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전시회 (1) (47/226)

47화 전시회 (1)2021.03.20.

16560255823677.jpg“저를 부르신 건 박물관에 필요한 부분들을 상의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6560255823682.jpg“박물관이요? 하 대표님이 사립 박물관을 만들 계획을 하셨습니까?”

16560255823677.jpg“네. 맞습니다. 오랫동안 꿈꿔 오신 일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문제가 있었죠.”

슬픈 인 총괄의 눈, 그리고 주로 거래했던 골동상이 장문식이라는 것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예상이 갔다.

16560255823682.jpg“사들인 대다수의 유물이…… 위조품이었군요?”

16560255823677.jpg“네. 맞습니다. 전시 기획 위주로 업무를 하는 제가 보기에도 뭔가 이상한 유물들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아는 감정위원을 소개시켜 드렸고, 소유물 120점 중 중 90%가 위조품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하정민이 하순호가 기본 2-3억짜리 도자기를 사들였다고 했다. 120점의 90%면 108점이다. 그중 절반인 54점만 2억이라고 가정해도 최소 108억의 손해를 본 것이다. 1-2억 손해를 본 것도 머리가 돌아갈 지경인데 108억이나 손해를 봤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하순호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어 했다.

16560255823682.jpg“돈도 돈이지만, 박물관을 만들려고 했으니 마음의 상처가 더 크겠군요.”

16560255823677.jpg“맞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왜 수장고에 박아두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지. 수월관음도는 하순호에게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는, 무너져버린 꿈이다. 팔고 싶은 생각도 들었겠지만, 오랜 염원이 만들어낸 미련 때문에 그러지도 못했을 터였다. 인 총괄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16560255823677.jpg“이유를 말한다고 하 대표님이 그 유물을 파시진 않을 겁니다.”

16560255823682.jpg“왜죠?”

16560255823677.jpg“하 대표님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친 장문식이 어떻게 그 이후로도 멀쩡히 골동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그 정도 손해를 끼쳤으면 진작에 매장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아미타불화를 팔기 전까지 장문식은 멀쩡했다.

16560255823682.jpg“이유가 뭡니까?”

16560255823677.jpg“하 대표님의 엄청난 자존심 때문입니다. 위조품이라는 것을 알고 장문식에게 갔더니, 그는 뻔뻔하게도 안목이 없는 전주 잘못이라며 하 대표님 탓을 했습니다. 소문이 나면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겠냐면서요.”

100억이 넘는 손해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더 중요시한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무너진 꿈을 들켜버린 사람에게 물건을 팔려고 할까? * 하순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를 훑으며 물었다.

16560255823677.jpg“이유는 찾으셨나?”

16560255823682.jpg“아니요. 찾지 못했습니다.”

16560255823677.jpg“그거 정말 안타깝구만. 이거 어쩌나 모처럼 팔 기회가 온 줄 알았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되어 버렸네.”

살살 약을 올린다. 순간 욱해서 이유를 말해버릴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묘한 미소를 지었다.

16560255823682.jpg“아드님도 알지 못하는 이유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굳어지며 눈썹이 꿈틀거렸다.

16560255823677.jpg“내 아들을 만났나?”

16560255823682.jpg“네. 당시 주로 거래했던 골동상은 연락이 되지 않아 불가피하게 아드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16560255823677.jpg“내 아들과 연락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안 했어.”

16560255823682.jpg“하지 말라는 이야기도 안 하셨죠. ‘이유’를 찾으라고 하셨지.”

논리에서 밀린 하순호가 분한 듯 입술을 다물었다. 고소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말을 이어갔다.

16560255823682.jpg“그나저나 곧은 신념에 감명받았습니다.”

16560255823677.jpg“곧은 신념?”

16560255823682.jpg“4년 전에 아드님 회사가 직원들 월급 주기도 힘든 상황인데 돈을 빌려주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16560255823677.jpg“…….”

멈칫한 하순호가 재빠르게 표정을 지워냈다. 하순호가 당시 아들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을 거라 예상했는데, 역시 맞았다. 나는 모르는 척 말을 이어갔다.

16560255823682.jpg“한 회사의 수장으로 책임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시려는 의도 아니십니까. 제 아버지도 저에게 일을 가르치실 때 아주 엄하셨죠. 가르치실 때뿐만 아니라 골동품과 관련된 일이면 유독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7살 때 가게에서 과자를 먹었다 엄청 혼이 났죠.”

16560255823677.jpg“그런 부분이 있어야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지. 여기까지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 혼자 힘으로 왔네. 내 아들도 그러길 바랐어.”

16560255823682.jpg“훌륭하십니다.”

어느새 하순호는 불쾌함을 지워내고, 몰랐던 아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던 척하며 훈수를 두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것들을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바란다. 그 부분을 칭찬하면 다른 불쾌함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다.

16560255823682.jpg“말씀하신 대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으니 물건을 팔지 않으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안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6560255823677.jpg“말해봐.”

16560255823682.jpg“아드님에게서 대표님이 전시회를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화를 판매하신다면 대표님 이름으로 고미술 전시회를 열겠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모는 비용과 유물은 강 회장님이 부담하실 겁니다.”

박물관을 만들고 싶었지만 사기만 당하고 산산이 조각났던 꿈을 전시회로라도 대리만족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하순호가 눈알을 굴리면서 나를 본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낼 수가 없다. 팔겠다고 말해라! 그의 입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내 주문이 통했는지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16560255823677.jpg“생각해 보고 알려주겠네.”

16560255823682.jpg“알겠습니다. 토요일까지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과연 만만치 않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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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일 오전. 하순호에게 연락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거실에서 서성였다. 소파에 늘어져서 TV를 보던 경환이 인상을 썼다.

16560255909791.jpg“혀엉. 정신 사납게 왜 자꾸 왔다 갔다 해?”

16560255823682.jpg“받아야 할 연락이 있으니까 그렇지. 넌 데이트하러 안 나가냐?”

16560255909791.jpg“토요일이잖아. 우리 채령이 애들 가르치느라 바빠.”

허공을 본 경환이 쓸쓸한 표정을 지어 미안해졌다.

16560255823682.jpg“그렇네. 깜박했다. 오늘 모처럼 밖에 나가서 농구할래?”

대학에 다닐 때는 농구를 즐겨했다. 졸업하고 불분명한 미래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잘 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16560255909791.jpg“됐어. 귀찮아. TV 보면서 좀 쉴래.”

틀어놓은 TV에서는 사돈 지간에 뺨 때리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자극적인 장면이건만 경환은 반응하지 않았다. 딱히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멍 때리고 있을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안쓰럽게 경환을 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하순호에게서 온 전화였다.

16560255823682.jpg“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6560255823677.jpg[그랬나.]

느릿하게 말하는 투가 아주 신경에 거슬린다. 하순호는 자신이 우위에 있는 이 상황이 매우 즐거운 것 같았다.

16560255823682.jpg“네. 결정하셨습니까?”

16560255823677.jpg[했지. 그게 말이야…….]

바로 말해주면 될걸, 뜸을 들이다가 겨우 말했다.

16560255823677.jpg[전시회 제대로 기획해서 가져와.]

16560255823682.jpg“그 말씀은…… 판매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16560255823677.jpg[전시회가 내 마음에 흡족하게 잘 끝나야 유물을 넘길 거야.]

16560255823682.jpg“감사합니다. 대표님.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16560255823677.jpg[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고 또 뜸을 들이는 건지 불안해졌다.

16560255823682.jpg“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대표님.”

16560255823677.jpg[……고마워.]

16560255823682.jpg“네?”

16560255823677.jpg[아들에게 연락이 왔어. 덕분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순호는 전화를 쌩하니 끊었다.

16560255823682.jpg“의외로 부끄럼이 많나 봐.”

16560255909791.jpg“기다리던 연락 온 거야?”

16560255823682.jpg“응. 팔겠대.”

16560255909791.jpg“오오. 역시 형이야. 근데 왜 고맙다고 한 거야?”

16560255823682.jpg“아. 아들한테 연락이 왔대.”

나는 간단하게 하순호와 하정민의 상황을 설명했다.

16560255823682.jpg“지난번에 하순호 만나고 나와서 아들에게 연락했어. 아무래도 하순호는 아들의 상황을 몰랐던 것 같다고 말이야.”

하정민은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고 부정했지만, 기억을 더듬더니 하순호가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자신이 오해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해가 되는 것이, 당시 하순호는 100억 이상의 사기를 당했고 그로 인해 오랜 꿈도 산산이 부서졌다.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16560255823682.jpg“주제 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잘 풀려서 다행이야.”

16560255909791.jpg“와아. 형. 이제 가족 상담사 역할도 하는 거야?”

16560255823682.jpg“가족 상담사는 무슨.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하지 마라. 욕 먹어.”

잘 해결된 것 같아 다행스러웠지만 내 마음은 아주 가볍지만은 않았다. 나는 털썩 소파에 앉았다. 경환이 물끄러미 나를 보다 물었다.

16560255909791.jpg“좋은 일도 한 사람이 얼굴이 왜 그래?”

16560255823682.jpg“그냥, 좀 복잡해서.”

16560255909791.jpg“옥션 제안 받은 거 때문에 그래?”

16560255823682.jpg“응. 경환아. 너 나랑 동기인 이현준 생각나?”

오랜만에 꺼낸 옛날이야기에 경환이 활기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60255909791.jpg“당연히 기억나지. 빨리 식는 핫팩으로 유명했잖아. 자기가 찍은 여자에게 엄청 저돌적으로 나가다가 여자가 막상 마음 열면 식는 걸로……. 왜, 연락 왔어?”

16560255823682.jpg“아니…… 그냥 생각나서.”

16560255909791.jpg“형, 현준이 형 싫어했잖아. 사람 마음 갖고 장난치는 쓰레기라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60255823682.jpg“그랬지. 근데 졸업하기 전에 걔랑 한번 술을 마셨거든? 그때 걔가 만취해서 그러더라. 엄마가 어렸을 때 집을 나갔다고. 나가기 전날 엄마가 정말 잘해줬대. 좋아하는 고기반찬에 새 옷에……. 그래서 여자가 잘해주면 이상하게 마음 식는다고 그러더라.”

16560255909791.jpg“그게 무슨 개소리야. 자기 연민에 취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16560255823682.jpg“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짜증나게, 요새 걔가 이해되려고 그러네.”

16560255909791.jpg“그런 거 이해하지 마.”

경환이 미간을 찌푸리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경환을 보면서 잠시라도 웃을 수 있었다.

16560255823682.jpg“알겠다. 이해 안 한다. 안 해!”

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자 경환이 의아한 눈으로 봤다.

16560255909791.jpg“어디 가게?”

16560255823682.jpg“좀 뛰어야겠어.”

16560255909791.jpg“나도 같이 갈까?”

16560255823682.jpg“됐어. 임마. 넌 쉬어.”

오랜만에 운동화를 신고 근처 공원으로 가서 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뛰다가 점점 속도를 올렸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순호가 박물관을 만들고 싶었지만 도리어 사기만 당한 것을 알고 마음이 복잡했다. 비로소 내가 왜 황덕현의 제안을 고민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후로 내가 원하는 조직에 속한 적이 없었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고, 공무원도 되지 못했다. 좋은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다니고 싶었지만 시험 공포증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그 실패가 거부당했다는 의식을 만들어냈다. 강렬히 원했지만 거부당한 기억, 그것이 황덕현의 제안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조직에 들어가고 싶으면서도, 이번에도 거부당할까 봐 무서웠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그 마음을 잘라내지도 못한다. 박물관을 만들 꿈을 접었으면서도 수장고에 수월관음도를 가지고 있는 하순호처럼 말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멈추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16560255823682.jpg“하아…… 하아…….”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다음 날. 나는 황덕현의 집으로 찾아갔다.

16560255823682.jpg“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16560256019103.jpg“아니에요. 안 그래도 지감 씨 연락이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대영 하순호 대표를 전시회로 설득해서 강 회장에게 수월관음도를 팔았다구요?”

16560255823682.jpg“아직 판 건 아니고 팔 예정입니다. 먼저 전시회가 잘 진행되어야죠. 정보가 빠르시네요.”

이제는 별로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내가 한 행동은 누가 어디선가 카메라로 찍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16560256019103.jpg“내가 정보가 빠른 것이 아니라, 지감 씨가 유명해서 그래요.”

16560255823682.jpg“제가요?”

16560256019103.jpg“당연하죠. 모든 정보들이 그렇게 공유되진 않아요. 지감 씨는 말하자면 미술계 셀럽인 거죠.”

16560255823682.jpg“하하하. 농담이지만 기분이 좋네요.”

16560256019103.jpg“농담 아니고 진짜인데 안 믿네.”

차를 한 모금 마신 황덕현이 말을 이어갔다.

16560256019103.jpg“하순호 대표에게 해 주기로 한 전시회는 어떻게 진행할 거예요?”

16560255823682.jpg“갤러리에서 일하는 동생이 있어서 맡기기로 했어요. 고미술에 관련한 것만 부분적으로 제가 돕구요.”

어제 다영에게 전화를 걸어서 의향을 물었더니 바로 하겠다고 했다. 강 회장에게서 유물을 받아 진행하기에, 직접 강 회장을 볼 일까진 없어도 비서실장과 안면을 틀 기회는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작용했다.

16560256019103.jpg“재미있네요. 판매 조건으로 전시회가 붙은 건 처음 보는 일이라서 흥미로워요.”

16560255823682.jpg“날짜가 확정되면 대표님께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6560256019103.jpg“네. 기대할게요.”

이제 슬슬 제안에 대한 내 결정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입이 잘 안 떨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황덕현이 물었다.

16560256019103.jpg“내 제안 생각해 봤어요?”

16560255823682.jpg“네. 생각했습니다.”

16560256019103.jpg“결정하기 쉽지 않죠? 일단 수입이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상황이니 말이에요.”

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16560255823682.jpg“네. 돈이 연연하는 건 아니지만, 수입이 확연히 줄어드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요. 탑 옥션에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도 두렵구요. 또 합격한다 해도 제가 탑 옥션이란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판단이 되지 않습니다.”

16560256019103.jpg“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죠.”

고개를 끄덕거리는 황덕현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16560255823682.jpg“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대표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6560256019103.jpg“전혀요. 고민하지 않고 내린 결정은 흔들리기 쉬워요. 그래서, 결정했어요?”

16560255823682.jpg“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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