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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마대호 화가 (1) (54/226)

54화 마대호 화가 (1)2021.04.05.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울렸다. 탑 옥션에서 온 전화였다. 떨리는 손으로 나는 전화를 받았다.

16560258025982.jpg“여보……세요?”

16560258025988.jpg[안녕하세요. 탑 옥션입니다. 한지감 씨 되십니까?]

16560258025982.jpg“네 맞습니다.”

16560258025988.jpg[1차 면접 결과를 알려드리려고 전화드렸습니다.]

16560258025982.jpg“네.”

전화기 너머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찰나의 시간이 피가 마르도록 길게 느껴졌다.

16560258025988.jpg[1차 면접에 합격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16560258025982.jpg“감사합니다.”

16560258025988.jpg[이후 일정은 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뚝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16560258025982.jpg“와! 기분 째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발신인은 다영이었다. 다영도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혹시 다영이 불합격했을지도 모르니 나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16560258025982.jpg“어. 다영아.”

16560258054101.jpg[오빠! 저 1차 면접 합격했어요! 오빠는 당연히 합격했죠?]

16560258025982.jpg“추…….”

축하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서류 전형 때 다영이 장난쳤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축하를 전하는 목소리를 연기했다.

16560258025982.jpg“축하……해. 다영아. 진심이야.”

심상치 않은 느낌에 다영의 목소리가 확 수그러들었다.

16560258054101.jpg[오빠……. 혹시 떨어……졌어요?]

16560258025982.jpg“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되어서 기뻐.”

누가 들어도 면접에 떨어져 실의에 빠진 목소리였다. 1년 동안 손님 앞에서 필요에 따라 연기를 했더니 연기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16560258054101.jpg[오빠……. 죄송해요. 저는 당연히 되셨을 줄 알고…….]

웃음이 키득키득 새어나와 핸드폰을 손으로 가렸다. 더 놀리고 싶었지만, 자칫하면 뒷감당을 하기 어려웠다.

16560258025982.jpg“……괜찮아. 나도 1차 합격했으니까.”

16560258054101.jpg[네?]

16560258025982.jpg“나도 합격했다고!”

다영이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0258054101.jpg[진짜 뭐예요! 실수한 줄 알았잖아요!]

16560258025982.jpg“뭐긴 뭐야. 지난번 복수다.”

16560258054101.jpg[치사하다! 아, 분해!]

16560258025982.jpg“나도 지난번에 분했단다.”

16560258054101.jpg[쳇! 연장자가 아량이 없어.]

구시렁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다영의 표정이 자연히 연상되어서 나는 픽 웃음이 났다. 그게 다영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

16560258054101.jpg[아주 기쁘신가 봐요?]

16560258025982.jpg“좀 웃겨서.”

16560258054101.jpg[진짜 못 됐다! 분하다, 분해!]

16560258025982.jpg“그만 분해하고 2차 면접 준비 잘해. 꼭 같이 되자.”

16560258054101.jpg[골려 먹을 때는 언제고, 왜 갑자기 훈훈한 척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영의 목소리는 누그러져 있었다.

16560258025982.jpg“왜긴 왜야. 너랑 같이하고 싶어서 그렇지. 최종 면접, 정직원 계약까지 아직 갈 길이 멀긴 하다만, 같이 옥션 다니게 되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도움도 줄 수 있을 테고.”

16560258054101.jpg[뭐.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야 낫죠오.]

다영의 목소리가 어느새 애교스러워졌다. 통화를 끊고 다시 한번 서울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2차 면접만 합격하면 탑 옥션에 들어간다. 남들이 보기에 고작 인턴 신분이었지만 내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조직에 들어가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가슴이 뜨겁게 벅차오른다. 탑 옥션의 일원이 되고 싶다. * 황덕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서정선을 보았다. 서정선은 오랜만에 황덕현과 독대하는 자리라 긴장하고 있었다. 서정선이 긴장한 것이 무색할 만큼 황덕현은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16560258114456.jpg“이번 면접 많이 힘들었죠?”

16560258114462.jpg“힘들었어요. 한 자리 TO 생길 때 3-4명 인터뷰하는 거랑은 스케일이 다르잖아요. 이틀 동안 면접만 봤는데, 정말 나중에는 진이 빠져서 일어서기도 힘들더라구요.”

서정선은 힘들다는 말을 하면서도 특유의 쾌활함을 잃지 않았다.

16560258114456.jpg“수고 많았어요. 12명에게 1차 면접 합격 통보를 했다구요?”

16560258114462.jpg“네. 인턴으로 6명을 뽑을 거니까 1차 합격은 2배수로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서요.”

16560258114456.jpg“2차 면접에서 반을 떨어트리면 되겠군요.”

2차 면접은 황덕현이 참석하는 임원면접을 뜻한다.

16560258114456.jpg“실무진이 고생한 덕분에 저와 최 이사는 고생 안 해도 되겠네요. 고마워요.”

16560258114462.jpg“당연히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찻잔을 다시 든 황덕현이 한 모금 차를 마셨다. 그 모습에 서정선이 살짝 긴장을 풀자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16560258114456.jpg“의견 충돌이 있었다구요?”

표정 관리에 실패한 서정선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그녀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16560258114462.jpg“네. 있었어요. 총괄님이 이렇게 완고한 분이신 줄 몰랐어요. 물론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 많이 답답했습니다.”

16560258114456.jpg“어떤 지원자 때문에 그랬나요?”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물꼬를 트기 위한 질문일 뿐이다. 많이 힘들었던지 서정선은 술술 털어놓았다.

16560258114462.jpg“대표님도 아실 거예요. 감정위원으로 있었던 한지감 씨요. 학벌은 다른 지원자에 비해 떨어지지만 고미술에 대한 지식도 많고, 의외로 근현대 미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더라구요. 태도도 좋았구요. 그런데 총괄님께서 자꾸 한지감 씨는 기본적인 자격이 되지 않는 지원자라고 떨어트리려 하시더라구요.”

16560258114456.jpg“상사와 의견 충돌이라. 한 수 접어주지 그랬어요?”

민감한 사안을 이야기하는데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듯 황덕현은 편안했다.

16560258114462.jpg“웬만하면 그랬겠죠. 그런데 면접 방식도 그렇고, 그냥 넘길 수 없는 것들이 있었어요. 저만 한지감 씨가 스페셜리스트로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 팀장님도 같은 의견이었어요. 그런데 자꾸 기본 자격이 안 된다 같은 말만 반복하시니까 납득하기 어려웠구요.”

16560258114456.jpg“그랬겠군요.”

황덕현이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60258114456.jpg“결국 서 팀장과 지 팀장이 이겼네요.”

16560258114462.jpg“총괄님이 한 수 접어 주셨죠.”

말이 한 수 접은 거지, 사실상 거의 밀어붙여서 얻은 결과였다. 몇 시간 동안 격한 회의를 통해 다수결로 결정하기로 했다. 투표권자는 김도균, 서정선, 지 팀장, 온라인 팀장인 이 팀장까지 4명이었고, 이 팀장의 표를 가져오면서 김도균은 패했다. 서정선이 황덕현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16560258114462.jpg“대표님은 총괄님이 왜 그러시는지 알고 계세요? 정확하신 분이 이번에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하겠어요.”

16560258114456.jpg“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해요?”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면서 황덕현은 대답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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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258114462.jpg“총괄님과 오래된 사이시잖아요.”

16560258114456.jpg“오래된 사이라도 모르는 부분이 있죠.”

16560258114462.jpg“그렇죠.”

서정선이 차를 마시자 황덕현도 따라 마셨다. 찻잔에 가려진 황덕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 팀장이 한지감에게 우호적일 거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서정선마저 자신의 편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 항상 한지감은 기대 이상을 해내서 기대를 만족시켰고,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보여줄지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 다음 날, 나는 와유첩을 사기 위해 세원 갤러리로 향했다. 와유첩의 소장자가 바로 세원 갤러리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화이트 큐브 형태의 널따란 내부가 보였다. 강정휘 갤러리, 드림 갤러리와는 그 규모 자체에서 확연히 달랐고 그래서 더 위압감이 느껴졌다. 몇 번의 경험이 있는데도 갤러리 문턱을 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다.

16560258173619.jpg“어떻게 오셨습니까?”

고개를 돌리니 강민수가 서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 알아봤다.

16560258173619.jpg“어.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탑 옥션 면접 뵈었던 분 맞죠?”

16560258025982.jpg“네. 맞아요.”

16560258173619.jpg“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그림 보러 오셨나요?”

나를 아래위로 훑는 모습에서 내가 그림을 사러 왔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지만 비즈니스를 하러 왔으니 참아야 한다.

16560258025982.jpg“대표님을 뵈러 왔습니다.”

16560258173619.jpg“대표님을요?”

경계심 어린 표정이 나를 잡상인 보듯 한다. 욕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16560258025982.jpg“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16560258173619.jpg“아……. 잠시 기다려 주세요.”

믿을 수가 없는지 갸우뚱거리더니 그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마친 강민수는 갑자기 공손하게 말했다.

16560258173619.jpg“이쪽으로 오시죠.”

강민수의 안내를 받으며 대표실로 들어섰다. 책상에 앉아있던 임병규 대표가 나를 보고 일어서 악수를 청했다.

16560258203513.jpg“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차, 드시겠습니까?”

16560258025982.jpg“네.”

50대 초반인 그는 키가 크고 풍채도 좋았다. 인상은 자체는 선했지만 주름진 얼굴이 지나온 세월의 굴곡을 말하는 듯 했다.

16560258203513.jpg“차 두 잔 부탁하네.”

16560258173619.jpg“네. 대표님.”

강민수는 이 상황이 마땅치 않은 듯 가짜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잠시 후. 차가 테이블에 올라오자 임병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6560258203513.jpg“의아하셨을 테죠. 왜 제가 만나자고 했는지.”

16560258025982.jpg“네. 굳이 저를 지목하신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16560258203513.jpg“짧은 시간 내에 고미술 업계의 유명 인사가 되셨더군요.”

16560258025982.jpg“운이 좋았죠.”

임병규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말을 이어갔다.

16560258203513.jpg“살다 보니 운처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저도 이 자리에 그렇게 앉았으니까요. 하지만 한 선생이 한 일들은 운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퇴우이선생진적첩’, 고려 ‘아미타불화’, 최근 의겸의 ‘수월관음도’까지…… 단순히 유물을 사고 파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서설이 긴 걸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16560258025982.jpg“일개 골동상에게 과한 칭찬이십니다.”

16560258203513.jpg“과하다니요. 한 선생은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 재주, 제가 이번에 좀 빌려 쓰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16560258025982.jpg“……네?”

유물을 사러 왔는데 내 재주를 빌려 쓰고 싶단다. 이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상황을 파악해야 하기에 나는 황당함을 뒤로하고 물었다.

16560258025982.jpg“정확히 어떤 일을 저에게 맡기고 싶으신 겁니까?”

16560258203513.jpg“마대호 화가라고 아십니까?”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창피하긴 하지만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다.

16560258025982.jpg“아니요. 모릅니다. 제가 근현대 화가 쪽은 잘 몰라서요.”

16560258203513.jpg“그게 당연합니다. 한 선생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대부분 모르는 화가죠. 미술 전공한 사람들도 거의 모를 겁니다. 이번에 갤러리에서 그분의 그림을 전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작품의 소유자인 막내 따님이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16560258025982.jpg“그러니까 제가 막내 따님을 설득하길 원하신다는 겁니까?”

16560258203513.jpg“네.”

다른 건 둘째치고라도 나는 마대호 화가에 대해서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소유자를 설득한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16560258025982.jpg“저는 골동상입니다. 무엇보다 마대호 화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그 따님을 설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다른 분이…….”

16560258203513.jpg“다른 사람은 이미 많이 보내봤습니다. 이건 마대호 화가를 알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문제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임병규의 눈빛이 간절해 난감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 마음을 눈치챈 임병규가 정점을 찍었다.

16560258203513.jpg“마대호 화가의 작품을 갤러리에 건다면 ‘와유첩’을 팔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16560258025982.jpg“알겠습니다. 해보죠. 하지만 장담은 드리지 못합니다.”

거래를 하겠다는 식으로 나왔다면 거절할 생각이었다. 고서화가 아닌 그림을 내게 부탁하는 것 자체가 마뜩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옥션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서인지, 임병규의 간절함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일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대호의 막내딸이 왜 작품을 주는 것을 거부했는지 궁금해졌다. 일단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면 팔릴 확률도 높고, 그렇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것은 의미 있을 터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아버지의 작품이라 팔고 싶지 않은 걸까?

16560258025982.jpg“막내 따님이 전시회를 거절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임병규의 얼굴이 눈에 띠게 어두워졌다.

16560258203513.jpg“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이 일이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겠죠.”

16560258025982.jpg“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하길 꺼려하는 모양새를 보니 덩달아 불안해졌다.

16560258203513.jpg“……납북입니다. 마대호 화가는 납북 당했고, 북한에서 선전화를 그려 훈장을 받았습니다.”

‘납북’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다면 왜 막내딸이 전시회를 꺼려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납북이든 월북이든 북한에서 마대호 화가는 공로를 세웠고, 남북이 극한 대치를 하는 상황 속에서 가족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런 그림을 대중 앞에 꺼내놓는다는 자체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설득하기 어렵겠는데……. 먼저 물어보고 받아들일걸……. 경솔했다.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솔직하게 말할까? 그런 고민을 하는데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 48시간 내에 마대호 화가의 전시 허락을 받으면 2단계 정보가 공개됩니다.] 왜 하필 미션이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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