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탑 옥션 (1)2021.04.14.
멍하니 핸드폰을 보는데 요란하게 벨소리와 함께 발신인이 표기되었다. 탑옥션이다. 입이 바싹 마른다. 그토록 기다렸던 전화인데, 막상 전화가 오니 받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안 받을 수는 없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 한지감입니다.”
[안녕하세요. 탑 옥션입니다. 인턴 최종 합격여부 말씀드리려 연락드렸습니다.]
“네.”
[축하합니다. 합격하셨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합격했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탑 옥션에 들어간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실실 웃음이 난다.
“이거 꿈 아니지?”
혹시나 꿈일까 싶어 볼을 세게 잡아 당겼다. 아팠다.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자 다영이가 생각났다. 다영이는 합격했을까? 나는 다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섯 번 정도 통화연결음이 반복되고 나서 다영이 전화를 받았다.
[오빠. 합격되었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죠?]
“응. 합격했어?”
[오빠 먼저 말해요. 합격했는지 아닌지.]
“내가 먼저 물었잖아.”
[엄밀히 말하면 제가 먼저 선수 쳐서 물었고, 오빠가 대답한 거죠.]
가끔 다영은 쓸데없이 정확했다.
“그래. 나 합격했다. 말했으니까 이제 너도 말해.”
[맞춰 봐요오.]
기분 좋은 다영의 목소리가 합격했다 말했다.
“합격했구나?”
[네! 저도 합격했어요! 우리 같이 탑 옥션에 다니는 거예요!]
“진짜 이런 날이 오네! 정다영, 잘 부탁한다아.”
[저도 잘 부탁드려요. 오빠. 우리 잘해 봐요.]
“그래.”
인생의 새 페이지가 펼쳐졌다. 새 페이지에는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 최고의 내용들을 담고 싶었다. * 김도균이 벌컥 문을 열고 대표실로 들어섰다. 뒤늦게 이 비서가 김도균을 붙잡고 말렸다.
“총괄님, 지금 대표님은 처리하셔야 할 일이…….”
태연하게 서류를 보던 황덕현이 이 비서를 보고 말했다.
“괜찮으니까 나가봐.”
“죄송합니다.”
이 비서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김도균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한지감을 붙이고 싶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아? 인턴 6명을 뽑을 걸 7명을 뽑는 것이 말이 돼?”
한지감과 정다영 한 명은 떨어트려야 하는 상황에서 황덕현은 두 명 다 채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인턴 기간을 통해 누가 더 옥션에 맞는지 확인해 보면 된다는 의도였다.
“왜 안 되지? 정직원으로 채용되는 인원 3명은 공고에 명시되었지만 인턴은 인원이 명시되지 않았어. 인턴 인원 같은 경우 임원회의를 통해 그 명수를 늘릴 수도 있고, 나는 규정을 어기지 않았어.”
조소가 김도균의 입가에 스쳤다.
“규정을 어기지 않았다고 떳떳한 건 아니지. 한지감이 아니었어도 형이 그런 결정을 했을까?”
“그래. 한지감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르게 행동했을 거야. 한지감은 그 정도로 탐나는 인재니까.”
“인성을 갖추지 못한 인재는 재앙이야.”
김도균이 눈을 부릅떴고, 황덕현은 답답함을 느꼈다.
“왜 그렇게 한지감에 대해서만 예민하게 반응해. 선재 때문이야?”
김도균의 눈동자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너답지 않은 일을 계속 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형은 그때도 내가 예민하게 군다고 그랬어.”
“도균아…….”
김도균이 손을 들어 황덕현의 입을 막고,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래. 한지감 합격시킨 것은 형의 권한이라고 치자. 하지만 한지감이 경매팀에 있는 이상, 걔를 훈련시키는 건 나야. 한 달 만에 자기 발로 나가게 만들어 줄 거야.”
그 말을 마치고 김도균은 쌩하니 돌아서 대표실을 나갔다. 눈을 질끈 감은 황덕현이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김도균은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총괄님…… 총괄님!”
이 비서가 부르며 쫓아왔지만 김도균은 들리지 않는지 계속 걸어 내려갔다. 그러다 이 비서가 어깨를 붙잡고 나서야 인기척을 느끼고 멈춰 섰다.
“총괄님.”
“…….”
“아까는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셔서…….”
“아니에요. 내가 막무가내로 들어가서 미안해요. 난감했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이 비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총괄님 마음 이해합니다. 저도 한지감 씨가 꺼림칙합니다. 그런데 이번 인턴 합격에서 대표님의 영향은 미미했습니다.”
“알아요. 윤 이사님은 정다영을 밀었고, 전 상무는 한지감을 밀었다죠.”
“저도 대표님이 한지감 밀어주실까 봐 불안해서 계속 회의실 앞에서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근데 정말 대표님은 한 번도 한지감 씨 밀어주는 그런 말씀한 적 없으셨습니다. 정말입니다.”
“……알았어요.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이제 그만 가 봐요.”
이 비서가 목례를 하고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황덕현이 인사 결정에 구체적으로 관여했는지 안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지감이 인턴으로 채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한지감, 네가 며칠이나 버틸지 궁금하다.”
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 나는 다영과 함께 A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내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룸으로 안내해주었다. 룸에는 창가가 있어 서울의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밤이었으면 더 아름다웠을 테지만, 환한 햇살이 비추는 낮의 풍경도 나쁘지 않았다.
“우와. 살다 보니 이런 데서 점심을 다 먹네요.”
“그러게.”
“오빠는 여기 처음 아니잖아요.”
눈을 세모로 뜬 다영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여기에 이수지와 함께 왔다는 것을 이번에 이야기했더니 저런다.
“그건 비즈니스고, 이건 개인적인 거잖아.”
“개인적인 거요?”
어째서인지 다영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뭐 공적인 일은 아니니까.”
“아…… 그렇죠. 근데 경환 씨랑 채령 씨는 언제 와요?”
“곧 올 거야.”
어쩐지 다영의 얼굴이 긴장된 것처럼 보였다.
“면접 보는 것도 아니고 표정이 왜 그래?”
“긴장된단 말이에요.”
“왜 긴장이 되는데?”
“잘…… 보이고 싶으니까 그렇죠.”
“잘 보이고 말고가 어딨냐, 맞으면 계속 보고 아니면 마는 거지.”
“오빠랑 친한 사람들이잖아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문이 열리고 직원의 안내를 받은 채령과 경환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다영이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맞았다.
“안녕하세요!”
“누가 보면 너랑 아는 사이인 줄 알겠다?”
“말로만 듣다가 직접 봐서 좋아서 그렇죠.”
나를 통해서 서로의 존재를 알 뿐,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채령이 다영을 보고 덩달아 웃었다.
“저도 그렇네요. 반가워요. 안채령이에요.”
“정다영입니다. 저도 정말 반가워요.”
두 여자의 인사가 끝나고 나서 경환은 자신의 소개를 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경환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도요. 많이 들었어요.”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음식이 세팅되었고 경환이 음식 사진을 찍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인턴 합격되었는데 호텔이면, 정직원 되면 어디서 사려고 그래?”
“더 좋은데서 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정직원이나 되었으면 좋겠다. 채령아. 학원 시간까지 옮겨서 축하하러 와 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빠 일인데! 다영 씨도 정말 축하해요.”
“감사해요.”
부끄러운 듯 웃던 다영이 이내 조심스럽게 채령에게 물었다.
“작품 활동 계속하신다고 들었어요.”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언제 기회가 되면 작품 보여 주세요.”
“저야 좋죠. 작업실로 놀러 오세요.”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다영은 원래 아는 사이인 듯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후식으로 과일과 차가 나왔을 때 경환이 물었다.
“그 재수 없는 인간도 붙었어?”
“강민수. 붙었지.”
합격 전화를 받고 전시회장으로 돌아오니 강민수가 슬금슬금 접근해 왔다. 합격 전화를 받았다는 것을 내게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받았다고 했더니 잘해 보자는 말과 달리 얼굴이 굳었다. 경환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자식 떨어졌어야 하는데. 너무 꼴배기 싫은 스타일이야.”
“저도 강민수 정말 싫어요. 잘난 척 심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어요. 그러면서 고객들 앞에서만 겸손한 척!”
다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보탰다.
“우리가 싫어하면 뭐하냐. 윗분들이 좋아하시잖아.”
“윗분들이 좋아해도 저는 똑같이 싫거든요.”
“형도 솔직히 거슬리지?”
“거슬리지. 근데 그것보다 더 크게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다영이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누구 말하는 거예요?”
“김도균 총괄님”
“총괄님이 왜요?”
“날 마음에 안 들어 해. 어쩐지 인턴 생활이 녹록치 않을 거란 느낌이 강렬하게 든다.”
“처음에는 좀 힘들어도 곧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야 할 텐데 말이다.”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는데 쓴맛이 화악 입안에 맴돌았다. 이 쓴맛이 꼭 나의 앞날이 될 것 같아 더 불안해졌다. * 인턴으로 탑 옥션에 출근하는 첫날이 밝았다. 나는 일찍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탑 옥션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편이 훨씬 편했지만, 인턴이 외제차를 끌고 나오는 것이 좋게 보이진 않을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택했다. 사무실이 있는 2층에 도착했다. 보안이 되어 있는 유리문 너머로 사무실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아서 비어 있었다.
“너무 일찍 왔나?”
어쩌다 보니 4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다시 내려가서 커피라도 사 마실까? 아니면 다영에게 연락해 볼까? 어떻게 할지 생각을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이 그쪽으로 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김도균이 보였다. 그는 따듯한 물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안녕하세요. 총괄님.”
“…….”
인사도 받지 않고 그는 홀로 사무실에 들어가 버렸다. 어이가 없었지만 혼자 있으니 그나마 숨은 제대로 쉴 수 있었다. 김도균은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걸까? 분명 권미애로 인해 생긴 오해를 풀었는데 말이다. 그냥 나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9시 20분 전이 되자 정연주가 도착하면서 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0분 전에 다영과 강민수를 비롯한 인턴들이 도착했다. 9시 정각이 되자 김도균이 인턴들 앞에 섰다. 그러고는 내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탑 옥션의 인턴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옥션에도 재무, 홍보 여러 부서가 있지만 여러분들은 특별히 경매팀으로 뽑혔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일일이 인턴들과 눈을 맞췄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김도균의 말이 끝났을 때쯤 거친 숨소리를 내며 선명한 S라인을 자랑하는 여자가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자는 눈치를 보면서도 당당했다. 인턴 첫날에 늦다니 참 대담한 사람일세. 근데 인턴이 6명이 아닌 7명이네.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던 김도균은 여자에게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경매팀에는 3팀이 있습니다. 고미술팀, 근현대미술팀, 그리고 온라인팀. 한 팀에 인턴을 2명을 배정하고 한 달 후 바꾸는 형식으로 운영됩니다.”
옆에 선 다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는 당연히 고미술팀 가고 싶죠?”
“아무래도 그렇지.”
미션을 위해서는 근현대미술팀에 가는 것이 좋았지만, 적응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고미술팀에서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다영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정다영 씨.”
“네.”
“박도희 씨.”
“네.”
“두 분은 고미술팀으로 가시면 됩니다.”
늦게 온 여자의 이름이 박도희였다. 고미술 팀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안타까웠지만 다른 팀으로 가서 적응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영은 자리를 뜨면서 나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김도균은 호명을 이어갔다.
“강민수 씨.”
“네!”
“김현아 씨 ”
“네.”
“두 분은 근현대미술팀으로 가시면 됩니다.”
모든 인턴이 떠난 자리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김도균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봤다. 참다못한 내가 물어봤다.
“저는 어느 팀으로 가면 됩니까?”
“한지감 씨는 저와 함께하면 됩니다.”
“네?”
팀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김도균과 함께해야 한다고?
“따라오세요.”
김도균은 자신의 명패가 있는 자리로 가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세로로 놓인 책상을 가리켰다.
“저기 앉으시면 됩니다.”
“네…….”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고, 김도균은 다른 설명 없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다른 팀은 통성명을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지만, 나는 그냥 앉아 있는 것 외엔 할 것이 없었다. 한 시간 동안 김도균이 아무 말도 없기에 나는 가서 물었다.
“시키실 일 없습니까?”
“기다리세요.”
김도균은 나를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퇴근 시간이 되도록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나를 말려 죽일 작정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대우는 너무 모욕적이다. 참지 못하겠다. 아니, 참지 않겠다. 나는 벌떡 일어나 김도균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