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위조품인 이유2021.03.08.
놀란 정연주의 눈이 커지더니 동공이 흔들렸다.
“아…… 그렇군요. 혹시 위조품인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직 찾아내지 못한 부분이기에 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침착하자. 한지감. 흐릿하긴 하지만 일정하지 않은 산화를 보이는 위조품에 대해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다. 기억해내야 한다. 그래! 태토와 유약의 중간층에 부식 생성되는 물질을 넣어 자연스런 산화를 만들어낸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이 실험은 북한 과학자들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인위적인 산화가 자연스런 산화와 어떻게 다른지 그게 기억나지 않는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 호리병의 좁은 입구가 보였다. 저거다! 나는 호리병 내부를 보았다. 역시 이것까지는 처리하지 못했군!
“딱 봤을 때 인화문이나 유약의 상태가 매우 자연스럽죠. 산화도 균일하지 않구요.”
“네. 맞아요.”
“하지만 이 호리병 안쪽을 보면 겉에서 본 것처럼 산화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주 매끈하죠.”
확대경으로 호리병 안을 본 정연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정말이네요.”
“호리병 내부가 좁다 보니까 여기까지는 작업하기가 어려웠던 거죠. 이게 아니었다면 저도 깜박 속아 넘어갈 뻔했어요. 정말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위조품이에요.”
기대했던 작품인지 정연주가 눈에 띄게 힘이 빠졌다.
“위조자들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한다더니, 이렇게 눈앞에서 확인을 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대단한 눈썰미예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위조품 칼같이 잡아내 주세요!”
“네.”
스스로 대처가 흡족해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 진위감정 보고서를 읽은 황덕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그 앞에 있는 김도균은 그 상황이 언짢은 듯했다.
“한지감 감정위원이 큰일을 했네. 진위 여부를 알기 어려웠을 텐데. 안 그래요? 경매 총괄님.”
“그래. 큰일했어. 잡아내지 못했으면 그대로 출품되었을 거고, 당장은 그냥 넘어간다고 한대도 언젠가 가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회사 신용도에 큰 영향을 줬을 거야.”
“그럼 안도해야지. 그 언짢은 표정은 뭐야?”
“형이 감정위원에게 계속 집중하는 것이 꺼림칙해.”
으쓱 어깨를 올린 황덕현이 차를 마셨다.
“집중한 것이 아니라 시선이 가는 것뿐이야. 지난번 메이저 경매에서 가짜 김홍도 그림 잡아낸 것도 그렇고, 온라인 경매, 특별 경매에서도 다른 감정위원들이 못 잡아낸 위조품들을 쏙쏙 골라내니까.”
“인정해. 감정사로서 한지감의 능력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한지감이 우리 옥션에 있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도 인정하고.”
“근데?”
열이 올라오는지 김도균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근데 그 이상 얽히고 싶진 않아.”
“얽히다니? 감정위원이랑 달리 엮일 일이 뭐가 있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황덕현을 보면서 김도균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모를 것 같아? 1년 후 공개 채용에 한지감 넣을 생각이잖아. 그러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한지감을 보내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지. 아니야?”
“노코멘트 할게.”
황덕현이 새침한 태도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김도균이 솟아오르는 짜증을 간신히 참았다. 황덕현과 격의 없는 사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회사이니 참아야 했다.
“그래. 많이 꿈꿔. 형이 아무리 선견지명을 가졌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한지감이 거절할 거다?”
“요새 재벌가에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며. 1-2억은 돈으로도 안 느껴질걸. 그렇게 살다가 월급쟁이로 살고 싶겠어?”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돈이 아닌 다른 걸 추구한다면 여기에 흥미를 느낄지도 모르지.”
묘한 표정을 짓는 황덕현을 보면서 김도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김도균은 한지감이 탑 옥션에 들어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 우아한 클래식이 흐르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며 와인을 마셨다. 성공했다는 분위기에 취할 만도 했지만,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취할 수가 없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수지였기 때문이다. 어제 내가 이 회장에게 건방지게 군 일로 나를 부른 것 같은데……. 욕을 하려면 빨리 하든가, 사람 불편하게 계속 아무 말도 안 하고 음식만 먹는다.
“어때? 맛있어?”
“네. 맛있어요. 이런 멋진 곳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는 눈은 있네. 여기 예약하려면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하는 곳이야.”
미안하지만 그냥 인사치레였다. 한 달이 아니라 일 년 기다려야 하는 레스토랑이라도 이수지 너랑 오는 건 내 쪽에서 거절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이런 곳도 와 보고, 제가 운이 좋네요.”
씨익 이수지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가는데 그 모습이 뭔가 꺼림칙하다. 설마 같이 와서 좋다는 뜻으로 이해한 건 아니겠지?
“뭐 그러겠지. 앞에 나 같은 미인이 앉아있으니.”
맞구나. 더 이상 오해는 사절이다. 큰손님인 이수지가 중요하지만, 이런 찝찝한 기분으로 계속 마주할 수는 없었다.
“저…….”
“1년이야.”
“네?”
“1년 후에 아버지가 현성 미술관 관장 자리에 나를 앉히실 거야. 그 자리가 더 견고해질 수 있도록 협조해. 적어도 그 1년 동안은 희소하고 비싼 물건들을 강 회장이 아니라 나에게 먼저 가져오라는 말이야. 알았어?”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이수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죽어도 가장 먼저 가져오겠다는 소리는 안 하네.”
“죄송합니다.”
와인 한 모금을 마신 이수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 주지. 참. 그날 정장은 잘 샀어?”
“아. 네. 덕분에 잘 샀습니다. 사실 제가 사진 않았고 선물 받았어요.”
이수지가 눈을 사악 올려 떴다.
“같이 있던 그 갤러리스트?”
“네.”
“왜?”
“네?”
“사 줬으면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어째 취조 받는 느낌이 드는 건 그냥 기분 탓이겠지? 당황스러움을 뒤로하고 나는 대답했다.
“아……. 몇 번 도와준 적이 있어서 고맙다고 사 줬어요.”
“거기 정장이 일반 사회 초년생이 살 만큼 그렇게 저렴한 곳이 아닌데, 고맙다고 사 줬다……. 정말 많이 도와줬나 봐?”
내가 할 수 있는 단순한 도움을 준 것이기에 쑥스러워져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도까진 아닌데 다영이가 착해서 그런 거죠 뭐.”
“다영이…… 굉장히 친한가 보네?”
“네. 친하죠.”
“그렇구나. 친하구나.”
이수지의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아무래도 요새 계속 과음한 모양이다. 내 추측을 증명하듯 이수지가 벌컥벌컥 와인을 들이켰다. 역시 과음은 만병의 근원이다. * 다음 날, 이수지가 샵에 들러 머리까지 하고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수행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차 뒷문을 열었다. 이수지가 차에서 내리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쫙 빼입은 데다가 선글라스까지 써서 도도함의 끝에 서 있었다. 정문을 통해 들어선 곳은 바로 정다영이 일하는 드림 갤러리였다. 이수지를 본 정다영이 쪼르르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오실 줄 몰랐습니다.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도도한 미소를 지은 이수지가 쓰윽 갤러리를 둘러보았다.
“한번 와 보고 싶었어. 지감 씨와 친분도 있다고 하고. 근데 갤러리 규모가 좀 작네.”
“규모는 작아도 좋은 그림들이 많습니다. 제가 안내를…….”
이수지가 손을 들어 그만하라는 표시를 했다.
“갤러리 한두 번 다녀 본 것도 아니고, 내가 알아서 둘러보지.”
“아…… 네! 편하게 둘러보세요.”
그림 하나를 볼 때마다 이수지의 입가에는 가벼운 조소가 흘렀다. 갤러리에는 그림 가격이 쓰여 있지 않다. 가격을 알고 싶다면 직원에게 직접 물어야 한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많은 갤러리를 다녀본 이수지는 이 그림들의 가격이 대략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았다. 기껏해야 삼사백만 원 되는 그림을 파는 갤러리였다. 가장 비싼 그림이 천만 원 정도? 그런 갤러리에서 일하는 사회 초년생 나부랭이와 자신이 비교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비교도 격이 맞아야 가능하지.”
쓸데없이 신경을 썼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다. 들어올 때와 달리 한껏 유해진 얼굴로 다영을 불러 가장 비싼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이 그림 줘.”
“역시 심미안이 좋으시네요.”
“뭐. 그런 편이지. 그림은 집으로 배송해 줘. 자세한 건 수행원이 처리할 거야.”
“네!”
이수지가 돌아서려 하자 정다영이 급하게 말했다.
“혹시 전명자, 이기환 화가 작품이 들어오면 연락드려도 될까요?”
“그래. 그런 작품이 나오면 연락 줘.”
그런 작품이 이 작은 갤러리에 올 리 없다고 이수지는 확신하고 나가 버렸다. 이수지의 뉘앙스를 못 느낀 건 아니었지만 정다영은 해맑게 웃었다. 어쨌거나 그런 작품이 오면 이수지에게 연락할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수지의 수행원에게 배송 정보를 받으면서 정다영은 문득 궁금해져 나직이 중얼거렸다.
“근데 왜 온 거지?”
작은 갤러리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가는 길에 들른 것 같지도 않다. 정다영은 이수지가 한지감 때문에 왔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만약 그것을 알았다면 지금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지는 못했을 것이다. * 토요일. 나는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낮 12시가 지나도록 잤더니 머리가 띵하다. 슬슬 움직여야겠다 싶어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영이 보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빠! 신 대표님이 그림 사시기로 했어요!’ 이기환 화가의 그림 사진을 보낸 다음 날, 신현숙이 그림 속 사진을 보고 싶다는 연락을 했고, 결국 구매를 결정한 모양이다.
“기어코 해냈네.”
지난번에 전명자 화가 작품 감정할 때부터 느낀 것인데, 다영의 수완이 제법 좋다. 같은 업계였다면 무서운 경쟁자가 됐을 것이다. 답장을 쓰려는데 똑똑 문이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경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 들어가도 돼?”
“응. 들어와.”
경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형. 오늘 바빠?”
“왜 그러는데?”
“시간 괜찮으면 도자기 하나 봐줄 수 있나 해서.”
“웬 도자기?”
푹 한숨을 쉰 경환이 말을 이어갔다.
“며칠 전에 부장님이 해고됐어…….”
“너에게 잘해줬다는 그 부장님?”
몇 번 경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화도 곧잘 내지만 잔정이 많아 따로 챙겨주는 성격이라고 했다. 야근이 너무 많다 보니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부장님이 조금만 참고 일하고 경력 쌓아서 나가라고 다독였다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경환의 모습을 보니 나까지 힘이 빠졌다.
“응……. 위암 초기래……. 치료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숨겼는데, 치료기간이 길어지다 보니까 결국 회사에 들켰지 뭐. 돈이 많이 드니까 힘든 상황인가 봐.”
“그렇구나. 네가 마음이 안 좋겠다. ……도자기 종류가 뭐인지는 알아?”
“못 물어봤어. 그냥 오래 전에 선물로 받으셨다고만 알고 있어. 골동품은 아무것도 모르고 주변에 이쪽 부분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시더라구. 내가 예전에 형 이야기한 적 있거든. 그래서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봐 달라구…….”
대강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다. 현재 도자기가 유일한 동아줄인데 골동품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고 이쪽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골동품 가게는 검색만 해도 나오지만, 유일한 기댈 곳이 된 물건의 운명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불안할 터였다.
“…….”
큰 돌덩이가 마음에 떨어진 것 같은 부담감이 느껴졌다. 만약 도자기가 그 부장이 생각하는 것만큼 가치가 없다면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백 퍼센트 무너진다. 내 얼굴을 살핀 경환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해도 돼…….”
괜찮은 골동상을 소개해 줄까? 이 업계에 좋은 사람도 많지만 사기꾼도 많았다. 적어도 물건의 제값은 쳐줄 골동상이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도자기 가치 그대로 이야기할 거야. 가짜면 가짜라고, 싸구려면 싸구려라고. 알았어?”
“형! 고마워!!”
경환이 내 품에 와락 안겼다.
“징그러우니까 좀 떨어져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내 부담을 치워버리자고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의 유일한 희망을 던져버리고 싶진 않았다.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마주할 위험성이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퀭한 얼굴을 한 중년 여자가 나와 경환을 맞았다. 부장의 부인이다. 웃는데도 그늘이 져 있는 표정에서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느껴졌다.
“물건 보러 온 건데요.”
“주스랑 녹차 있는데, 뭐 드시겠어요?”
“물건 먼저 볼 수 있을까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우리를 안방으로 데려갔다. 바닥에 길쭉한 백자대호가 놓여 있었다. 높이가 60cm, 어깨 지름은 40cm 정도 되는 엄청난 크기다. [ 800,000,000원 | 진 | 1,100,000,000원 | 1710년대 | 손상 유의 ] 최고가 11억이나 되는 귀한 물건이라는 것은 좋은데, 손상을 유의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