.”
다영이 작은 수장고로 나를 데려갔다. 세로 250cm, 가로 200cm 정도 되는 보라색 단색화가 보였다.
“이게 오십억이라고?”
“오십억보다 더 가치가 나가죠오.”
도무지 난 왜 이 그림이 이 정도 가격이 나가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난 잘 모르겠다. 사진이나 찍어 줘.”
내가 핸드폰을 넘기자 다영이 사진작가라도 된 듯이 열정적으로 그림을 담았다. 10장 넘는 그림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골라 신현숙에게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네. 알겠습니다. 진인사 대천명, 노력을 다하였으니 이제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 봐야죠.”
초조함을 애써 감추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풋 웃음이 났다. 웃음소리를 낸 나를 다영이 노려봐서 황급히 웃음을 지워야 했다. * 다음 날, 탑 옥션 정문으로 들어서자 단정한 차림을 한 정연주가 반기며 다가왔다.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바로 수장고로 가겠습니다.”
“네.”
정연주를 따라 수장고로 들어섰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낯선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벌써 네 번째라 그런지 익숙했다. 메이저 경매 이외에도 온라인 경매와 특별 경매 등이 있어 생각보다 자주 오게 되었다. 처음으로 정연주가 보여준 것은 백범 김구의 칠언시 서예였다. 칠언시는 한 구(句)가 일곱 문자로 된 시의 형식으로 4구인 칠언절구, 8구인 칠언율시, 구의 수가 일정하지 않은 칠언고시가 있다. 이 작품은 그중 8구인 칠언율시였다. [ 7,000,000원 | 진 | 15,000,000원 | 1940년대/ 백범 | 소장자 판매 결정 ] 내용은 아래와 같다. 莫對靑天喚奈何 歸開憂憤且狂歌 하늘 향해 어찌할 거냐 부르짖지 말고 걱정과 분노에 미치듯 노래하는 것도 깨끗이 정리하라 壯心百鍊鋤群醜 寶劒雙飛碎衆魔 장대한 마음 수백 번 단련해 뭇 추악을 솎아내고 보검을 마구 휘날려 뭇 마귀를 깨부숴라 鑄造蒼生新模範 安排黃種舊山河 온누리 새 모범을 만들어내고 황인종의 옛 산하를 안배할지니 澄淸事業尋常擧 歐亞風雲亦太和 맑게 정리하는 일은 일상으로 펼치면 동서양의 풍운이 또한 크게 화평하리라 특유의 떨림 서체가 인상적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려니 백범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데카르트가 말했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과거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유물과 마주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만든 사람의 정신이 그 안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한참 빠져 있는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정연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떤가요?”
물어보고 있지만 이미 진품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먼저 다녀간 감정위원들의 진위 여부를 통해 내 답을 유추하는 것이다.
“진품이에요.”
“네!”
정연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오면 단시간에 여러 유물을 볼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정연주의 투명한 반응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규정상 다른 감정위원들이 감정한 진위여부를 공유하진 않지만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산수화, 책가도, 백자주자를 지나 분청사기를 마주했다. 호리병 형태에 촘촘한 원형 무늬 인화(印花)문이 찍힌 분청사기였다. 인화 기법이란 도장을 찍어 생긴 홈에 백토를 발라 구워 문양을 내는 기법으로, 상감 기법을 간소화시킨 형태라 볼 수 있었다. 인화문도 자연스럽고 유색도 좋다. 당연히 진품……. [ 150,000,000원 | 위 | 180,000,000원 | 1460년대 | 소장자 판매 결정 ] 진품이…… 아니네? 하지만 크게 눈을 뜨고 이리저리 보아도 위조품의 특징들이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나만 진품이라고 생각한 건가? 그 질문이 답이 되어 줄 정연주를 보았다. 정연주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감정위원들도 나 같이 진품이라 생각한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 확대경을 들고 분청사기에 집중했다. 위조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잘 만들었다. 문양과 유약이 자연스러운 것까진 그렇다 쳐도, 어떻게 산화를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지? 화학 약품을 쓰면 자연스러운 산화와 다르게 균일한 손상이 보인다. 그런데 이건 정말 세월을 겪은 것 같이 일정하지 않은 손상이 보였다. 정연주가 내가 할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 있게 물었다.
“감정하셨나요?”
“네. 위조품입니다.”
놀란 정연주의 눈이 커지더니 동공이 흔들렸다.
“아…… 그렇군요. 혹시 위조품인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 찾아내지 못한 부분이기에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 이번 회차에 등장한 백범 김구 선생님 칠언시 해석은 칸옥션 11회 도록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인용을 허락해 주신 칸옥션 관계자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