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수월관음도 (2)2021.03.17.
“그렇다면 기회를 주지. 내가 물건을 팔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 그럼, 물건을 팔겠어.”
그 이유를 내가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순호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 일부러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네. 알아내겠습니다. 2주 정도 시간을 주시죠.”
“2주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나. 일주일로 하지.”
하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것에 짜증이 났지만, 아쉬운 것은 어디까지나 나였다. 하순호가 제시한 조건에 맞춰야 한다.
“네. 일주일로 하죠.”
겉으로는 웃으며 속으로는 칼을 갈았다. 반드시 알아내서 수월관음도를 구출해내겠다! * 도강 그룹 본사 건물 안에 있는 카페에 들어섰다. 강 회장과 연을 맺고 이 건물에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카페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테이블에 세팅하는데 비서실장이 카페로 들어왔다. 비서실장의 예기치 못한 등장에 화들짝 일어나 인사하는 직원들이 보였다. 인사세례를 한참 받고 나서야 비서실장은 내게 올 수 있었다.
“한 선생님,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방금 전에 왔어요. 이제 편하게 불러주세요. 30대 초반인데 선생님으로 불리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너스레에도 비서실장은 한결같은 정중함을 유지했다.
“회장님도 예의를 차리시는 분인데, 제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그래도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비서실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비서실장을 더 불편하게 만들 수가 없어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하순호가 이상한 조건을 걸었어요.”
“이상한 조건이요?”
“자신이 수월관음도를 팔지 않는 이유를 알아내면 팔겠다고 하네요. 혹시 그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있으세요?”
한껏 더 진지해진 표정으로 비서실장이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저도 찾아내려고 했지만 못 찾았습니다. 4년 전에 수집을 그만두었을 당시 하순호의 손발이었던 회사 이사를 어렵게 찾아냈는데, 그 사람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순호가 수집을 그만두기 전에 지속적으로 물건을 팔았던 골동상이 누군지는 아십니까?”
하순호에게 지속적으로 물건을 팔았던 골동상이라면 물건을 수장고에 박아두면서도 팔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터였다. 정확히 이유를 알지는 못해도 실마리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입술을 다물었던 비서실장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식입니다.”
“제가 아는 그 장문식이요?”
“네. 아미타불화, 그 장문식 맞습니다.”
이 바닥이 좁긴 하지만 또 이런 식으로 장문식의 흔적을 마주할 줄이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상황이 내게 철저히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문식은 아미타불화로 현성 그룹 이 상무에게 사기를 쳤고 그대로 증발되었다. 그러니 장문식에게 이유를 물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골동상을 통해 알아보는 건 어렵겠군요.”
직원을 통해서도 골동상을 통해서도 알 수가 없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가족뿐이었다. 사전에 들은 정보로는 하순호의 부인은 일찍 죽었고 아들 하나가 있다고 들었다.
“아들과 하순호는 가까운 편인가요?”
“하순호가 수집을 멈춘 시기와 맞물려 왕래가 없었다고 합니다. 작은 광고회사를 운영 중입니다.”
그럼 수집을 그만둔 이유가 혹시 아들과 연관되어 있을까? 머리를 굴려봤지만 아들과 연관된 어떤 이유일지는 도무지 짐작가지 않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깨고 비서실장이 종이를 내밀었다.
“하순호 아들의 이름과 연락처입니다. 힘들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빈말이어도 힘들면 그만둬라, 회장님께는 잘 말해보겠다는 이야기가 없다. 정말 한결같은 사람이다. 쓴 웃음을 짓고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하순호의 아들 하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명품 골동상 한지감입니다. 대영기업 하순호 대표님 아드님 되시죠?”
[그런 사람 모릅니다.]
그렇게 뚝 전화가 끊어졌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눈을 깜박였다. 아버지를 모른다니.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그런 사람 모른다는 말이 바로 나오는 모습에 당황했다. 내가 물건 팔려고 전화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어보고 끊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 가게에 도착해서 몇 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황덕현의 제안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저어 재빨리 그 제안을 털어내려 했다. 일단 눈앞에 있는 이 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쩔수 없이 내가 누구고, 왜 만나고 싶어 하는지 하정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퇴근 시간을 넘기도록 답이 오지 않았다.
“아……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막무가내로 찾아갈 수도 없고.”
“그냥 이렇게 포기할 생각이냐?”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죠. 하지만 아버지를 모른다고 망설이지 않고 말할 정도의 사람이니, 막무가내로 찾아가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요.”
“그 아들에 대해서 조사는 좀 해봤냐?”
“작은 광고회사를 운영한다는 것 외에는 잘 몰라요.”
“도강 그룹에서 도와준다면 자리를 만들기는 어렵지 않겠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 회장이 아미타불화를 강하게 원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업 일을 나눠주면서까지 그 물건을 원하진 않을 거예요.”
“나눠주는 정도가 아닌 기회를 주는 정도라면?”
“기회요?”
아버지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작은 회사들은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기회를 주는 정도라면 도강 그룹에서도 그렇게 불편해하지 않을 거다. 그 아들이라는 사람도 연을 맺어두면 좋으니 혹할 만한 이야기고.”
“그렇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곧바로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틀 후. 나는 하순호의 아들인 하정민과 만났다. 하정민의 회사에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비서실장에게 어렵게 허락을 맡고 문자를 보냈더니 3분도 지나지 않아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말대로 작은 회사에서는 그런 기회조차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40대 중반인 하정민은 볼똑 튀어난 뱃살, 탈모가 진행중인 머리가 아버지인 하순호를 연상시켰다. 하지만 분위기는 딴판이었다. 무언가 속을 알 수 없는 느낌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던 하순호와 달리, 하정민은 담백한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오늘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온 것도 아닌데요. 지난번에는 그렇게 전화를 끊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골동상이라고 해서 저도 모르게 예민해졌어요."
‘골동상’이라고 해서 예민해졌다니. 장문식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실마리가 되는 정보일 수도 있다.
“골동상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으십니까?”
“딱히 그렇다기보다…….”
하정민이 힘겨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물을 한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4년 전에 제가 운영하는 회사가 힘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돈 부탁을 했습니다. 직원들 월급만이라도 줄 수 있도록 오천만 원이라도 빌려달라구요. 하지만 아버지는 빌려주지 않으셨죠. 2-3억짜리 도자기는 막 사들이면서 말입니다.”
흔들리는 하정민의 눈동자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짐작하게 했다. 내가 하정민이라도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수월관음도를 사자고 가정사를 들춘 것 같아 미안했다.
“민감한 이야기를 물어봐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싫었다면 여기 나오지 말았어야죠.”
“혹시 아버지께서 왜 수월관음도를 수장고에 두기만 하고 팔지는 않는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어요.”
“수집을 왜 멈추셨는지도요?”
“네. 그 전에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서…….”
“그렇군요…….”
의도와 다르게 가정사를 헤집기까지 했는데 도움이 될 정보가 없다니 아득해진다. 더 이상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아버지 집에 마지막으로 갔던 날 어떤 큐레이터분이 왔었어요.”
“큐레이터요?”
“네. 집에 오셨을 때 아버지가 잠깐 소개시켜 주셨어요.”
“성함을 기억하십니까?”
하정민은 미간까지 찌푸리며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요. 이성운? 이상훈? 그런 뉘앙스의 이름이었어요.”
“왜 그분을 만나셨는지 말씀하시던가요?”
“아니요. 아버지는 저에게 그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으셨어요. 자신의 생각을 가족들하고도 공유하는 분이 아니셨거든요.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일방적으로 말하셨죠.”
“그렇군요. 말씀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하정민이 말한 큐레이터가 키를 가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큐레이터를 만나면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한서미술관 주차장에서 차를 대고 내렸다. 몸은 관장실을 향하면서도 내 눈은 계속 핸드폰에 고정되었다. 오늘까지가 하순호가 준 마지막 기한이다. 문제는 아직 하정민이 말한 그 큐레이터가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내에는 국립과 사립 박물관이 꽤 많았고, 해외에 나간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수가 제법 되었다. 거기에다 큐레이터에 대해 확실한 것은 이씨 성을 가졌다는 것뿐이라, 도강 그룹에서 애를 먹고 있었다. 관장실에 들어서자 신현숙 대표가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바쁜 사람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미안하긴요. 저야 좋죠.”
오늘 신현숙이 나를 부른 이유는 곧 미술관에서 열리는 조선 도자기 전시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위조품이 있을까 봐 나를 부른 것이다. 차를 마시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신현숙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면서 5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왔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낀 남자는 학구적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신현숙이 남자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이번 전시회 기획하신 인문성 총괄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 저도 반갑습니다.”
“인 총괄이 안내해 줄 거예요.”
“이쪽으로 오시죠.”
인 총괄의 안내에 따라 나는 수장고로 갔다. 20점이 넘는 도자기들이 있었다.
“이 도자기들을 감정해 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청화백자로 된 육각 연적이었다. [ 3,000,000원 | 진 | 4,500,000원 | 1850년대 | 없음 ] 화초를 그린 청화색이 영롱했지만 바닥부분이 깔끔하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 중간쯤 감정을 하였을 때 물고기를 음각한 분청사기와 대면했다. 나팔 같은 입구와 풍만한 몸체를 지닌 전형적인 술병이었다. [ 60,000,000 | 진 | 6,500,000원 | 1480년대 | 손상 유의 ] ‘손상 유의’라는 메시지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호흡을 통해 겨우 가라앉혔다. 일단 금이 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가볍게 두드려 봐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십니까?”
“금이 갔다고 의심되는데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서요.”
“하셔도 되는데, 최대한 조심스럽게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가볍게 두드리자 맑은 소리가 아닌 둔탁한 소리가 난다. 역시 어딘가 금이 가 있다.
“이 도자기는 보수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그냥 전시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감사합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짓고 다시 감정을 했다. 2점만을 남겨두었을 때 높이 50cm 정도 되는 덮개가 있는 백자가 보였다. 달항아리처럼 문양은 없다. 언뜻 보면 진품처럼 보이지만 위조품이다. [ 40,000,000원 | 위 | 50,000,000원 | 1980년대 | 없음 ]
“이건 위조품이네요.”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유약은 18세기인데 형태는 16세기예요. 굽도 모래받침이어야 하는데 내화토 받침이구요.”
“아. 그렇네요.”
감정을 모두 마치고 나자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눈에는 계속 ‘손상 유의’가 뜬 분청사기가 밟혔다. 부디 수리를 받고 ‘손상 유의’가 없어지길 바랄 뿐이다. 수장고에서 나오며 인 총괄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한 선생님 아니었으면 가짜가 전시 될 뻔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박물관에서도 일해 봤지만, 한 선생님처럼 이렇게 정확하게 위조품과 수리가 필요한 유물을 집어내시는 분은 정말 학계에도 흔치않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웃음으로 넘기려는데 박물관에서 일했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하정민이 말했던 이름과도 비슷한 느낌이 들어,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런 나를 보고 인 총괄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 혹시 대영기업 하순호 대표님과 4년 전쯤에 만나신 적 있습니까?”
“그걸 어떻게…….”
놀란 인 총괄의 눈이 커졌다. 나는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하고 물었다.
“실례인 줄 알지만, 하순호 대표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하 대표님의 개인적인 문제라 곤란하군요.”
인 총괄이 난처한 듯 입을 닫았다. 하지만 나는 어떡해서든 인 총괄의 입을 열어야 했다.
“정말 하 대표님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의겸의 수월관음도는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가 높은 유물입니다. 그런 유물이 몇 년째 수장고에만 박혀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상황이 안타깝지 않으십니까?”
인 총괄의 입을 열기 위해 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이기도 했다. 수장고에만 두기엔 그 유물은 너무 아까웠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인 총괄이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