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3단계 미션 (3)2021.05.01.
차를 타고 권미애의 집에서 나와 나는 장희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감 씨, 무슨 일이에요?]
“저 위탁받기로 한 그림이 있는데, 사진 보내드리면 될까요?”
[위탁을 받기로 했다구요?]
“네. 소진열 작가의 그림 6점입니다.”
[소진열 작가의 그림을 6점이나요?]
인턴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실적이라 그런지 장희정은 놀란 듯했다. 놀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네. 위탁자분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진행했으면 하는데……. 역시 주말이니 월요일에 진행하는 게 낫겠죠?”
[아니요. 그럼 최대한 빨리 진행하는 것이 좋죠. 일단 서면 심의가 필요하니까 그림 사진하고 작품 제목, 사이즈, 재질, 제작년도, 소장경위가 필요한데 파악됐어요?]
“네. 파악되었습니다. 서류 자체는 제가 써도 되는 거죠?”
[네. 문제없어요. 근데 지감 씨, 서면 심의 양식 없지 않아요?]
“네 없습니다. 어디에서 양식 다운받을 수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장희정이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토요일에 회사에 나오겠다고요?]
“네. 빨리 진행하고 싶어서요.”
[지감 씨도 약간 워커홀릭 과구나. 근데 오늘 인턴들 모임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안 가도 괜찮아요?]
“빨리 처리하고 가면 되죠.”
[그럼 회사로 와요. 나 회사에 있어요.]
“네! 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권미애는 마음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 아니기에 월요일에 진행한다고 해서 문제가 있진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장희정에게 전화를 건 것은 어제 언뜻 오늘도 회사에 나온다는 말을 들었고, 미션을 위해 장희정과 만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아까 소진열 화가의 그림을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산 사람은 권미애의 전남편 조성오지만, 현재 그림의 소장자는 권미애다. 이런 상황이 미션에도 적용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션에서 ‘위탁’받으라고 했지, ‘혼자’ 힘으로 위탁받으란 말은 없었다. 그러니 원래 담당자인 장희정을 움직여 오 장관에게 위탁을 받으면 된다. 조성오가 권미애에게 그림을 선물했듯, 나는 장희정에게 위탁을 선물하면 되는 것이다. 한 가지 철저하게 다른 점은, 조성오가 산 그림을 받기 위해 권미애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지만, 위탁을 받기 위해서는 장희정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줘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일단 장희정과 만나야지.”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인턴 모임까지 2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동하는 거리를 제외하면 남은 시간은 한 시간 정도이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해봐야지.”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정말 싫지만, 미션이 걸린 이상 늦더라도 장희정이 움직이는 데 더 주력해야 한다. * 장희정은 양식을 웹하드 어디로 들어가면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웬만한 양식은 여기 다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핸드폰으로 내가 보내준 소진열의 그림을 보았다.
“그림 보관 상태가 상당히 좋네요. 오래된 작품인데도. 소장자가 누구에요?”
“권미애 사장님입니다.”
“화이트 백화점 사장이요?”
많이 놀랐는지 눈이 동그래졌다.
“네. 맞습니다.”
“그분, 판매는 다 거절하시는 분이잖아요. 우리 대표님도 몇 번 퇴짜 맞았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낸 것이냐는 궁금함 가득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 이런 이야기는 좀 그런데…….”
“뭔데요. 말해 봐요.”
“이혼…… 하셨잖아요.”
“그랬죠. 몇 년 동안 계속 한다한다 말이 있어서 스카이 옥션 대표도 거기 부지런히 드나들었잖아요.”
“결혼식을 시작으로 5주년마다 소진열 화가의 작품을 선물로 받았고, 이혼하셔서 정리하실 생각이더라구요.”
“아아. 그렇구나.”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장희정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문득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날카로워진 눈빛이 안경을 뚫고 나왔다.
“그럼, 다른 소장품도 파실 생각 있는 거 아니에요? 좋은 작품들 많이 소장하시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깨가 절로 뒤로 갈 만큼 그 눈빛은 부담스럽다.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권미애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 부분은 건너뛰고 둘러댔다.
“저도 말씀을 드렸는데……. 나머지는 결혼과 딱히 상관없는 소장품인가 보더라구요. 단호하게 파실 생각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래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그렇게 실망할 일인가요?”
“사실 이번 경매에 메인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서요. 권미애 사장님 소장품이면 그런 작품이 있지 않을까 했거든요.”
“그렇군요.”
이제 슬슬 오 장관 이야기를 꺼내 볼까?
“어제 오 장관님 집에 갔을 때, 거실에 걸려있던 그림 참 멋지더라구요.”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품 말하는 거죠?”
“네.”
“나도 좋아하는 작가예요. 그 작품 때문에 오 장관님이 게르하르트 리히터에 푹 빠지신 것 같더라구요.”
“다른 작품도 수집하셨어요?”
고개를 저으며 장희정이 대답했다.
“하고 싶은데 못하셨죠. 1년 전쯤에 리히터의 작품이 나왔었는데 다른 분에게 낙찰되었거든요. 그때 엄청 상심하셨어요.”
“그랬군요.”
“그 뒤로 소장한 리히터 작품에 더 애정을 쏟으셨어요.”
“그렇군요. 저 솔직히 그 작품 보면서 위탁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말을 하면서 나는 장희정의 얼굴을 살폈다. 장희정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옥션에 한 번도 안 나온 작품이니 저도 당연히 위탁 받고 싶죠. 근데 그 이야기 꺼낼 때마다 정말 들은 척도 안 하세요. 듣기도 싫으신가 봐요. 언젠가는 위탁해 주시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기다리고만 있는 입장이에요.”
“저는 오 장관님이 그 그림을 아끼시는 것이 좀 의외였어요. 오 장관님은 틀이 분명한 분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맞아요. 그런 분. 그래서 더 그 그림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그림을 좋아한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 표정을 읽은 장희정이 말을 이어갔다.
“대리만족인 거죠.”
“대리만족이요?”
“네. 다이어터들이 먹방 보고 좋아하고,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갑질하는 사람에게 쏘아주는 사이다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처럼요. 내가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해소해주는 그런 존재가 오 장관님에게는 그 그림인 것 같아요.”
“견고한 틀을 가진 분이 그런 대리만족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느낌이 묘하네요.”
장희정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쩌면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 의해 세워진 틀일지도 몰라요. 장관님 사모님이랑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장관 맡으시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말이 적지 않으셨대요. 근데 아무래도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장관 되신 이후 점점 말 수가 적어지셨대요.”
“아……. 그렇군요.”
그런 작품을 돈도 필요하지 않은 오 장관이 판매할 이유가 없었다. 장희정만 적극적으로 움직여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내 착각이었다. 불과 30분 전 의기양양한 모습은 사라지고 다시 벽에 막혔다. * 치킨 집에서 인턴 모임이 진행되었다. 모임을 주최한 강민수는 어깨가 하늘에 닿을 듯 뻐겼다.
“저는 이번에 4점 이상 받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구 작품인지 물어봐도 되요?”
“도이슬 작가랑 류건 작가.”
평소였다면 정말 꼴 보기 싫었을 텐데, 미션 때문에 진이 빠져 강한 감정이 올라오지 않았다. 방금 전 알게 된 사실인데 강민수가 나와 동갑이란다. 못해도 세 살 정도 많을 줄 알았는데. 얼굴만큼 마음도 성숙하면 좋을 텐데, 남 앞에서 뻐기고 싶어 하는 그의 성미는 몹시도 유아적이다. 강민수의 옆에 앉은 박도희가 콧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와아. 오빠 능력 좋다아. 완전 최고오.”
“대단해요. 전 1점도 어려울 것 같은데…….”
같은 근현대미술팀인 김현아는 부러운 눈길로 강민수를 봤다. 옆에 앉은 다영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진짜 강민수 꼴 보기 싫지 않아요?”
“그러네. 그래도 멀리서 보니까 낫지 않아?”
나와 다영은 테이블 끄트머리 쪽에 앉아 있어 못 볼 꼴을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되니 운이 좋다. 다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마 낫긴 한데…….”
그때 불쑥 강민수가 끼어들었다.
“두 분 혹시 제 욕하는 거 아니죠?”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멈칫한 다영과 달리 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민수 씨 욕을 왜 해요. 일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일 이야기 어떤 거요?”
“위탁이요. 오늘 소장자 만나고 왔거든요.”
날 아래로 보는 강민수의 눈이 사악하게 빛났다. 드디어 물어뜯을 구석을 찾은 사람처럼.
“몇 점 위탁받기로 하셨는데요?”
보나마나 한두 점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러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여섯 점이요.”
다영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강민수가 믿지 못하겠는지 되물었다.
“여…… 여섯 점이요?”
“네.”
“누구, 작품인데요?”
유명 작가 작품이 아니라고 거의 확신하는 모양이다. 뭐라도 잡아서 자신은 꼭대기에 있고 나는 바닥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나 보다.
“소진열 화가님이요.”
순간 테이블은 조용해졌다. 시장에서 도이슬과 류건보다 소진열의 작품이 3배 이상 비싸다. 화가의 등급을 매기는 건 좀 그렇지만, 옥션이나 보니 더 비싼 화가의 작품을 선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강민수의 표정은 똥을 씹어 먹은 사람 같았다. 그 표정을 본 다영이 신나서 말했다.
“오늘 아침에 그 소장자 만나러 간 거구나아.”
“응. 일단 선배님에게 서면 심사 넘겼어.”
“와아. 지인짜 빠르다. 그럼 여섯 점 확정 아니에요?”
“서면 심사 결과 나와 봐야 알지. 이번엔 운이 좋았어. 권미애 사장님이 연락 주셔서 갑자기 진행된 거라, 사실 내가 한 것이 없어.”
상황을 지켜보던 박도희가 ‘권미애’라는 이름에 반응했다.
“화이트 백화점 권미애 사장님이요?”
“맞아요.”
“그분 소장 미술품 판매 안 하시기로 유명한 분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권미애가 이혼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꺼내기가 싫어 얼버무렸다. 김현아가 부럽다는 듯이 말해서 내 시선은 그녀에게 넘어갔다.
“부러워요. 위탁 신청 하나도 못 받았는데…….”
“저도 아직 0이에요. 우리 잘해 봐요!”
“네. 잘해 봐요.”
다영이 힘차게 말하자 김현아가 픽하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다영이 물었다.
“오빠. 저녁에는 약속 없죠?”
“없었는데 생겼어.”
“누구랑요?”
“임병규 대표님.”
‘임병규’의 이름을 들은 김현아가 반응했다.
“세원 갤러리 대표님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아아. 마대호 화가 전시회 잘 열려서 식사대접 받는 거죠?”
강민수 들으라는 듯 다영이 크게 말했다.
“응. 평가가 좋아서 다행이야.”
이를 악물고 있던 강민수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과연 평가가 좋았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상류층 인사들은 아직도 납북을 불편해해요. 말을 안 할 뿐이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싸울 기세로 다영이 나서는 것을 내가 막았다.
“괜찮아. 세원 갤러리 입장에서는 마이너스일 수 있죠. 하지만 전시회 자체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마대호 화가를 납북자가 아닌 화가로 재탄생시켰으니까요.”
“…….”
할 말이 없어진 강민수가 고개를 돌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고소한 기분이 들 만도 한데, 미션 때문에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피곤할 뿐이다. * 고급스런 주택가가 이어지는 동네, 그중 한 집 앞에 차를 대고 내렸다. 임병규의 집 앞이었다.
“집인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탑 옥션에서 급하게 인턴 모임 장소로 향하는데 임병규에게 전화가 왔다. 마대호 화가의 전시가 잘 끝났기에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미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이 마당에 식사 대접을 받는다고 좋을 것 같진 않아 거절하려 했지만, 고마움의 표시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승낙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임병규의 자택일 줄은 몰랐다.
“이미 온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
나는 초인종을 눌렀고, 잠시 후 임병규가 나왔다.
“지감 씨,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임병규의 집의 인테리어는 모던하고 차분한 느낌이 세원 갤러리와 닮아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띄엄띄엄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김환기, 이우환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작품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프 쿤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도 보였다.
“갤러리에서 살고 계셨네요.”
“하하하. 하나둘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식탁이 있는 부엌으로 들어선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품이 걸려 있었다. 크기는 약 가로로 40cm, 세로 30cm 정도 되었고, 짙은 녹색, 빨강색, 주황색이 일정하지 않은 층을 이루고 있는 그림이었다. [ 730,000,000원 | 진 ] 내 시선을 향하는 곳을 확인한 임병규가 웃으면서 말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을 좋아하나 봅니다.”
“네.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지감 씨랑도 인연이 있는 작품이네요.”
“네?”
“1년 전쯤 탑 옥션에서 구입한 작품이거든요.”
1년 전, 탑 옥션이라면…… 오 장관이 사고 싶었다던 바로 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