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성 교수 (3)2021.04.24.
김도균이 성 교수의 녹음을 틀었다.
[김 이사장님이 위조품이라고 감정하지 않으면 푸른 보육원 아이들이 받는 후원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성 교수의 말이 이어졌지만 김도균은 정지시키고는 냉정한 눈으로 김 이사장을 응시했다. 김 이사장이 악에 차서 소리쳤다.
“다 거짓말이야!”
“성 교수는 김 이사장님이 말씀하신 녹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김 이사장이 눈빛이 흔들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녹음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뭐? 고객인 나를 고소라도 하겠다는 거야!”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어제 김 이사장에게 공손했던 김도균은 사라지고, 내게 줄곧 보여줬던 차가운 그 모습만 남아있었다. 극명한 온도차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못지않았고, 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악에 찬 김 이사장이 소리 지르며 말했다.
“감히 날 고소하겠다고! 내가 졸부라고 이러는 거지? 진작에 알아봤어. 앞에서는 온갖 아양을 떨면서 뒤에서는 날 졸부라고 얕봤잖아!”
이 선명한 피해의식은 뭐지? 나처럼 김도균도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까. 저희가 어떻게 고객님을 얕봅니까?”
“아니라고? 나 똑똑히 봤어. 그날 내가 저 자라병 낙찰 받았을 때 정연주를 비롯한 직원들 모두 안타깝다는 고개를 숙였지! 다 내가 아니라 도강 그룹 강 회장이 낙찰 받았으면 했던 거지!”
김 이사장이 환불을 요구하면서 난리를 쳤던 것은 관심을 받고 싶어서도, 그렇다고 돈이 아까워서도 아니었다. 피해의식이 불러온 모욕감 때문이었다.
“정연주 씨에게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사장님께 직접 사과드리게 하겠습니다.”
김도균이 한발 물러섰는데도 김 이사장의 화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네 수작을 모를 줄 알아?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거잖아!”
지켜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웠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날 것 같아 끼어들었다.
“이사장님, 총괄님이 좋은 분이신지 모르겠지만 정확하신 분입니다.”
“김 총괄 아래 있는 네 말을 어떻게 믿어!”
“회사에 들어오기 전 총괄님은, 제가 손님에게 이성적으로 접근한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듯 김 이사장은 멈칫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나중에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고 총괄님은 제게 사과하셨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90% 이상 그냥 넘어간다는 것, 이사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너…… 너도 탑 옥션 사람이니까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잖아……!”
“탑 옥션 인턴인 것은 맞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여기 계시는 총괄님이 절 옆자리에 앉혀놓고 아무 일도 안 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탑 옥션에도, 총괄님께도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총괄님이 일에 있어서 정확한 분이라는 건 압니다.”
“…….”
“김 이사장님은 나눔 재단을 운영할 정도로 마음이 넓으신 분 아닙니까. 넓은 마음으로 한 번만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고 김 이사장이 입을 열어봤다.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한번 믿어보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와 김도균은 함께 고개를 조아렸다. * 다음 날, 김도균이 정연주를 회의실로 불렀다. 정연주가 속한 팀의 지 팀장과 당일 경매를 진행한 서정선도 동석했다.
“정연주 씨.”
“네.”
“어제 김 이사장에게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건지……?”
“김 이사장이 철화백자 자라병을 낙찰 받았을 때 정연주 씨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는 내용이었어요. 김 이사장 말로는 정연주 씨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그랬다더군요."
“…….”
정연주는 고개를 숙일 뿐 대답하지 못했다. 지 팀장이 기가 막히다는 듯 굵직한 목소리를 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김도균이 지 팀장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제 기억으로는 지 팀장도 고객을 배웅하느라 고미술 시작 전에 경매장을 떠났던 것으로 기억해요.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저도 고미술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고객을 배웅하느라 경매장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제 김 이사장 앞에서 ‘내가 직접 봤다’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했죠.”
서정선의 눈이 불안하게 돌아갔고, 그 표정을 김도균은 놓치지 않았다.
“서 팀장, 봤죠?”
“네……?”
“경매사는 경매장의 지휘자예요. 사람들이 못 보고 지나치는 것들을 경매사는 잡아내죠. 작은 몸짓, 미세한 표정, 그런 것들이 결국 낙찰가로 이어지니 말이에요.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 팀장은 봤을 겁니다. 그렇죠?”
“그게…….”
서 팀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은 정연주가 소리쳤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연주 씨, 책임감을 느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럴 거 없…….”
지 팀장의 말에 정연주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게 보였을 줄 몰랐어요……. 저는 그냥…… 김 이사장님 어떤 성격인 줄 아시잖아요. 과시하기 위해서 구입하시는 분이니까……. 좋은 유물의 주인이 그런 분이라는 것이 속상했어요…….”
“연주 씨, 그건…….”
옥션 스페셜리스트가 고객을 평가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니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얼굴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김도균이 얕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 정연주 씨가 더 잘 알고 있겠죠?”
“흐윽……. 죄송합니다.”
“사과는 김 이사장에게 해야죠. 지 팀장, 정연주 씨 데리고 나가요.”
“네……. 일어나 연주 씨.”
지 팀장이 정연주를 데리고 나가자 회의실에는 서정선과 김도균만 남았다.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많은 직원들이 정연주 씨와 같은 표정을 지었어요?”
“대다수가…… 그랬습니다. 상대가 도강 그룹 강 회장님이다 보니……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진품을 위조품이라고 우기다니요. 상식 이하의 행…….”
“상식 이하의 행동이죠. 하지만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은 우리예요. 고객이 비싼 돈으로 미술품을 사는 것은 거기에 부여된 사회적 지위까지 사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만약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많은 고객들이 탑 옥션에서 걸음을 끊을 터였다. 모텔인 아닌 호텔에 가는 이유는 고급스런 시설과 거기에 맞는 서비스를 바라서이다. 호텔에서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도리어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그 호텔을 재방문할 고객은 없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곳에 있는 스페셜리스트 대부분이 잘못했어요. 이게 뭘 뜻하는 줄 알아요? 바로 내가 잘못 했다는 거예요. 김 이사장이 원한다면 무릎이라도 꿇어야죠. 그게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이니 말이에요.”
“총괄님…….”
정연주와 같은 행동을 보였던 것은 근현대 팀도 마찬가지였다. 팀의 잘못은 팀장인 서정선의 잘못이기도 했기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뜨끈뜨끈한 국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퇴근 후 국밥,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김 이사장의 일로 기분이 찜찜해서인지 통 먹히지가 않았다. 이런 나를 다영이 걱정스럽게 보았다.
“왜 이렇게 못 먹어요?”
“분위기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그렇죠.”
“난 처음에 김 이사장의 말을 듣고, 그녀가 피해의식 때문에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게 아니었던 거죠.”
푹 한숨을 쉰 다영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오만했던 거지.”
“무슨 오만이에요. 총괄님이 팩트를 확인하기 전까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 솔직히, 총괄님이 정확하게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 보고 놀랐어요.”
“나는 왠지 그렇게 하실 것 같았어. 정확하신 분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들춰서 좋을 것이 없잖아요. 보통 이런 일 벌어지면 팩트 확인 없이 고객에게 무조건 사과시키거나, 아니면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불쾌했다면 미안하다는 식으로 진행되잖아요.”
“그렇지.”
차분하게 말하던 다영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말이에요. 총괄님, 그렇게 정확한 분이 오빠에게는 왜 유독 그렇게 못되게 구는 거예요? 진짜 속상해.”
“나도 알고 싶다. 이유가 뭔지.”
“오빠에게 엄청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두 꺼리는 자리인데 오빠가 나섰잖아요. 성 교수님 설득한 것도 오빠구요.”
“됐어. 여태까지 그렇듯 그냥 일한 것뿐인데 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거 때문에 이수지까지 갔잖아요…….”
‘이수지’를 말하는 다영의 목소리에 힘이 빠진다. 하긴 오늘이 나도 유독 길게 느껴졌다. 다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수지를 만나니까 진이 확 빠지긴 하더라.”
“이수지가 현성 재단 일 그냥 줬어요……?”
“그럴 리가 있겠냐. 예전에 사과 대신 한 번 도와주기로 한 거 이번에 쓴 거지. 그것도 안 들어주려고 어찌나 치사하게 굴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날 보면서 다영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면이 좀 있죠.”
“좀 있으면 다행이지. 전체적으로 그렇잖아. 그나저나 내일 김 이사장 만나는 준비는 다 된 거야?”
“잘 모르겠어요. 연주 선배는 풀이 죽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팀장님도 다른 말은 없으셨거든요.”
원래 오늘 김 이사장에게 찾아가 사과를 하려 했다. 김 이사장이 준 기한이 오늘까지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연락을 하니 김 이사장이 바쁘다면서 내일 오라고 한 상황이었다.
“연주 선배, 안쓰러워 죽겠어요. 그렇다고 잘했다는 건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나올 때가 있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손님 앞에서는 연기를 해야 한다니까.”
“맞아요. 연주 선배, 점심 때 밥도 제대로 못 드시더라구요. 매도 빨리 맞으랬다고, 차라리 오늘 가는 것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나는 고개를 단호하게 돌렸다.
“난 그건 반대. 시간을 번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왜요?”
“김 이사장,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모든 것이 다 밝혀졌는데도 총괄님을 들이받을 기세로 화를 냈어. 사과한다고 해서 좋게 넘어가지 않을 거란 이야기지.”
사과해서 넘어갈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다. 다영은 걱정이 되는지 큰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설마…… 무릎 꿇으라든가, 그런 식으로 나오지 않겠죠?”
“그렇게 나오고도 남아.”
다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나오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상황은 회사에 불리하다. 김 이사장이 한 짓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만약 정연주를 비롯한 다수의 직원의 행동이 김 이사장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이란 소문이 돈다면, 탑 옥션에 발걸음을 끊을 것이다. 몇천, 몇억의 미술품을 사가는 곳에서 자신을 평가한다? 높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는 일이다. 그런 곳에서 돈을 쓸 사람은 없기에,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 회사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 다음 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나는 9시에 딱 맞춰 출근했다. 자리에 앉기 전 나는 김도균에게 인사를 건넸다.
“총괄님, 좋은 아침입니다.”
“…….”
김도균은 말없이 컴퓨터 화면을 응시했다. 또 씹혔네. 또 씹혔어. 내가 껌도 아닌데 왜 자꾸 씹을까?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갈까? 말까? 서류와 김도균을 여러 번 번갈아 볼 때였다. 짜증 섞인 김도균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한지감 씨, 할 말 있습니까?”
“아…… 네.”
나는 서류를 들고 일어나 김도균 앞에 섰다. 사무실 안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쏟아져 영 부담스러웠다.
“총괄님, 잠깐 회의실에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하세요.”
“여기서요……?”
“네.”
그러지 못할 거면 자리로 돌아가라는 듯이 나를 봤다. 오기가 생긴다.
“그럼. 여기서 하겠습니다.”
나는 서류를 김도균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기획서입니다.”
“기획서 쓰라고 한 적…….”
서류를 본 김도균의 말문이 막혔다.
“김 이사장님께 미술 잡지에서 취재를 제안 드렸으면 합니다. ‘나눔 가치를 실현하는 미술품 애호가’의 콘셉트로 ‘나눔 재단’과 여태까지 수집한 미술품이 나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도균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런 기획서를 쓴 이유가 뭐죠? 김 이사장을 자신의 고객으로 만들고 싶은 건가요?”
“제 고객이 된다면 좋겠죠.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마음을 풀어드리는 것이 먼저이지 않겠습니까?”
어제 늦게까지 기획서를 쓰느라 늦잠을 잤다. 기획서 내용은 미술 잡지를 섭외해서 ‘나눔 가치를 실현하는 미술품 애호가’를 인터뷰하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기획서를 써본 적이 없어 인터넷을 뒤져 형식에 맞추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다. 김도균이 기획서를 던지듯 책상에 내려놓았다.
“김 이사장님이 겨우 이런 것에 마음을 풀 것 같습니까?”
“탑 옥션의 서비스가 김 이사장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상황 아닙니까?”
“그래서요?”
“그 자존심을 회복시켜 드리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총괄님…….”
고개를 돌리니, 언제 왔는지 파리한 얼굴의 정연주가 서 있었다.
“저는 지감 씨가 말한 이 방법, 해 봤으면 좋겠어요. 김 이사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아요.”
“…….”
김 이사장의 담당 직원인 정연주가 말하니 김도균은 고민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