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수월관음도 (1)2021.03.15.
“감정위원이 아닌 다른 형태는 어떠십니까?”
“다른 형태요?
“탑 옥션에서 곧 공개채용을 합니다. 인턴으로 6명 정도를 3개월간 채용할 계획입니다. 그중 3명을 정직원으로 채용할 예정이구요. 전 지감 씨가 거기에 지원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탑 옥션의 직원이 되었으면 좋겠단 말을 하는 건가?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황덕현을 봤다. 그런 나를 보며 황덕현은 편안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황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제가 탑 옥션 직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까?”
“맞아요. 물론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죠. 탑 옥션은 회사이고, 회사에는 엄연한 규칙이 있어요. 그래서 지감 씨가 지원했을 때 무조건 붙여 주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감 씨가 탑 옥션의 일원이 되기 바랍니다.”
“…….”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정리하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의문을 뱉어냈다.
“……제가 탑 옥션의 일원이 되길 바라는 이유가 감정능력 때문입니까? 아니면 재벌가와의 연이 닿아 있어서입니까?”
“둘 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에요. 감정은 유능한 감정위원을 두면 될 일이고, 탑 옥션은 지감 씨보다 더 많은 재벌들과 연을 맺고 있죠.”
“그럼 결정적인 이유는 뭡니까?”
대답을 빨리 듣고 싶어 내 속은 타 들어가는데 황덕현은 여유를 잃지 않고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옥션은 예술과 시장을 이어주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죠. 갤러리와는 또 달라요. 갤러리는 작품의 가격을 공개하지 않지만 우리는 드러내고 모두의 앞에서 경쟁을 붙여요.”
“그런데요?”
“투명하고 정확해야 하죠. 그러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듯함이 있어야 해요. 결국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니까요. 난 지감 씨가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정확하고 투명한 데다가 따듯하다고? 글쎄. 의아한 내 표정을 보고 풉 황덕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도 봐요. 투명하잖아요.”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요.”
“농담 좀 해봤어요.”
황덕현이 싱긋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지감 씨를 처음 봤을 때가 강정휘 갤러리 이수진 작가전이었어요. 기억나요?”
“네.”
“그때 직원이 실수로 연적을 깨트렸죠. 상관 안 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감 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갑작스럽게 긍재의 매 그림을 가져왔을 때, 솔직히 누군가를 기만해서 작품을 가져온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어요. 하지만 아니었죠.”
“그건 어쩌다 보니…….”
황덕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에 어쩌다 보니는 없어요. 순간순간의 선택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하죠. 지감 씨 같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많아요. 하지만 그 사람들 중에 중심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장 결정을 하라는 건 아니에요. 나에게 그런 권리도 없구요. 그저 나는 지감 씨가 탑 옥션 직원이 되는 것에 대해 고려해 주길 바라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옥션 회사의 직원이라니,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일이기에 더 얼떨떨했다. * 가게에서 일을 마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경환이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 집이 어두웠다. 불을 켜니 제법 넓은 거실이 드러났다. 아직 완전히 적응이 되지 않아 넓은 거실이 좋으면서도 당황스럽다. 사는 동네는 그대로지만 집은 옮겼다. 3개월 전에 20평대 아파트를 구입해서 들어갔다. 아버지가 이왕 사는 거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좀 더 큰 집을 사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지만, 갑자기 집이 커지면 관리하기만 어려울 것 같아 여기로 했다. 벽지만 새로 바르고 짐을 옮겼다. 넓어진 거실 때문에 소파를 사는 것 외에는 인테리어나 세간살이에 나간 돈은 없었다. 경환은 아주 당연하게 따라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에는 경환이와 같이 월세를 내는 입장이었는데 요새는 집주인 입장에서 경환에게 월세를 받는다는 점이다. 보증금은 경환이 주겠다 했지만 받지 않았다. 사정 뻔히 아는데 보증금까지 받고 싶진 않았다. 커다란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황덕현을 만나고 나서 계속 머리가 복잡하다.
“머리가 지끈지끈 거린다…….”
내가 옥션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지방에서 대학을 나왔다. 골동상에게 대학은 별 의미가 없었지만, 옥션 회사 직원에게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굳이 사람들이 의식하지 않아도,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 곁에 서면 내가 먼저 움츠러들지 않을까? 경제적 여건 면에서도 그렇다. 월급쟁이는 안정적이지만 그 선이 명확하다. 보통 사회 초년생의 연봉이 2500만 원 선인데, 한 번에 인센티브로 억 단위를 받는 내가 그 연봉에 만족할 수 있을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 나 왔어.”
퀭한 얼굴을 한 경환이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취준생 시절에도 늘 밝았던 녀석인데 격무에 시달려서 요새 힘이 없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녁 먹었어?”
“아니. 입맛이 없네.”
“그래도 먹어야지. 뭐라도 시켜 먹자.”
“그럼 죽 먹을래. 형도 먹을 거지?”
“응.”
사실 나도 입맛이 없었지만, 안 먹는다 하면 경환까지 안 먹을 것 같았다. 죽이 배달되고 나서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죽을 한 숟가락 먹은 경환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나도 보험 설계사 해 볼까?”
“갑자기 웬 보험 설계사?”
“내가 말 안 했나? 부장님 아내분이 보험 설계사로 일하시면서 돈 많이 버셨다고.”
백자대호를 이수지에게 파셨던 당사자였다. 백자대호를 판 돈으로 부장은 치료를 잘 받았고, 상태가 많이 호전된 이후에 부인이 보험 설계사로 나섰다. 부장에게 보험이 없어 겪었던 아찔한 경험들이 보험 판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분은 경험이 강해서 먹히는 거지.”
“맞아. 나는 그런 경험이 없지. 얼굴도 얇은 편이고……. 그냥 답답해서 해본 말이야.”
“회사에서 많이 힘들어?”
먹지도 않으면서 경환이 숟가락으로 죽을 뒤적거렸다.
“오래 있을 곳은 아닌 것 같아서. 곧 일한 지 1년도 되니까 다른 곳 알아보려고. 근데 막막하네. 우리 채령이 뒷바라지하려면 돈 잘 벌어야 하는데…….”
“채령이가 뒷바라지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부담감을 느끼고 그래?”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렇지. 사람들이 채령이 작품 다 봤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누군가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할 거 아니야.”
“그건 그렇네.”
“우리 채령이 요새 공부하는 거 보면 안쓰러워 죽겠어.”
화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채령은, 낮에는 작품을 그리고 밤에는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경환은 채령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빨리 자리 잡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무심코 나와 눈이 마주친 경환이 얼굴을 살폈다.
“근데 형, 무슨 고민 있어?”
“고민은 무슨…….”
퇴직을 고민하는 사람 앞에서 배부른 소리인 것 같아 말을 안 하려 했지만 계속된 추궁에 결국 털어놨다. 경환이 나를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왜 고민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렇잖아. 대학 비교당할까 봐 신경 쓰이고, 돈은 지금보다 훨씬 못 벌게 되는데 왜 고민을 하는 거냐고.”
그렇다. 생각해 보니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근데 고민이 돼.”
“그럼 탑 옥션에 끌리는 거네. 고민이 전혀 안 될 문제들이 고민이 될 정도로. 형이 어떤 것에 끌리고 있는지 확인해 봐. 그럼 답이 되지 않겠어?”
“와. 김경환 대단한데? 사회생활 1년 했다고 많이 똑똑해졌네?”
예전에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경환이 으쓱 어깨를 올렸다.
“나 원래 똑똑했어.”
“어이구, 그러셨어요.”
경환이 밝아져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계속 탑 옥션이 신경 쓰였다. 나는 탑 옥션의 무엇에 끌리고 있는 걸까? * 다음 날. 나는 도강 그룹 강 회장의 집으로 갔다. 한 달 전에 집으로 초대한 이후부터 강 회장은 나를 회사로 부르지 않고 계속 집으로 불렀다. 오후에 갔는데 집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식사시간이 지났기에 의아했는데 강 회장이 설명해주었다.
“배가 고파서 잔치국수 좀 해 달라고 했어요. 한 선생도 같이 먹어요.”
“네.”
간식거리여서인지 찬은 간소하게 김치 하나였지만 국물이 정말 끝내줬다. 날이 쌀쌀해서인지 거의 국물을 흡입하다시피 했다.
“맛이 어때요?”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그죠? 사실 이 잔치국수 뇌물이에요.”
“네?”
“다 먹고 이야기해요.”
당황한 나와 달리 강 회장과 비서실장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국수를 먹고 서재로 자리를 옮기자 강 회장이 뇌물이란 말의 뜻을 설명했다.
“처음 일 배울 때 그러더라구요. 사람은 배가 불러야 힘든 일을 시켜도 한다고.”
힘든 일을 내게 시키기 위해 일부러 국수를 준비했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러나 두려워졌지만 미소를 유지했다.
“하하하. 무슨 일을 시키실지 궁금하네요.”
“의겸이 그린 수월관음도를 가져다줬으면 좋겠어요.”
의겸은 숙종에서 영조대에 걸쳐 활동했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승이다. 강 회장이 조선시대 불화까지 관심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소장자를 알고 계십니까?”
옆에 있던 비서실장이 나서서 말했다.
“대영 기업의 하순호 대표가 소장자입니다.”
대영 기업이라면 재벌까지는 아니어도 준재벌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이다. 말을 마친 비서실장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이, 그가 완성하지 못한 일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비서실장님이 접촉하셨습니까?”
“네. 그랬지만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선생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비서실장이 계속 접촉했는데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럼 판매 의사가 없다는 건데.
“일단 만나보겠지만, 비서실장님이 계속 접촉했는데도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다면 제가 만난다고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소유 의사가 명확할 경우 저도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주인이 안 팔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게 나도 좀 이상해요. 수월관음도를 수장고에 박아 놓고 한 번도 안 가는 것 보면 딱히 소유의사가 명확한 것 같진 않은데 말이에요.”
“수장고에 박아 놓았다고요?”
비서실장이 강 회장의 말을 설명해주었다.
“수장고 시스템을 전문으로 갖춘 업체에 그림을 맡겨 놓고 한 번도 들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접촉했던 건데, 그럴 때마다 판매 거절 의사를 밝혔습니다.”
수장고에 박아놓고 한 번도 보지를 않으면서 판매는 거절한다? 이 무슨 이상한 상황이지? 감상하기엔 싫증이 나고 남 주기는 아까운 계륵 같은 상황인가. 정말 그렇다면 심보가 안 좋은 인간이다. 안타까운 강 회장이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소장자가 그 물건에 애정을 있으면 포기가 될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포기가 안 되어서 그래요.”
강 회장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귀한 유물이 그런 식의 대접을 받고 있으니 당연히 더 포기가 안 될 것이다.
“제가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유물을 소중히 여기지도 않으면서 판매도 거부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 심드렁한 얼굴을 한 하순호가 나를 훑어봤다. 60대 후반인 그는 머리가 훌렁 까지고 배가 불뚝하게 나온 영락없는 할아버지였다. 그의 시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지만 일주일 만에 성사된 미팅이었기에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유명한 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네. 재벌가만 상대한다면서?”
“하하하. 재벌가만 상대한다뇨. 저희 가게를 찾으시는 분들은 평범한 분들이 더 많으세요.”
“뭐 말이야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지금도 강 회장 심부름으로 온 거잖아.”
외모는 그렇다고 치고 사람이 꼬였다. 아니라고 정색하려다가 그냥 웃음으로 무마했다.
“수월관음도를 사고 싶다고?”
“네. 파실 생각 있으십니까?”
“…….”
하순호가 딴청을 부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팔고 싶은 건지 팔기 싫은 건지 도무지 읽을 수 없는 표정이다. 저런 태도를 취했으니 강 회장이 포기를 못 했겠지. 이곳에 오기 전 하순호에 대한 배경 조사를 했다. 왜 그림을 수장고에 박아두면서도 팔지는 않는지 그 힌트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순호는 자신의 능력으로 회사를 여기까지 키운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10년 전부터 골동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4년 전에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수집을 멈췄다고 했다. 수집을 멈추기 전에 사들였던 것이 바로 의겸이 그린 수월관음도였다. 조사한 정보 중에서 힌트가 될 만한 것은 아쉽게도 없었다.
“계속 판매를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수월관음도를 계속 소장하실 계획이십니까?”
조소가 하순호의 입가에 스쳤다.
“물건을 사놓고 보지도 않으면서 왜 갖고 있냐, 이건가?”
“그런 말이 아니라 소장의사가 명확한지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내가 그걸 자네에게 왜 말해야 하지?”
나는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정말 수월관음도를 가져가고 싶나?”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기회를 주지. 내가 물건을 팔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 그럼, 물건을 팔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