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탑 옥션 (2)2021.04.17.
점심시간이 지나고 퇴근 시간이 되도록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나를 말려 죽일 작정인 것이 분명하다. 이런 대우는 너무 모욕적이다. 참지 못하겠다. 아니, 참지 않겠다. 나는 벌떡 일어나 김도균 앞에 섰다. 한 번도 나를 보지 않았던 김도균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할 말 있어요?”
그 모습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그는 내가 이렇게 흥분해서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흥분해서 쏟아내라, 그렇게 말실수를 해라, 너를 이곳에서 밀어내버릴 수 있도록.’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내가 멈칫하자 그는 조급해했다. 순간 화가 가라앉으면서 오기가 올라왔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요. 퇴근해도 되겠습니까?”
실망한 김도균이 다시 컴퓨터 화면을 보고 말했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가방을 챙겨 김도균에게 인사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
김도균은 인사를 받지 않았지만 나는 생글생글한 웃음을 띠고 돌아섰다. 그 상태로 근현대미술팀, 고미술팀, 온라인팀에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잘 가요.”
“가 보겠습니다.”
“내일…… 봐요.”
사람들은 어떻게 버티냐는 안쓰러운 눈초리 반, 이 상황에서 웃는 것을 보니 낯이 두껍구나 하는 눈초리 반이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두 명 있었으니 한 명은 비웃는 강민수였고, 다른 한 명은 울컥한 다영이었다. 이곳에서 나를 유일하게 응원해 주는 사람이 다영이었지만, 얼굴을 보면 함께 울컥할 것 같아 시선을 피한 채 유리문을 통과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눌렀지만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계단으로 내려가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얼른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 차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택시를 잡아탔다. 예전에 드라마에서 권고사직을 받아내기 위해 창고 같은 곳으로 보낸 뒤 아무 일도 시키지 않는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등장인물을 보면서 나라면 일 년은 족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나를 멱살 잡고 싶었다. 이런 대우는 하루도 버티기가 힘들다. 뒷좌석에서 창밖의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늘은 견뎌 냈다고 했지만 내일도, 모레도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 서정선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김도균의 앞에 섰다.
“총괄님, 잠시 회의실에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가능하세요?”
“그러죠.”
모두 보지 않은 척했지만 회의실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신경 썼다.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서정선은 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녀는 최대한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총괄님. 정말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뭐가 말입니까?”
“한지감 씨요. 하루 종일 옆자리에 앉혀놓고 아무것도 안 시키셨잖아요. 이러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김도균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첫날이어서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거예요.”
서정선이 흥분하려 노력했던 것이 이 말로 무너졌다.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신 거라면 읽을 자료라도 주셨겠죠. 정말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설마 팀장급들이 우겨서 한지감 씨가 들어온 것이 못마땅하신 거예요?”
“그럴 리가요.”
“그러면 왜 그러시는 건데요?”
눈매가 날카로워진 김도균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서 팀장에게 내 결정에 대해서 일일이 허락 맡아야 합니까?”
“그런 게 아니라…….”
“팀장들이 행사한 인사권에 대해 저는 존중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인턴을 배치하는 건 제 권한입니다. 서정선 팀장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
김도균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서정선의 말문은 막혀버렸다. 그런 서정선을 지나 김도균은 쌩하니 회의실을 나갔다. 김도균이 나오자 회의실을 향하던 눈이 모두의 눈이 급하게 책상으로 돌아갔다. 뒤이어 충격받은 서정선이 나왔다. 모두 일을 하는 척했지만 회의실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방 안을 울렸다. 나는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야지!”
애써 밝게 말했지만 몸이 무거워 일어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깨어있었다. 밤잠을 내내 설쳤기 때문이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현관을 지나는데 내 차 앞에 낯익은 뒷모습이 서 있었다.
“정다영?”
“……오빠아.”
화들짝 놀란 다영이 이내 나를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여긴 웬 일이냐?”
“웬 일이긴요. 차 얻어 타려고 왔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노력이 가상해서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어쩌냐. 나 회사에 차 안 타고 다니는데.”
“왜 안 타고 다녀요?”
“인턴이 외제차 끌고 다니면 재수 없잖아.”
“음. 그건 또 그렇네. 에이. 괜히 헛걸음 했네. 편하게 가는 줄 알았더마안.”
편하게 가려면 탑 옥션으로 직접 갔을 것이다. 다영의 집에서 여기로 오는 거리와 탑 옥션까지 가는 거리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영의 마음이 고마워 웃음이 났다.
“어쩔 수 없지. 지옥철에 함께 탑승해 봅시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걸었다. 이대로 십 분 정도 걸으면 지하철역이 나온다. 내가 많이 걱정됐는지 다영은 자꾸 나를 힐끗거렸다.
“나 좋아하냐?”
“네에?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예요!”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는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당황을 참 잘해서 놀리는 맛이 있다.
“자꾸 얼굴을 힐끔거리잖아.”
“그거야…….”
“알아. 걱정돼서 온 거. 연기를 하려면 끝까지 잘 하든가.”
“……티 났어요?”
“그래. 티 엄청 난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 못 버티겠으면 당장 그만두고 나올 거니까. 업계에서 웃음거리는 되겠지만, 난 돌아갈 곳이 있잖아.”
다영이 걸음을 멈춰서 나도 덩달아 멈췄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오빠가 상처받는 것은 너무 싫은데, 나가는 것은 더 싫어요.”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버텼으면 좋겠어요…….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요.”
다영은 진짜 미안해하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 준다니, 인생 헛 살진 않았구나 싶었다. 나는 다영의 양 볼을 감싸 눈을 맞추려 시도했다.
“정다영.”
“네……?”
다영은 나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민망한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충분히 힘이 되어주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볼 테니까. 알았지?”
“……알았어요.”
다영이 대답을 하자마자 나는 볼을 놔주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몸에 힘이 좀 붙은 것 같았다. 뒤로 다영이 쫄래쫄래 나를 따라왔다.
“같이 가요.”
김도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 점심시간, 정다영은 팀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서 나왔지만 한지감이 걸렸다. 김도균은 점심도 먹지 않은 채 일을 했고, 한지감은 천년된 소나무처럼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사를 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빨리 점심을 먹고 한지감에게 간단한 먹을거리라도 사다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정다영은 팀을 빠져나와 카페로 향했다.
“따듯한 아메리카노 하나랑 샌드위치 하나 주세요.”
“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도희 씨 성강대 나오셨구나. 친구가 성강대가 있어서 자주 놀러 갔어요.”
“어머 그래요.”
같은 팀 인턴 박도희와 재수 없는 강민수였다. 굴곡진 S라인 몸매를 자랑하는 박도희가 들어서자 카페에 있는 모든 남자들의 시선들이 집중됐다. 빨리 음식이 나와 모른 척 지나가길 바라는데, 강민수가 굳이 아는 척을 했다.
“어. 다영 씨. 여기서 보네요.”
“아…… 네.”
인사만 하고 가길 바랐건만 강민수는 저벅저벅 다가왔고, 박도희도 따라왔다.
“커피 마시러 왔구나.”
“네.”
박도희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뭐 시켰어요?”
“그냥 뭐…….”
두 사람 앞에서 한지감의 이야기를 꺼내기 싫어 정다영은 얼버무렸다. 그때 카페 직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따듯한 아메리카노랑 샌드위치 나왔습니다.”
거지같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정다영은 음식이 든 종이 봉지를 들었다. 강민수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한지감 씨 때문에 오셨구나? 사다 줘도 먹을 분위기는 아닌 거 같던데.”
비꼬는 뉘앙스가 들어 있어 정다영은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요.”
“다영 씨, 한지감 씨랑 친한가 봐요?”
강민수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과 친한 것이 안 되었다는 투였다. 정다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친해요. 문제인가요?”
“아니. 뭐…… 문제라기보다. 도희 씨, 카라멜 마키아또 드신다고 했죠?”
“네에.”
“제가 같이 주문할게요.”
정다영의 태도에 놀란 강민수가 주문을 핑계로 자리를 떴다. 다영도 가 보겠다는 말을 하려는데 박도희가 애교스럽게 말했다.
“언니이, 한지감 오빠랑 사귀죠?”
“그냥 친한 오빠 동생이에요.”
“에에이. 아닌 거 같은데에.”
욱한 다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맞거든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 솔직히 한지감 오빠보다는 강민수 오빠가 낫지 않아요오? 남자는 얼굴보다 능력이잖아요.”
박도희의 시선이 강민수에게 끈적하게 닿았다. 눈을 부릅뜬 정다영이 딱 부러진 태도를 취했다.
“글쎄요. 얼굴도 능력도 지감 오빠가 훨씬 나은 거 같은데?”
“능력은 아니죠. 콩깍지가 너무 심하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정다영이 인상을 쓰며 싸늘하게 말하자 박도희는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
“무서우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흠흠…….”
정다영은 자신이 너무 심했나 싶어 민망했다.
“그리고 언니 말 편하게 놓으세요오. 제가 다섯 살이나 어리잖아요.”
“알았어. 말 편하게 할게.”
“이봐요. 훨씬 편하고 좋잖아요.”
박도희가 팔짱을 끼고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워 얄미운데도 악감정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을 힐끗거리는 강민수에게는 악감정이 넘실대었다. * 시계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오후 2시. 정말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은데 2시 밖에 안 지났다. 그나마 점심을 먹었다는데 위로를 삼고 있었다. 김도균이 점심을 먹지 않았고, 먹으란 소리도 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와도 되냐고 물어보면 아마 그러라고 했겠지만, 왠지 지는 것 같아 묻지 않았다. 그러다 다영이 계단으로 오라는 문자를 했고, 거기서 샌드위치와 커피로 급하게 점심을 먹었다. 다영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빈속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게 너무 힘들다. 더 이상 이렇게 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 나는 사무실 한쪽에 있는 책장으로 가서 2년 전 열린 경매 도록을 가져와 보기 시작했다. 한창 재밌게 보고 있는데 날선 김도균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한지감 씨. 도록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져다 놓으세요.”
욱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누르고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도록을 책장에 가져다 놓는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보안이 걸린 유리문 앞에 키 크고 깡마른 50대 여자가 정연주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열어!! 열라고!!!”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정연주를 발견한 지 팀장이 바로 달려 나갔다.
“김 이사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김 이사장은 씩씩거리며 지 팀장을 피해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김도균에게 직행했다.
“너야? 여기 책임자가?”
“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 위조품을 팔아놓고 무슨 일이냐고!”
김 이사장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5억짜리 위조품 도자기를 팔아놓고 감히 무슨 일이냐고 물어!”
“진정하세요.”
“차근차근 이야기를…….”
“너 같으면 이야기를 하게 생겼어!! 위조품을 5억이나 주고 샀는데!”
지 팀장과 정연주가 진정시키려 했지만 김 이사장은 막무가내였다. 김도균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김 이사장에게 다가갔고, 사무실 분위기는 싸해졌다. 그가 강하게 나간다면 경찰이 개입해야 하는 상황까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김 이사장님.”
김 이사장의 흥분이 조금 잦아들었다.
“사과 받으러 여기 온 거 아니야. 환불해 줘.”
“일단 회의실로 가시죠. 절차상 어떤 상황인지 파악해야 환불도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이를 앙다문 김 이사장의 대답을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기다렸다.
“그러도록 하지.”
김도균, 김 이사장, 그리고 지 팀장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김도균과 김 이사장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줘. 안 그럼 언론에 탑 옥션이 위조품을 판다는 이야기를 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김도균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김 이사장을 배웅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나갔다. 초췌한 지 팀장이 터덜터덜 회의실에서 나오자 정연주가 달려갔다.
“어떻게 됐어요?”
“죽어도 환불 받아야겠대. 근데 정말 위조품 아닌 것 맞아?”
“5명 감정위원님들이 모두 진품이라고 한 도자기예요.”
“김 이사장에게 위조품이라고 한 사람이 성 교수야. 감정하는 사람은 성 교수랑 대면해야 한다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더라.”
“성 교수면 학계에서 나서는 사람은 없을 거고…… 상인들도 몸을 사릴 거예요.”
정연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마 성준섭 교수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한국 도자기 학계 최고 권위자였다.
“그러니까. 정확한 감정이 필요해. 이번 감정 못 믿겠다니까 감정위원으로 참여한 사람은 제외해야 하고.”
“성 교수랑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손에 꼽는데 감정위원을 제외하면…… 감정에 권위도 있어야 하고, 최대한 빨리 구해야 하잖아요.”
“그렇지……. 생각나는 사람 없지?”
“없…….”
말을 멈춘 정연주가 무언가 생각난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
“정확한 감정이 가능하고, 감정위원도 아니면서 빨리 봐줄 수도 있는 분, 있어요……!”
“누구.”
“한지감 씨요.”
정연주가 날 보았고,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