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근현대 미술 (1)2021.03.31.
[1단계 구매가격이 제공됩니다.] [ 1,700,000,000원 ] 지금…… 근현대 작품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한 거지? 멍해져 있는데, 뒤늦게 나를 발견한 다영이 달려왔다.
“오빠. 괜찮아요?”
“어……. 응.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얼굴이 새하얀데. 안되겠어요. 당장 응급실로 가요.”
작은 몸으로 다영은 한참 큰 나를 낑낑거리며 부축했다. 나는 중심을 잡고 섰다.
“나. 정말 괜찮아. 잠깐 머리가 어지러웠던 거뿐이야.”
“그게 바로 이상 신호라구요!”
“내일도 이상하면 내 발로 병원 갈게. 진짜야.”
내 말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다영은 입을 앙다물었다가 말했다.
“정말 약속하는 거죠?”
“정말이야.”
“전화해 볼 거예요.”
팔짱을 끼고 무서운 표정을 짓는 다영의 모습이 꼭 어른인 척하는 아이 같아 웃음이 났다.
“아이구. 제가 전화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장난하지 말구요. 꼭 전화해요.”
“한다니까. 마저 둘러보자. 응?”
“알았어요.”
우리는 다시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단색화로 유명한 이기환 화가의 그림이었다. 세로 가로 80cm, 60cm 정도의 캠퍼스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 1,900,000,000원 ]
“어떻게 이 그림을 19억에 사냐.”
“어떻게 알았어요? 이 그림이 19억인 거.”
“그거야…….”
당황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추정가가 기재된 곳을 보았다. 하지만 거기엔 ‘추정가 별도 문의’라고 적혀 있었다. 다영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기억 안 나? 신현숙 대표에게 이기환 화가 작품 팔라고 니가 주입시켜 준 정보잖아. 25호면 15-20억이 기본이라며.”
“아! 맞다. 그랬죠. 기억나요.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오?”
어째서인지 다영의 목소리에 애교가 뚝뚝 떨어진다. 내가 자기 말을 기억해서 기분이 좋은 건가?
“그러게 말이다. 나도 신기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무사히 넘겼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 다영과 헤어지고 나는 아버지가 있는 본가로 가서 근현대 작품이 보이는 이 상황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제 근현대 미술까지 메시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네. 고미술에 한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좀 당황스러워요. 여태까지 안 보였는데 왜 갑자기 보이기 시작하는 걸까요?”
“1년 동안 근현대 미술 그림을 많이 봤니?”
“많이까진 아니지만 전시회에 가끔 갔어요. 책도 몇 권 읽었구요. 하지만 정말 수박 겉핡기식이에요. 그림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모르구요.”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아버지가 정적을 깨고 말했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 왔는데, 이젠 말해줄 때가 된 거 같구나. 안경의 전 주인인 서동효, 그러니까 서인범의 아버지는 부동산 재벌이었다.”
“부동산 재벌이요……?”
막연하게 전주인도 골동상을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
“안경의 힘으로 그렇게 될 수 있었지. 부동산의 가치를 볼 수 있었던 거야.”
“그럼 전 왜 골동품 가격이 보이는 걸까요? 부동산이 아니라.”
“골동품집 아들이잖아.”
“네? 그게 무슨…….”
“내 생각은 이렇다. 처음 안경에 메시지가 뜨려면, 그 대상군에 대한 축적된 정보가 있어야 하는 것 같구나.”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이다.
“아버지 말씀대로라면 처음 제가 안경을 썼을 때 유물의 가격들이 보인 건…….”
“그래 여태까지 네가 계속 골동품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지. 만약 네가 주식을 보고 자랐다면 거기에 대한 정보들이 보이지 않았겠냐.”
“그렇군요…….”
안경을 쓴 건 사고였지만, 골동품의 정보가 보인 건 필연이었다. 혼란스러움이 가시자 다음 단계에 대한 기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고미술 마지막 단계가 지나고 이제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돈을 모았지만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짜릿함을 느낄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근데 이제 그것이 가능해졌다.
“어째 싫지만은 않은 눈치구나.”
“아…… 아쉽기는 하죠. 당연히. 근현대 미술은 메시지와 상관없이 순수하게 볼 수 있었던 영역이니까요. 하지만…… 옥션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입장에서, 근현대 미술 정보를 볼 수 있다는 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잊지 마라. 안경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이다. 안경을 벗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안다.
“언제 안경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말도 되죠. 안경을 벗는 방법을 아는 누군가에 의해서 안경을 빼앗길지도 모르죠. 알아요.”
“그럼 됐다.”
아버지가 툭툭 내 어깨를 치셨다.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가 싫어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근데 솔직히 좀 아쉬워요.”
“뭐가 말이냐?”
“아버지가 부동산하셨으면 안경 썼을 때 저도 부동산 정보가 보였겠죠? 그럼 부동산 재벌 됐을 거 아니에요. 그럼 훨씬 돈도 많이 벌고, 가게 건물도 살 수 있었을걸요.”
과장된 내 말투를 보고 아버지가 픽 웃었다.
“정 아쉬우면 지금부터라도 건물 보고 다녀라.”
“정말 그럴까요? 에이, 그래도 사내놈이 의리가 있지. 부동산이 아니라 골동품집 아들로 태어났으니까 끝까지 미술로 승부할게요.”
“내 아들이 이렇게 의리가 깊은 줄 몰랐구나.”
“생각보다 저에 대해서 많이 모르시네요.”
아버지가 소리를 내서 웃으셨고, 나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 때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만 가볼게요.”
“조심해서 가거라.”
인사를 하고 집에서 나왔다. 밤거리를 터덜터덜 걷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안경이 없어진 후가 두렵다. 안경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안경이 보여주는 정보가 없다면 어떻게 될지 솔직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뭐.”
걱정만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안경이 필요 없어도 될 만한 실력을 키워야 한다. * 입을 꽉 다문 강정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 비서를 쏘아봤다.
“또 허탕이야?”
“죄…… 죄송합니다.”
김 비서가 고개를 조아리면서 강정휘의 눈치를 봤다. 벌써 1년째 서인범의 뒤를 쫓고 있지만 그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원래 그의 근거지이던 서울역에는 예전에 김 비서가 찾아간 이후 나타난 적이 없다. 흥신소에 의뢰하였지만 핸드폰과 카드를 쓰지도 않아 추적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급한 대로 서인범의 가족인 척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SNS 등으로 제보를 받았지만 막상 확인해 보면 서인범과 닮은 사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강정휘가 신경질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김 비서에게 던졌다. 핸드폰은 아슬아슬하게 김 비서를 스쳐 지나갔다. 김 비서는 욱하는 감정이 들었지만 가족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아 넘겼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죄송해? 죄송하면 그 빌어먹을 놈을 내 앞에 데려오란 말이야!! 그걸 못하면 안경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데려오든가!”
비밀스러운 안경의 존재를 아는 사람을 도대체 어디서 데려오란 말인가. 말이 되지 않다는 것을 강정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난리를 피우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서인범을 자신 앞에 데려오라는 협박이었다. 오랫동안 강정휘를 대한 김 비서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강정휘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 김 비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더 몸을 낮추고 비굴해지는 것 하나뿐이다. 김 비서는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십시오. 반드시 서인범을 찾아내서 대표님께 데려오겠습니다.”
“한 달, 딱 한 달이야. 알았어? 그때까지도 서인범을 못 찾아오면 각오해.”
“네. 알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만 나가!”
김 비서가 황급히 일어서 사무실에서 나왔다. 비굴한 표정은 어디로 가버리고 자존심에 생채기가 난 성난 수컷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을 보자, 성난 수컷은 일자리가 간절한 가장으로 돌아왔다.
“서인범을 찾으면 그뿐이야. 반드시…… 반드시 찾아낸다……!”
* 알람이 울리지 않았는데 눈이 절로 떠졌다.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니 아직 밖은 푸르스름했다. 오늘은 탑 옥션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긴장해서 늦게 잠이 들었고 그마저도 선잠이었다. 그런데도 긴장해서인지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잠시 후. 경환의 방문이 열리더니 화려한 까치집을 지은 경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오늘 면접이잖아.”
“아. 맞다! 근데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잖아.”
“그냥. 눈이 떠졌어.”
경환이 물을 마시며 나를 살폈다.
“형. 긴장했구나?”
“응……. 머리가 새하얘질까 봐 무서워.”
“안 하얘져. 며칠 동안 나랑 압박면접도 연습했잖아.”
경환은 퇴근해서 파김치가 되어서 들어오면서도 나를 위해 면접 연습을 해주었다. 그런 경환의 마음이 고마웠다.
“고맙다. 김경환. 면접 잘 끝나면 한우 사줄게.”
“됐어. 보증금도 안 받는 집주인인데 내가 그 정도 못할까. 형이 잘할 거라 믿지만, 못 해도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실패해도 형의 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 고맙다.”
실패한다 해도 나는 골동상으로서 다시 살아가면 그뿐이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은 채 후회로 남기고 싶진 않았다. * 면접 대기실에는 스무 명이 넘는 지원자들이 하나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만 이곳이 직장인 듯 편안하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강민수가 여기 올 줄이야.”
다영이 속삭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 알아?”
“알죠. 유명하거든요. 한국대 경영학과 출신인데 졸업하자마자 세원 갤러리로 들어갔어요.”
“세원 갤러리면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는 곳이잖아.”
“네. 그렇죠. 거기에서 인센티브 가장 많이 받았대요.”
“그런데도 여기 왔구나.”
한국대 경영학과에 세원 갤러리라니,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느낌이 든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다영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쫄지 마요. 면접은 기 싸움이라구요!”
“안 쫄았거든.”
나는 마음과 달리 겉으로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 지금처럼만 해요. 그럼 되는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아.”
“내일도 면접 있다니까 이 정도 숫자가 더 면접을 보겠죠?”
“그러겠지?”
이틀 동안 면접을 보는데 나와 다영은 같이 첫날에 보게 되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서류 파일을 든 정연주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호명하는 분들 면접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한지감, 강민수.”
놀라서 벌떡 일어서는 나와 달리 강민수는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면접은 가나다순 아닌가? 하필 들어가도 강민수랑 같이 들어가냐고. 불안함을 삼키며 정연주 앞으로 가서 섰다. 정연주는 안내하면서 강민수 모르게 살짝 눈인사를 했고 나는 미소로 응했다. 면접실에 들어서니 대기실과 비교할 수 없는 숨 막히는 공기가 느껴졌다. 얼어붙은 몸으로 자리에 착석했다. 면접관 자리에는 싸늘한 표정을 한 김도균과 스타 경매사로 알려진 서정선이 앉아 있었다. 서정선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키가 큰 모델 같은 느낌의 소유자였다. 서정선의 미소가 이 면접실에서 유일한 온기였다. 날 스치는 김도균의 눈빛에는 달가워하지 않은 감정이 명확하게 담겨 있었다. 그는 내가 이곳에 들어오지 않기 바란다. 감정위원인 것은 상관없어도, 탑 옥션의 직원으로는 날 원하지 않는다. 예상은 했지만 이런 상황에 저런 눈빛을 마주하니 목뒤에 뻣뻣해졌다. 서정선이 싱긋 웃고 말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강민수 씨부터 해주세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 경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한국대 학사 과정에 예술 경영은 따로 없어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미술사를 했습니다. 탑 옥션이 예술 경영에 대한 제 오랜 꿈을 이뤄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지원하였습니다.”
“그렇군요.”
서정선은 흐뭇한 미소 지었고, 김도균은 나쁘지 않다는 듯 강민수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에게 넘어왔다. 나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골동품집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고미술을 접했습니다. 고미술품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 지원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서정선과 달리 김도균은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고미술 팀에서 일한다고 고미술만 다루지 않습니다. 고객은 고미술 스페셜리스트에게도 근현대 미술을 묻고, 근현대 미술 스페셜리스트에게도 고미술을 묻죠.”
“근현대 미술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김도균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가더니 정연주에게 눈짓을 했다.
“그럼 이 유명한 그림들에 대해서 당연히 알고 있겠군요.”
정연주가 강민수와 나에게 각각 프린트물을 나누어주었다. 나누어준 프린트물에는 각각 다른 그림이 있었다. 강민수가 든 프린트물에 있는 그림은 다빈치가 그린 ‘살바도르 문디’였다. 신비로운 느낌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내 프린트물의 그림은 수영하고 있는 남자가 있고 다른 남자가 그 남자를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지켜보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 본적이 있다. 언젠가 다영과 이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머리가 하얘져서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김도균이 나를 보고 물었다.
“한지감 씨. 그 그림의 작가와 제목을 말씀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