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분실 위험 (1)2021.03.24.
[ 80,000,000원 | 진 | 110,000,000원 | 1590년대 | 분실 위험 ] 분실 위험이…… 있다고? 소상팔경은 중국에서 11세기부터 그려진 그림으로, ‘소상’은 지금의 후난성 창스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중 팔경은 보통 산시청람(山市晴嵐), 어촌석조(漁村夕照), 원포귀범(遠浦歸帆), 소상야우(瀟湘夜雨), 연사만종(煙寺晩鍾), 동정추월(洞底秋月), 평사낙안(平沙落雁), 강천모설(江天暮雪)을 가리킨다. 화폭에는 이 모습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16세기 후반의 작품인데도 보존 상태가 좋은 거까진 정말 좋은데, 분실 위험이라니…….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그림이죠?”
최 교수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았다.
“아……. 네 그렇네요. 16세기 그림인데도 보존 상태도 좋구요.”
“한 사장이 판 그림이니 어련하겠어요.”
“판매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판매할 생각은 없어요. 대여는 가능해요.”
“네. 참고하겠습니다.”
안방에 있는 다른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거실에 있는 것보다 전반적으로 값이 더 나갔다. [ 50,000,000원 | 진 | 50,000,000원 | 1870년대 | 분실 위험 ] [ 30,000,000원 | 진 | 32,000,000원 | 1740년대 | 분실 위험 ] [ 40,000,000원 | 진 | 42,000,000원 | 1720년대 | 분실 위험 ] 소상팔경도와 같은 분실 위험이다. 저 유물들까지 대여할 생각은 없으니, 유물을 옮기거나 전시회장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하나, 도난이다. 전문 털이범이 안방으로 와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이다.
“최 교수님, 이 그림들 보험은 되어 있나요?”
“보험비가 비싸잖아요. 하나둘도 아닌데 일일이 감정 받고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기가…….”
하긴 재벌들도 자신 개인 소유의 유물에 대해서 보험을 들지 않는다. 물론 그쪽은 돈이 아까워서라기보다는, 유물을 외부에게 노출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이다. 골동품의 경우 보험사에서 가격을 평가하기 위해 감정을 진행해야 해서 보험사 직원이 유물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 도난품이 나온다거나 그것은 아니더라도 유물의 소유주 이동이 확인되는 날에는 껄끄러운 문제가 발생한다. 뇌물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죠. 그럼 보안은 따로 하시나요?”
“아니요. 노인 혼자 사는데 보안을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골동품을 생각해서라도 보안을 따로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하.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너무 걱정이 많네.”
“그래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볼게요.”
가볍게 대답하는 모습이 진지하게 여기는 모습은 아니었다. 여태까지 별문제가 없으니 앞으로도 별문제가 없으리라 안일하게 생각한다. 더 말하려다가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입을 닫아버렸다. * 탑 옥션의 프리뷰 장소가 오늘은 전시회로 탈바꿈했다. 탑 옥션은 프리뷰 기간을 제외하면 장소를 대여할 수 있었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다영도 나도 여기에 올인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어서 각자의 일이 끝난 저녁에야 만났고,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했다. 전시회 제목은 ‘진경산수화, 아름다운 도전’이었다. 전시회 초반에는 관념산수화인 소상팔경 8폭이 한 폭씩 차례로 있었고, 그 섹션을 지나면 겸재로부터 시작된 진경산수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20점 내외의 크지 않은 규모였지만 나름 알찬 구성이었다. 관념산수화 섹션에 있는 소상팔경은 하순호의 수장고에 수월관음도와 함께 있던 몇 안 되는 진품이었다. 최 교수가 소유한 소상팔경이 훨씬 회화적인 가치가 높았으나, 분실의 위험성과 엮이고 싶지 않아 하순호의 것으로 하기로 했다. 하순호가 주최하는 전시회이기에 본인 소유 유물이 하나쯤 들어가는 것이 모양새가 나을 것 같았다. 다영은 거의 울 것 같은 눈으로 전시회를 바라봤다. 한 달 동안 잠을 줄여 가면서 만든 전시회였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톡 다영의 어깨를 찔렀다.
“너 거의 울겠다?”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요?”
“지금. 네가.”
“우는 거 아니거든요?”
발끈한 다영의 모습이 웃겼다. 다영은 웃기고 전시회는 잘 준비되었는데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든다. 이 찜찜한 기분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걸까? 그때 하순호가 아들 하정민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다영이 재빠르게 하순호에게 다가갔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대표님, 어서 오세요.”
“오셨습니까.”
“그래. 다영 씨도 지감 씨도 수고 많았어. 어디서부터 둘러보면 되는 거야?”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다영의 안내를 따라 하순호와 하정민이 함께 움직였다. 오프닝 리셉션이 시작할 시간이 되자 하순호와 하정민 회사의 직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사회자가 행사의 시작을 알리고 소감을 묻기 위해 하순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하순호가 모처럼 환한 얼굴로 말했다.
“‘진경산수화, 아름다운 도전’에 와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진경산수화는 관념산수화와 다른 우리의 강산을 그렸습니다. 그 뚜렷한 차이에 대해 보여드리고 싶어 이런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꼭 자기가 기획한 것처럼 이야기하네.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은 진즉에 하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영 기분이 별로였다. 하순호는 자신에게 취해 말을 이어갔다.
“그림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우리의 산천을 보시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소감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정말 하순호의 이야기가 감명 깊어서 그렇다기보다, 대다수가 하순호와 하정민의 회사 직원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하순호의 기분은 매우 좋아졌다. 오프닝 리셉션이 끝나자 나는 슬쩍 하순호에게 다가갔다. 원래대로라면 전시회가 끝나는 내일 수월관음도를 받아가기로 했지만, 이렇게 기분이 좋다면 오늘도 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강 회장님이 목이 빠지게 수월관음도를 기다리고 있기에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셨어요.”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줄 몰랐어.”
하순호는 꿈을 꾸는 눈빛으로 전시회장을 둘러봤다.
“대표님, 오늘 그림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오늘?”
“네. 강 회장님이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하셔서요.”
다른 곳을 보며 하순호가 딴청을 부리자 나는 짜증이 올라왔다. 짜증을 삼키고 난감한 목소리를 내었다.
“원래 여기 대여 자체가 어렵습니다. 일주일 단위로만 대여를 해준다는 곳인데 강 회장님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저희 편의를 봐줬습니다. 그러니 대표님께서도 하루 정도만 양해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알겠어. 손님들에게 인사만 하고, 곧바로 수장고로 가지.”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들어서 곧바로 강 회장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전시회를 마친 저녁, 나는 하순호와 함께 수장고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강 회장의 비서실장을 마주했다. 하순호를 본 비서실장이 깍듯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도강 그룹 비서실장입니다. 저희 사정을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사는 사회에서 서로 돕고 살아야죠.”
마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답하는 하순호의 태도에 기가 찼지만, 그것보다도 수월관음도를 다시 볼 생각에 설렜다. 소상팔경 그림을 가지러 왔을 때 짧게 봤던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수장고 문이 열리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수월관음도를 볼 수 있었다. 세로 140cm, 가로 100cm 정도 되는 크기였다. [ 600,000,000원 | 진 | 1,900,000,000원 | 1730년대 | 소장자 판매 결정 ] 고려시대에는 수월관음도가 많이 그려졌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눈에 띠게 줄어들어 희소성이 있었다. 구도는 전체적으로 유사하지만 색채나 형태 등은 많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가장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정면을 바라보는 관음의 시선이다.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비서실장이 툭툭 어깨를 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포장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아. 시작하시죠.”
비서실장과 함께 들어온 전문 업체 직원들이 포장을 시작했다. 그림을 짧게 봐서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포장이 끝나고 전문 업체 직원들이 그림을 들고 일사불란하게 빠져나갔다. 마지막에 남은 비서실장이 하순호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가세요.”
비서실장이 가자 나도 그만 가야겠다는 생각에 인사를 하려는 때였다. 가만히 나를 보던 하순호가 말했다.
“평범한 사람도 상대한다고 했지?”
“네. 당연하죠.”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그럼, 앞으로 나도 몇몇 유물들을 부탁하고 싶은데.”
“어떤 유물들을 원하십니까?”
“보물급 유물이었으면 좋겠어.”
그의 흐뭇한 미소에서 나는 왜 그가 보물급 유물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박물관을 세울 궁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까 전시회에 몰린 많은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방아쇠 역할을 했다.
“네. 그런 유물 있으면 대표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하순호 자체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다영과 한 달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 나는 초초하게 방 안을 서성이며 핸드폰을 힐끗거렸다.
“연락 올 때가 됐는데…….”
오늘이 바로 탑 옥션 서류합격 전형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지이잉, 핸드폰이 울리자 나는 빛의 속도로 핸드폰을 잡았다. 액정을 확인한 내 얼굴에 실망감이 차올랐다. 다영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빠도 아직 연락 못 받았죠? 저만 그런 것 아니죠?’
‘그래. 나도 못 받았다.’
답장을 얼른 보내고 책상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다시 지이잉 소리가 들렸다. 다영인 줄 알고 확인했던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탑 옥션에서 보낸 문자였다. ‘서류전형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이후 면접 일정에 관하여는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나는 방을 박차고 나가 설거지를 하던 경환의 어깨를 마구 잡고 흔들었다.
“와아아! 합격이야! 합격이라고!”
“정말? 축하해, 형! 형은 해낼 줄 알았어!”
경환은 자신의 일처럼 함께 기뻐해주었다.
“이제 1차 면접 보면 되는 거지?”
“맞아. 면접.”
면접이란 말에 갑자가 시무룩해졌다. 여러 면접관들의 시선이 쏠릴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메슥거렸다. 내 생각을 읽은 듯 경환이 말했다.
“뭘 걱정하고 그래? 골동상 하면서 시선 집중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잘 넘겼잖아.”
“이건 면접이잖아……. 부담감이 달라.”
“나도 한 건데 형이 왜 못해!”
경환의 응원에도 나는 웃지 못했다. 지난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시선이 몰리는 상황이 힘든 것은 여전했다. 그저 운 좋게 공포증이 발현할 상황을 피했던 것뿐이다.
“정 불안하면 오늘부터 내가 면접관이 될게!!”
“뭐?”
“완전 압박 면접을 할 테니까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어이가 없어서 금방 웃어버렸다.
“알았어. 잘 부탁한다.”
나에 대한 걱정을 접고 나니, 다영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지금쯤이면 다영도 분명 문자를 받았을 텐데 소식이 없다. 설마…… 떨어진 건가?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었다.
“다영아. 문자 받았어?”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떨어졌나 보다.
“부…… 불합격이야?”
[……오빠는 합격했어요?]
얼마나 다영이 탑 옥션 직원이 되고 싶었는지 알기에, 답하기가 너무 미안했다. 그렇다고 대답을 피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응……. 합격했어.”
[……나도요.]
“응?”
[나도 서류 합격했다구요!]
쾌활한 다영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려왔다. 장난이란 것을 알고 나는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야! 뭐 이런 걸로 장난을 쳐. 방금 내가 얼마나 미안했는 줄 아냐?”
[에이. 하나도 안 미안했으면서어. 내가 오빠를 몰라요?]
“와아 진짜 정다영. 지금 보니까 사람이 못됐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고 전화 받는 나를 대신해 경환이 나갔다.
[전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거든요.]
“그게 고급정보 알려준 오빠에게 할 소리냐?”
[네에. 할 소리예요.]
다영과 투닥거리는데 경환이 툭툭 어깨를 쳤다. 고개를 돌리니 경환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찰이 왔어.”
현관을 보니 열린 문 사이로 험상궂은 얼굴을 한 사내 두 명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다영아. 나 지금 손님 오셨어. 응. 나중에 전화할게.”
통화를 끊고 현관으로 다가가자 사내 한 명이 내게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마동 경찰서 이정세 형사입니다. 한지감 씨 맞으십니까?”
“네.”
“최석훈 씨 아시죠?”
“네. 저희 가게 손님이십니다.”
최석훈은 최 교수의 이름이다. 질문한 형사가 나를 눈빛으로 압박하며 말했다.
“최석훈 씨 집에서 골동품 4점이 도난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