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정계인사 (1)2021.05.29.
“앞으로 강정휘에게서 이상한 움직임이 발견되면 바로 보고하겠습니다.”
“보고요……?”
“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테지만…… 강정휘의 충직한 사냥개였던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건가? 혹시 강정휘가 김 비서를 나에게 이런 식으로 붙여 스파이로 써먹으려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날 강정휘에게 맞선 것이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아니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 이후 강정휘에게 회유를 받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나? 갖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스치는데 김 비서가 내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혹시…… 내키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그저 갑작스러워서 좀 놀랬습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죠. 하지만 무리하진 마세요.”
내가 미소를 짓자 그제야 김 비서는 안심한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 것, 후회하시지 않게 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아직은 김 비서가 의심스럽지만 기대하겠다는 말은 진심이다. 그가 만약 진심이라면 내게 제대로 된 정보를 가져올 것이고, 아니라면 나는 그를 역이용할 거다. * 묵직한 홍삼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이런 선물을 받으면 마음이 훈훈해야 하는데, 의심스러운 존재가 준 물건이라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만원인 지하철을 타야 하니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 타고 올걸.”
개찰구로 들어서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정연주에게서 온 전화였다.
“네. 선배님.”
[지감 씨…….]
떨리는 목소리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네.”
[정말 미안한데…… 회사로 다시 와줄 수 있어요? 우리 팀에서 도록에 가격을 잘못 써서 수정 스티커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스티커 작업이요?”
[네. 다행히 예전에 찍어놓은 스티커가 있어서 붙이기만 하면 되는데, 이천 권을 작업해야 하다 보니 도움이 필요해요.]
머리도 복잡하던 차에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네. 지금 갈게요.”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로 다시 돌아갔다. 가 보니 김 책임과 정연주, 그리고 다영이 산더미 같은 책을 쌓아놓고 스티커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어째서 다영이가 여기 있는 거지? 정연주가 나를 발견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지감 씨, 미안해요. 집에 가던 중이었죠?”
“다행히 지하철 개찰구에서 돌아왔어요.”
“다른 분들 연락드렸는데 다 올 수 없는 상황이라, 아무래도 오늘 이렇게 넷이서 밤 새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정연주가 다영을 보고 말했다.
“다영 씨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알려줘요.”
“네.”
나는 자연스럽게 다영의 옆자리에 앉았고, 다영은 도록을 펴서 설명해 주었다.
“119번 추정가에 스티커를 이렇게 붙여주시면 돼요.”
도록에는 ‘10,000,0000’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원래는 ‘10,000,000’인데 실수로 끝에 0이 하나 더 붙은 것이다.
“알겠어.”
나는 대답을 하고 곧바로 스티커 작업에 들어갔지만 마음처럼 집중이 되진 않았다. 그때 크게 꼬르륵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김 책임이 민망한 듯 웃었다.
“저녁을 안 먹었더니…….”
“죄송해요. 책임님, 제가 도시락 사가지고 올게요.”
아무리 스티커 작업이 바쁘다지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도시락으로 때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을 새려면 어쨌든 저녁을 든든히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지 마시고, 두 분 먼저 저녁 드시고 오세요. 밤 새야 하잖아요.”
“그래. 연주 씨. 밤샘 작업해야 하는데 저녁은 먹고 하자.”
“그럼 그럴까요.”
김 책임과 정연주가 떠난 사무실에는 다영과 나만 남았다. 나는 물끄러미 다영을 보았다. 박도희와 쇼핑 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온 것일까.
“도희랑 같이 나가더니 왜 혼자 왔어?”
“도희는 약속이 있고 저는 없어서요. 근데 오빠는 어디 들렀어요? 지하철을 이미 타고도 남았을 시간 아닌가.”
“김 비서님 만났어.”
다른 핑계를 댈 수도 있었지만 다영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김 비서’란 말에 놀라서 움찔한 다영의 반응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본의 아니게 일자리를 알선해줬거든. 고맙다고 찾아와서 홍삼까지 받았는데 기분이 영 찜찜해.”
“진심이 아닐 것 같아서요?”
정확하게 상황을 모르는데도 다영은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응. 맞아. ‘속아 넘어가 주자, 그럼 내가 이걸 이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라고 생각해 봐도 뭔가 탐탁치가 않아.”
“오빠가 왜 그런지 알려줄까요?”
“왜 그러는데?”
“착한 사람이니까.”
“으응? 난 전혀 안 착한데.”
착한 사람이라니, 사람을 의심하는 착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니요. 착해요. 오빠는 이용당할까 봐 찜찜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 상황을 의심하는 자신이 찜찜한 거지.”
다영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내가 느끼는 이 찜찜함의 정체가 김 비서를 의심하는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1년 전의 나였다면 이렇게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글 같은 곳에서 버티고 안경을 지키려, 또 나를 지키려 몸부림치면서 점점 의심은 커져 갔다. 이제는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겠다. 씁쓸함이 밀려드는 것을 애써 웃음으로 무마했다.
“오오. 꽤 그럴듯한 추론인데? 심리학박사 같다.”
“괜히 눙치려는 것 봐.”
“티 났어?”
“그럼 티가 안 날 줄 알았어요?”
다영은 다 알고 있다는 묘한 미소를 짓곤 말을 이어갔다.
“오빠가 하려는 건 의심이 아니라 확인이에요.”
“너무 합리화 아닌가?”
“그게 왜 합리화예요. 컴퓨터 하나를 살 때도 사양은 어떤지, 저장용량은 어느 정도인지, 가격은 괜찮은지 다 확인하고 사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건 그렇지 못하니까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당연히 필요한 거죠.”
“그런가?”
차근차근 예까지 들면서 말하니까 말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게 맞다고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네. 그래요. 남녀가 사귈지 말지 알아보기 위해서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요.”
어째서인지 ‘데이트’란 단어를 말하는 다영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빨간 홍조가 귀여워 딴지를 걸었다.
“그건 좀 비약인 거 같은데 그냥 넘어가줄게.”
“치이. 그냥 넘어가려면 그 말은 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투덜대면서도 다영은 빠르게 스티커를 붙여나갔다. 나는 그 모습에 자극 받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힐긋 나를 본 다영이 견제하듯 말했다.
“속도에만 초점을 둔 것 같은데, 나처럼 예쁘게 잘 붙여야 하거든요?”
“예쁘게 잘 붙이고 있거든. 속도에만 초점을 붙인 사람은 오히려 너인 거 같은데.”
“전 완전 잘 붙이고 있어요.”
어느새 다영에게서 느껴졌던 거리가 사라져 있어 자연스레 웃음이 났다. * 한지감을 만나고 김 비서는 집으로 돌아갔다.
“여보. 나 왔어.”
“여보.”
어여쁜 아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그녀를 따라 빙그레 웃던 김 비서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식탁에 앉아있는 강정휘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근처에 오셨다가 들르셨대요.”
“아. 그렇구나.”
김 비서는 아내를 의식해 강정휘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김 비서, 근처에 왔다가 잠깐 들렸어.”
“오시면 오신다고 전화라도 한 통 해주시죠.”
“우리 사이에 그런 게 필요 있겠어?”
묘한 미소를 띤 강정휘의 얼굴은 주먹이 나갈 정도로 얄미웠지만 그는 아내를 생각해서 참았다.
“여보, 집에 과일 없지? 대접하게 과일 좀 사와.”
“네. 알겠어요.”
아내가 나가자 김 비서는 험상궂게 인상을 썼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짓? 감히 나에게 그딴 말을 써!”
“그딴 말이요? 그거보다 더 심한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전 더 이상 당신의 사냥개가 아닙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내가 믿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목소리 낮추세요. 안 그럼 경찰 부르겠습니다.”
김 비서의 날카로운 눈빛이 진심임을 보여주었기에 강정휘는 한걸음 물러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한지감이 얼마를 준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2배를 주지. 다시 날 위해서 일해. 난, 안경을 가져야겠어.”
그녀는 욕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 건장한 김 비서조차도 움츠러들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김 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2배 정도로는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5배인 5억은 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죠.”
약이 오른 강정휘가 입술을 깨물자, 김 비서는 그럼 알아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 올리곤 나가는 문을 가리켰다.
“못 주시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죠. 이만 가시죠.”
“5억 주지.”
“이제 말이 좀 통하네요.”
“그 대신 한 달 내에 그 자식 구슬려서 안경을 빼내는 법을 알아내. 알아내지 못하면 이번에야말로 가만두지 않아. 알았어?”
“그렇게 하죠.”
씨익, 김 비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지하철역에서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갔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아 있기에 천천히 걸었다. 그때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돌아보니 다영이 발그레한 볼을 하고 달려왔다.
“다영아. 일찍 왔네.”
“프리뷰 시작하는 날이니까 뭔가 긴장되어서요.”
“맞아. 나도 긴장된다.”
직원으로 들어와 처음 맞는 경매이다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다영이 설렘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프리뷰에 우리가 위탁받은 미술품들이 전시되는 거잖아요. 오빠는 더 뿌듯하죠? 오빠가 위탁받은 작품이 떡하니 메인이 됐잖아요.”
“응. 정말 뿌듯해. 그래서 밤새 스티커 작업하면서도 좀 덜 힘들더라.”
“맞아. 우리 진짜 고생했잖아요. 그게 벌써 지난주네요.”
그날 사무실을 지킨 나와 다영을 포함한 4인은 밤새 스티커 작업을 했고, 덕분에 다음 날 도록은 예정대로 발송될 수 있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 준비한 경매라 그런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번에 낙찰률 높으면 좋겠다.”
“진짜 그랬으면 좋겠어요. 최고가도 막 나오고. 요새 경기가 안 좋아서 잘 나와도 낙찰률이 70% 초반이라고 하더라구요. 70% 후반도 최근 1년간 나온 적이 없대요.”
낙찰률이 80% 이상이면 잘된 경매였다.
“이번 메이저 경매는 80% 이상 나왔으면 좋겠다.”
“진짜. 그랬으면 좋겠어요.”
* 나는 고미술이 전시된 5층 전시장 데스크에 강민수와 함께 앉아 있었다. 김현아였으면 좋았을 텐데 왜 하필 강민수일까. 오후 내내 함께 앉아 있었지만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30분 후면 퇴근할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로였다. 나는 정면을 응시하면서 옆에 있는 존재를 잊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면서 그 시도는 무산되었다.
“지 팀장님하고 일본 출장 간 이유가 뭐예요?”
“위탁 받을 미술품을 보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그 미술품이 뭐냐구요.”
“아직 결정된 바가 없어서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약이 오를 때로 오른 강민수가 짜증스럽게 나를 노려봤다.
“됐어요.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어요.”
“그거 참 다행이네요. 계속 궁금하시면 제가 많이 난감할 것 같았거든요.”
“하…….”
강민수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웃자, 나는 보란 듯이 웃어주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고미술팀 한지감입니다.”
[지감 씨, 갑자기 VIP가 온다고 연락 왔어요! 퇴근 한 시간만 미뤄 줄 수 있어요?]
다급한 정연주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고스란히 전해졌다. VIP라면 재계 인사인가?
“가능합니다. 어떤 분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최기석 국회의원이에요. 알죠?]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었다. 1년 정도 남은 대선에서 최종 승자가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인물이었다.
“네. 뉴스에서 본 적 있습니다.”
[오늘 하필 지 팀장님과 김 책임님이 미팅을 하러 가셨고, 저도 고객과 식사하기로 한 상황이라 총괄님이 수행하시기로 했어요.]
그럼 나는 뒤에 강민수와 함께 배경처럼 서 있으면 되는 건가.
“네.”
[근데 최기석 의원이 현대미술보다 고미술에 대한 관심이 깊다고 해서, 지감 씨도 총괄님과 같이 수행해 줬으면 좋겠어서요.]
“제……가요?”
[네. 어려울까요?]
“…….”
정계인사와 대면한 적이 없어 썩 내키지 않는다. 내가 대답이 없자 조급해진 정연주가 말했다.
[총괄님이 거의 다 설명하실 거예요. 혹시라도 고미술 분야에서 총괄님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오면 지감 씨가 보조적인 역할을 해주면 돼요.]
의사를 물어보고는 있지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김도균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이 없어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30분 후 나는 김도균과 함께 텅 빈 로비에서 대기했고, 3명의 보좌관을 데리고 최기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영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3명의 보좌관 중 막내인 20대 후반의 남자는 온몸이 우락부락해서, 제일 뒤에 있는데도 시선이 갔다. 김도균이 환한 미소로 최기석을 맞았다.
“의원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탑 옥션 김도균 총괄이라고 합니다.”
“최기석입니다. 이렇게 신경써 주실 필요 없는데, 제가 괜히 연락을 드렸나 봅니다.”
글쎄. 정말 신경을 써줄 필요가 없다면 3명이나 되는 보좌관을 데리고 나타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또한 퇴근 시간이 지나서 왔다는 것 자체가 특별대우 아닌가. 언론에서 그의 검소함을 칭찬하던데, 경제적으로 검소할 뿐 마음이 검소하진 않은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난데없이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션 : 이번 메이저 경매에서 최기석이 선영주의 작품을 낙찰하면 4단계 정보가 공개됩니다.] 선영주 화가라면, 오 장관에게서 위탁받은 그 노란색 단색화다. 그걸 최기석이 낙찰하도록 하라고? 도대체 무슨 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