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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쌍룡검 (2) (74/226)

74화 쌍룡검 (2)2021.05.22.

다음 날. 우리는 나리타공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쌍룡검을 소장하고 있다는 이시하라 가문으로 향했다. 창밖의 낯선 풍경들을 보면서 나는 쌍룡검이 이순신 장군이 정말 사용한 것이 맞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수장고에서 사라진 쌍룡검이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것이라고 특정할 수 있는 근거가 탄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라진 쌍룡검은 돈암 박종경이 1811년 사들인 것이고, 1592년 임진왜란 사이에는 200년이 넘는 긴 역사가 있다. 또한 사라진 쌍룡검에는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글귀가 쓰여 있지만,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쌍룡검에 그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지 팀장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16560264933393.jpg“지감 씨, 일본어 좀 할 줄 알아?”

16560264933399.jpg“잘 못합니다. 전 지 팀장님만 믿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일본어이긴 했지만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배웠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1년 정도 사귄 여자 친구가 일본 드라마 매니아라 강제로 일본어를 듣긴 했지만, 그건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16560264933393.jpg“나도 일본어는 잘 못하는데……. 영어를 주로 하거든.”

16560264933399.jpg“네?”

일본인 고객을 만나러 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다니,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보고 지 팀장이 픽 웃으면서 어깨를 토닥였다.

16560264933393.jpg“걱정하지 마. 연락해 온 사람이 소장자 아들인데, 미국에서 유학했대. 그래서 메일도 통화도 다 영어로 했어.”

16560264933399.jpg“아아. 그렇군요.”

그럼 진작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내가 일본어를 하는 진땀 빼는 상황이 닥칠까 봐 괜히 놀랐다. 이시하라 가문은 넓은 부지에 있는 일본 전통 가옥에서 살고 있었다. 집에서 느껴지는 긴 세월과 고고한 아우라가 유서 깊은 가문이라 말해 주었다. 이런 가문이라면 진품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기대감과 함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함 또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소장자가 선의취득했을 거라 여겼다. 골동상이 아닌 옥션에 연락해 왔다는 것은 소장 경로에 대해서 거리낄 것이 없다는 뜻도 깔려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집을 보니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집안 선조인 누군가가 수장고에 있던 쌍룡검을 훔쳐간 것이 아닐까. 1910년은 국권을 빼앗겨 일본이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때여서, 많은 연구가들은 사라진 쌍룡검이 일본에 있을 거라 추측했다. 실제로 한 해 전인 1909년 쌍룡검과 함께 전시되었던 검인 철추가 일본에 의해 외국인에게 대여되고, 일본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쌍룡검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에, 100% 일본에 있을 거라 확신은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랄까. 근데 하필 이런 유서 깊은 가문에서 이순신의 쌍룡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건 그저 기막힌 우연일까, 아니면 물증이 나타난 걸까. 고용인의 안내에 따라 지 팀장과 나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주인이 없는 방에서 지 팀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0264933393.jpg“촉이 와. 아무래도 진품일 것 같은데.”

16560264933399.jpg“저도 그럴 것 같네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불쾌감을 지우려 노력했다. 이곳에 옥션 직원으로 왔으니 불쾌함은 잠시 접어 두어야 한다. 그래. 쌍룡검의 진위여부만 생각하자. 만약 운 좋게 진품이라면 쌍룡검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고, 그렇다면 정말 이순신 장군의 손때가 묻은 물건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정장을 입은 50대 남자가 들어왔다. 아들과 연락을 취했다고 했는데, 설마 이 사람이 아들인가? 당황한 지 팀장의 얼굴을 보니 연락했던 상대가 이 남자가 아닌 것 같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얼른 지워내고 유창한 영어로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16560264933393.jpg“안녕하십니까. 탑 옥션 고미술 팀장, 지동엽입니다.”

남자의 표정은 안 그래도 딱딱했는데, 지 팀장의 인사를 듣고 더 딱딱해지더니 일본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16560264933438.jpg“이시하라 쇼헤이입니다.”

영어를 잘한다는 아들은 어디론가 가고 일본어만을 쓰는 50대 남자가 우리 앞에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쫙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 팀장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이 상황을 해결하기를 바랐지만, 지 팀장은 오히려 내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나는 서툰 일본어로 말했다.

16560264933399.jpg“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16560264933438.jpg“다행히 일본어를 할 줄 아시는 분이 계시군요.”

그제서야 쇼헤이는 표정을 살짝 풀었고, 우리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쇼헤이의 말은 도무지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16560264933438.jpg“먼 곳까지 오셨는데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검을 보여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여기가 부산도 아니고, 이런 이야기는 비행기 타기 전에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진짜 살다 살다 일본까지 와서 물건을 못 보는 이런 상황을 당할 줄이야. 욕지거리가 올라오는데 이성으로 억눌렀다. 그때 쇼헤이의 말을 못 알아들은 지 팀장이 툭툭 나를 쳤다.

16560264933393.jpg“뭐라는 거야?”

16560264933399.jpg“검을 보여줄 수 없대요.”

16560264933393.jpg“도대체 왜?”

잘 하지도 못하는 일본어를 비즈니스 상황에서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정말 꼭지가 돌 거 같았지만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단어를 조합해서 말했다.

16560264933399.jpg“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16560264933438.jpg“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두 분의 비행기 비용, 머무는 비용 전부를 부담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쇼헤이는 일본 드라마에서 사과를 할 때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는 제스처를 했다. 지 팀장이 툭툭 다리를 쳐서 나는 울상을 지으며 쇼헤이가 한 말을 설명했고, 그도 나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 호텔 방에 들어와 지 팀장은 화를 터트렸다.

16560264933393.jpg“이게 무슨 경우야! 사람을 일본까지 불러놓고, 물건을 보여줄 수가 없다니!”

16560264933399.jpg“그러게 말입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내 지레짐작이 맞는 것 같아 생각에 잠겼다. 지 팀장이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16560264933393.jpg“지감 씨는 화도 안 나?”

16560264933399.jpg“왜 안 나겠어요. 다만, 심증이 굳어지는 기분이어서요.”

16560264933393.jpg“무슨 심증?”

16560264933399.jpg“쌍룡검을 훔친 사람이 이시하라 가문의 선조가 아닐까 싶었어요.”

지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16560264933393.jpg“에이. 설마. 아버지가 오래전에 선물 받은 거라고 했는데.”

16560264933399.jpg“고객들이 소장 경로에 대해 100%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16560264933393.jpg“그거야 그렇지…….”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면 만들어진 지 10년도 안 된 위조품인 경우도 있고, 선물 받은 물건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맡긴 담보라는 것이 뒤늦게 밝혀지는 경우도 있었다. 소장 경로에 대해 제대로 몰라서 잘못된 정보를 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대로 아는데도 불구하고 거짓말하는 경우도 꽤 많다. 거짓말하는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물건이 위조품처럼 보일까 봐, 직원이 자신을 얕볼까 봐 등등. 이런 상황을 아는 이유는 골동상을 할 때도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

16560264933399.jpg“집을 봤을 때는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느낌만 들었는데, 이렇게 아무 이유도 설명하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16560264933393.jpg“지감 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 이거 열 받는데.”

깊은 한숨을 쉰 지 팀장이 아쉬움을 날려버리려는 듯이 말했다.

16560264933393.jpg“차라리 잘됐어. 위탁 받아서 경매에 세우면 이슈는 많이 됐겠지만 욕도 많이 먹었을 거야.”

16560264933399.jpg“다른 나라도 아니고 일본에서 훔쳐간 물건이라면 아무래도 더 예민할 것 같긴 해요.”

16560264933393.jpg“아무래도 그렇지. 근데 일본이 아니고, 훔쳐간 물건이 아니더라도 예민하긴 마찬가지더라구.”

16560264933399.jpg“예를 들면요?”

어떤 일 때문에 지 팀장이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16560264933393.jpg“몇 년 전에 고종 황제가 독일인에게 하사한 그림이 다른 회사 경매에 나온 적이 있어.”

16560264933399.jpg“훔친 것도, 빼앗은 것도 아니고 독일인에게 고종 황제가 직접 준 거잖아요. 문제가 될 것이 있어요? 일본인이라도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16560264933393.jpg“업계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막상 그 그림이 경매에 나온다는 기사가 나니까, 소장자를 도둑 취급하면서 악플이 장난 아니게 달리더라구.”

하사 받은 그림에까지 그런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16560264933399.jpg“그렇게 격한 반응들이 나올 일인가요?”

16560264933393.jpg“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어. 우리나라 국민들, 일제 강점기랑 관련해서는 엄청난 트라우마와 부채감을 함께 갖고 있잖아. 그러니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지.”

일제강점기 때 유물을 비롯한 많은 것들을 빼앗겼다. 극심한 피해는 트라우마를 낳았고, 세대가 지나도 희미해질 뿐 잊혀지진 않았다. 또한 이런 극심한 피해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현재의 대한민국이 생겼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감사한 한편으로는 깊은 부채감이 남아있다. 그래서 트라우마와 부채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의 키워드가 조합되면 사람들은 훨씬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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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264933399.jpg“듣고 보니 그렇네요.”

16560264933393.jpg“비용 처리해 준다니까 그냥 여행 왔다고 생각하고 내일 돌아가자. 총괄님께 전화하고 올 테니까 일단 좀 쉬고 있어.”

16560264933399.jpg“네.”

물건을 보지 않게 된 이상 바로 돌아가는 것이 맞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비행기가 이미 출발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 팀장이 나가자 방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허탈감과 피로감이 몰려들어 나는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16560264933399.jpg“하아……. 일본까지 와서 물건도 못 보고 갈 줄은 몰랐네.”

위조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처럼 아예 보는 길이 막혀버릴 줄은 몰랐다. 눈을 감았고 그대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지 팀장은 아직도 방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몸에 힘이 생기면서 불쑥 쌍룡검을 보지도 못했다는 분노가 치솟았다. 이시하라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사람을 부르질 말든가, 이런 식으로 홀대해도 되는 건가! 게다가 쌍룡검은 원래는 우리나라 국보격인 물건이다. 감정이 팍 상하면서, 이시하라가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확인이나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테이블에 앉아 이시하라를 검색했다.

16560264933399.jpg“대대로 의사 가문이네.”

아까 우리가 간 집 근처에 병원이 크게 있는데, 거기가 바로 이시하라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원장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만났던 그 50대 남자 이시하라 쇼헤이였다. 문득 이시하라 가문의 선조가 1910년에 조선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시 기사들을 검색해 보았다.

16560264933399.jpg“오……! 있네!”

물론 성만 같은 다른 이시하라일 수도 있지만, 1905년에 한양에 진료소를 연 것이 기사로 남아있었다. 훔쳤다는 심증은 더 강해졌다.

16560264933399.jpg“직접 훔치진 않았어도 훔친 사람에게 구매했겠지.”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지 않아서 나는 눈을 벌겋게 뜨고 검색을 했다. 마치 이시하라 가문을 알면 쌍룡검을 되찾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폭풍 검색을 하다 보니 의외의 기사가 나왔다.

16560264933399.jpg“어……?”

몇 개의 정보들이 이어지면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16560264933399.jpg“설마 그럴 리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실제로 일어났을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이게 자꾸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지?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지만 머릿속이 뒤엉켜 빠르게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자 지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0264933393.jpg“지감 씨, 나야.”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헐레벌떡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강한 담배 냄새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평소 스칠 때 담배 냄새가 나긴 했어도 이렇게 쩔어 있는 경우는 없었는데, 답답한 마음에 줄 담배를 피운 모양이다. 반사적으로 숨을 참는 내 모습을 보자 지 팀장이 머쓱하게 웃었다.

16560264933393.jpg“냄새 많이 나지? 껌을 씹었는데도 이러네.”

16560264933399.jpg“괜찮아요. 총괄님하고 통화는 잘 하셨어요?”

16560264933393.jpg“응. 큰 기대는 안 하셨나 보더라구. 오늘 푹 쉬고 내일 돌아오라고 하셨어.”

16560264933399.jpg“팀장님, 연락 취했다는 아들분은 연락이 되나요?”

16560264933393.jpg“아니.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구. 딱 보니까 그놈이 아버지 허락도 안 받고 우리에게 연락한 거 같아. 분명 연락할 때는 아버지께 허락받고 한다고 했는데……. 미친놈! 그놈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헛걸음은 안 하잖아!”

16560264933399.jpg“진…… 진정하세요. 팀장님.”

16560264933393.jpg“아 미안. 갑자기 열이 올라서…….”

나는 눈치를 보다 말을 꺼냈다.

16560264933399.jpg“저 팀장님, 이왕 내일 가는 거 이시하라 쇼헤이 한 번만 더 만나고 가면 안 될까요?”

16560264933393.jpg“연락해도 만나 주겠어?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도 물건 한 번도 안 보여주고 이렇게 쫓아버렸잖아.”

16560264933399.jpg“병원으로 가면 안 만나 줄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구요.”

16560264933393.jpg“확인?”

16560264933399.jpg“네.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상상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맞다면 적어도 쌍룡검을 한번 보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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