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3단계 미션 (2)2021.04.28.
걸음을 옮기려는데 거실 구석에 걸린 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초록과 파란색, 빨간색이 일정하지 않는 층을 이루는 추상화였다. [ 800,000,000원 | 진 ] [미션 : 일주일 내로(다음 주 목요일까지) 이 그림을 위탁받으면 3단계 정보가 공개됩니다.] 누구의 그림일까? 예전에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내 머릿속 질문을 읽기라도 한 듯이 강민수가 말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그림이네요.”
말을 마친 강민수가 뻐기듯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부아가 치민다. 내가 먼저 알아냈어야 하는데……! 게르하르트 리히터.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을 열었다 평가받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하고 개성, 자율성, 다양성을 중시한 이념으로 무규정적인 것,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하는 리히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장 나타내는 작가였다. 그는 90년대 이후 추상 회화의 연작을 시작했고, 형태가 있는 무언가를 그리다 스퀴지나 롤러로 뭉개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조금만 시간이 있었다면 내가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오 장관이 강민수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자 아쉬움을 넘어 화가 나기까지 했다. 리히터의 그림을 지그시 보던 장희정이 아이같이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좋네요. 나중에 파실 생각 있으면 꼭 저에게 연락주세요.”
오 장관은 귀가 안 좋은지 장희정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강민수가 오 장관에게 다시 말하려는 것을, 장희정이 하지 말라고 고개를 저었다.
“한지감 씨, 강민수 씨. 포장 시작합시다.”
“네!”
“네…….”
장희정에게 가는 내 발걸음은 힘이 없었다.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오 장관은 장희정이 관리하는 고객이었다. 내가 접근하기 어렵다. 잘못 접근했다가는 고객을 뺏어가려 한다는 아주 나쁜 인상을 심어 주기 딱 좋았다. 아…… 어떡하지? * 황덕현이 김도균의 경직된 자세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넌 꼭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앞에 있으면 몸이 그렇게 굳더라?”
“마음에 안 들다니요. 오해십니다. 대표님.”
경직된 자세에, 존댓말 사용. 이것은 김도균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사인이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계속 그렇게 해.”
“…….”
“한지감 씨, 근현대미술 팀으로 배정했다며?”
“그것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되묻는 김도균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다른 이야기 하려 했는데, 네가 관심 있는 것이 한지감 씨 같아서 묻는 거야.”
“제 관심에 한지감 씨는 없습니다.”
“정말? 없지 않을 텐데. 어디에서든 인성으로 시비를 걸린 적이 없는 김도균이 인턴을 투명인간 취급했잖아. 그건 그 어떤 칭찬보다 노골적인 관심 아닌가.”
매서운 눈빛을 빛내며 김도균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무시를 관심이라고 하는 분은 처음 뵙는군요.”
“무시하는 태도를 취할 만큼 신경이 쓰이니까 그런 거잖아. 열등감을 가진 사람이 우월감으로 자신을 드러내듯이 말이야. 모든 건 양면적이지.”
욱한 김도균이 움찔했지만 황덕현의 얼굴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오기가 난 김도균은 여유로운 척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일개 인턴을 총괄인 제가 신경 써야할 이유는 없죠.”
“그럼 투명인간 취급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한지감 씨가 자신의 유명세를 특별하게 여기기에, 다른 인턴들과 똑같다는 것을 느끼게 하려던 것뿐입니다.”
“그래?”
“네.”
싸한 미소가 황덕현의 입가에 스쳤다. 그런 황덕현을 똑바로 응시하며 김도균은 말을 이어갔다.
“저에게 한지감 씨는 다른 인턴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김도균, 총괄 되더니 거짓말이 많이 늘었네.”
“거짓말 아닙니다. 업무가 바쁠 때라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가봐.”
문고리를 돌리려는 김도균의 뒤통수에 대고 황덕현이 말했다.
“한지감이 돈을 쫓는 사람이었다면,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야. 골동상으로 이미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데 여기 뭐하러 들어와.”
“형. 선재를 보고서도 형은 똑같은 말 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도균은 대표실에서 나왔다. 그는 갑작스런 어지럼증을 느꼈고, 급하게 벽을 잡았다. 앞에 있던 이 비서가 놀라서 그를 잡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미안해요. 이 비서.”
희미한 미소를 짓고 김도균은 비틀거리며 걸었다. ‘선재’. 오랫동안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잊을 수가 없었던 이름이다. 한지감에게서 그토록 거부감을 느꼈던 것은 어쩌면 ‘선재’에 대한 기억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수지에게 한지감이 이 회장과 맞서 스스로의 원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팀 배정을 망설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김도균은 인원을 늘려 한지감을 붙인 황덕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일로 황덕현을 비난했던 자신의 모습도. 자신도 기준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지감의 팀 배정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지감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정도 기회는 가져도 되는 사람이라는 작은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 * 지글 지글 불판에 익어가는 한우를 보며 다영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다영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좋냐?”
“왜 안 좋겠어요. 소고기는 항상 옳은걸요. 오빠에게 좋은 일이 생기니까 이렇게 얻어먹고 좋네요!”
미션을 생각하면 이런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어야 하지만, 팀 배정이 된 날이기에 기념하고 싶기도 했고 일주일 동안의 긴장을 털어내고 싶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불금이니 말이다. 나는 잘 구워진 고기를 다영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어서 먹어.”
“오빠도 드세요.”
“으응.”
우리는 소고기를 먹으면서도 수다를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도희, 지 팀장님에게 찍힌 것 같아요. 제대로 된 정장 입고 오라면서 뭐라고 하셨대요.”
“도희?”
의아해하는 내 얼굴을 다영이 쏘아봤다.
“괜히 기억 못하는 척하는 것 봐.”
“내가 왜 기억을 못하는 척해?”
“남자들 그런 것 있잖아요. 잘 보이고 싶은 여자에게 괜히 튕기는 것.”
“그건 여자들이 그런 것 아니야?”
“아니거든요. 남자들이 그렇거든요?”
“아! 생각났다. 너랑 같이 고미술 팀인 애 말하는 거지?”
나는 한 박자 늦게 박도희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눈을 가늘게 뜬 다영이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나를 몰아갔다.
“어머. 기억 못하는 척 연기가 수준급이네.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어리고 예쁘고 결정적으로 쭉쭉빵빵해서 마음에 들었다고.”
“몸매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어리고 예쁜지는 모르겠던데. 너보다 나이 많지 않아?”
얼굴은 잘 기억 안 나지만 나이 대가 나와 비슷했던 것 같다. 내 말에 다영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나보다 5살이나 어려요.”
“진짜? 그럼 24살이네.”
“맞아요.”
“쯧쯧. 노안이구만.”
내 말에 다영이 빙그레 웃었다. 웃는 다영의 모습이 예뻤다.
“봐봐. 얼굴은 네가 훨씬 예쁘지.”
“아아. 뭐예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영은 싫지 않은 듯 몸을 배배 꼬았다.
“가만 보면 립 서비스가 장난 아니라니까.”
“립 서비스를 너에게 뭣하러 하냐. 내가 소고기까지 사주는데. 그냥 사실을 말한 거거든?”
“치이.”
볼이 발그레해진 다영이 힐끗거리다 입을 열었다.
“오빠. 내일 토요일인데 뭐해요?”
그 말에 잠시 잊고 있었던 업무가 떠올라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뭐하긴, 일해야지.”
“주말인데요?”
“오늘 강민수에게 받은 이 수치를 설욕하려면 위탁 잘 받는 방법밖에는 없잖아.”
“무슨 수치까지. 강민수는 고미술 하나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저언혀 부끄러워하지 않지. 그래서 내가 이번 기회에 부끄럽게 만들어주려고. 아주 고미술을 우습게 여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어!”
“오오. 완전 고미술 지킴이인데요. 그래도 인턴 모임은 올 거죠?”
강민수의 주도 아래 토요일 점심에 인턴 모임을 갖게 되었다. 강민수를 주말까지 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참석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당연히 가야지.”
다영을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도 마음을 불편했다. 미션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다영아. 만약 네가 어떤 작품을 위탁받고 싶은데 말이야, 소장자의 담당자가 이미 있는 상태야. 그럼 어떻게 할 거야?”
“같은 회사인 거죠?”
“응.”
“그럼 접어야죠. 결론적으로 남의 영역을 침해하는 일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상도덕 어기는 행동은 정말 하면 안 돼요.”
다영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만약 네가 담당자 입장이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더럽죠. 내 걸 넘본 건데! 선배라도 들이박아요, 전!”
씩씩거리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을 보니 백퍼센트 진심이었다.
“오빠도 생각해 봐요. 오빠가 위탁 판매하기로 한 유물을 다른 골동상이 채가면 꼭지 돌잖아요!”
“그…… 그렇지.”
“그거랑 다를 바가 없죠. 아니다. 더 심하죠, 같은 회사인데 그러는 거면. 나 같으면 가만 안 둬!”
분개하는 다영의 모습을 보니, 오 장관에게 따로 접근하고 그 사실을 장희정에게 들키는 날이면 탑 옥션에서 쫓겨날 각이다. 물을 마시고 진정한 다영이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오빠 그런 질문은 왜 하세요?”
“그냥 고미술계랑 좀 다른가 싶어서…….”
“사람 사는 것 다 비슷비슷하잖아요. 하물며 같은 미술계인데요.”
“그러네.”
그래. 나라도 새카만 후배가 내 손님을 채가면 꼭지가 돌겠지. 미션은 접고 위탁이나 열심히 받자……. *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수트를 차려입고 권미애의 집으로 갔다. 내가 탑 옥션에 인턴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권미애가, 위탁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고 연락을 주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사진을 받아보고 위탁을 받을지 말지 결정한다. 하지만 나는 권미애를 오랜만에 보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 이렇게 왔다. 권미애가 화사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지감 씨, 너무 오랜만이네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자알 지냈죠. 드디어 법적으로 솔로가 돼서 그런가, 마음도 가볍더라구요.”
얼마 전 권미애와 국회의원 조성오는 법적으로도 온전한 남남이 되었고, 이 일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났다. 이혼이 신문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두 사람이 공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이혼’이 언급될 줄 몰랐기에 당황했지만 나는 서글서글한 미소로 간신히 모면했다.
“얼른 작품이 보고 싶은데요.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당연하죠, 그러려고 부른 건데. 이쪽으로 와요.”
권미애는 나를 수장고로 안내했고, 우리는 수장고 안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고용인이 끼우기 식 보관장에서 액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소진열 화가의 작품으로 그림의 크기는 가로 90cm, 세로 70cm 정도 되었다. 회색빛 바탕에 다양한 크기의 비눗방울이 떠다녀 현실일지 가상일지 구분이 안 되는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 130,000,000원 | 진 ] 소진열 화가는 항상 비눗방울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캔버스 오른쪽 옆면에 그림을 그린 연도와 사인이 적혀 있었다.
“1987년이면 30년도 넘었네요. 이 그림 언제 사셨어요?”
“그려지자마자 샀어요. 전남편이 결혼 선물로 준 거거든요.”
소장 경로를 확인해야 해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고 나는 그만 굳어버렸다. 권미애가 내 어깨를 살짝 치며 웃었다.
“그렇게 굳을 것 없어요. 나 아무렇지도 않아요. 신경이 쓰였으면 판다고도 안 했죠.”
“하하……. 그렇죠.”
사실 권미애에게 판매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고 연락받았을 때 좀 의아했다. 수장고를 채운 고미술품이 아들과의 추억이 있는 것이어서, 사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도 거절하는 그녀였으니 말이다. 현대화여서 아들과 무관하게 혼자 수집한 것이라 어설픈 추측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결혼 청산에 대한 것이었다.
“이거 말고도 몇 작품 더 있는데, 온 김에 보고 가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고용인은 작품 5점을 꺼내 줄을 세웠다. 전부 소진열 작가가 그린 작품들이었고 그려진 년도는 5년씩 차이 났다. 아마 결혼기념일에 5년 주기로 선물한 모양이다.
“그림이 멋지네요.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이 안 가는 묘한 느낌이, 꼭 꿈속에 있는 기분이 들어요.”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다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어진 권미애의 말이 그 안도감을 박살냈다.
“전남편도 그런 이야기를 했죠. 역시 사람 느끼는 건 다 비슷하네요.”
목구멍에서 이런 말이 올라왔다. ‘저에게 왜 이러세요……!’
그때였다. 머릿속에 무언가가 섬광처럼 번쩍였다. 이거 어쩌면 상도덕을 지키면서 미션을 완료할 수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