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정계인사 (2)2021.05.31.
[미션 : 이번 메이저 경매에서 최기석이 선영주의 작품을 낙찰하면 4단계 정보가 공개됩니다.] 선영주 화가라면, 오 장관에게서 위탁받은 그 노란색 단색화다. 그걸 최기석이 낙찰하도록 하라고? 도대체 무슨 수로? 머리가 멍해졌다. 하지만 그 상태로 있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김도균이 어서 인사를 하라며 내게 눈짓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기석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고미술팀 한지감입니다.”
인턴이라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내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저렇게 보좌관을 3명이나 달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기껏 인턴이 자신을 수행한다고 기분 나빠 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기석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반가워요, 한지감 씨.”
그냥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준다. 유명한 정치인이 이렇게 반응하면 기분 좋을 만도 한데, 이상하게 내 눈에는 인기 관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도균을 보며 최기석이 말을 이어갔다.
“고미술을 보고 싶은데 안내 가능할까요?”
“당연하죠. 이쪽으로 오시죠.”
김도균의 안내에 따라 최기석과 보좌관들이 움직이면서 나에게서 시선이 거두어졌다. 머릿속에 다시 미션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최기석이 선영주 화가의 그림을 응찰하는 것도 아니고, 낙찰하게 한다? 거의 불가능하다. 응찰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현재 내 입장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단 최기석은 내가 담당할 수 있는 고객이 아니다.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VIP를 인턴에게 맡길 회사는 없다. 외부에서 최기석과 연이 있었고 나로 인해 최기석이 탑 옥션을 찾았다면 모르지만, 그런 케이스가 아니다. 최기석의 담당 스페셜리스트도 아닌데 미술품을 추천하려면, 지난번 미션에 장희정을 움직였듯이 담당 스페셜리스트를 공략해야 한다. 그럼 한 다리를 걸쳐야 하기에 더 까다로워진다. 까다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자. 지난번에는 근현대미술 팀이었기에 그림을 위탁받아야 하는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달리 지금 고미술 팀 소속이기에, 선영주 화가의 작품을 담당 스페셜리스트에게 추천할 명분도 없다. 그러니 선영주 화가의 작품을 내가 직접 최기석에게 어필하려면 엉겁결에 수행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매우 조심스러운 자리이거니와, 바로 옆에는 훈련소 시절 무서운 교관을 떠올리게 하는 김도균이 있었다. 자칫 잘못 말을 던지면 탑 옥션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아. 정말 미치겠네. 머릿속이 복잡한데도 얼굴은 계속 웃는 낯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다. 김도균이 잘 설명하고 있어서 내가 커버해야 할 부분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최기석이 백자 불상을 보고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백자 불상은 처음 봅니다.”
“도자기에 문양이 들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백자로 제작되는 경우는 거의 없죠.”
“조선시대라고만 되어 있는데, 언제쯤으로 만들어졌습니까?”
“얼굴, 콧대 등의 양식을 보았을 때는 후기로 추정됩니다. 불상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싱긋 웃은 최기석이 말했다.
“불상보다는 불화를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고려불화가 좋은데, 아무래도 국내에서는 몇 점 없다 보니 구하기가 어렵네요.”
“그렇죠. 해외에 더 많은 고려불화가 있다는 것이 참 씁쓸해요.”
잠깐, 고려불화를 좋아하는 정치인이라고? 장문식의 사기에 이용되었던 아미타불화가 떠올랐다. 당시 난 왜 그 아미타불화를 현성 그룹과 도강 그룹에서 원하는지 정확하게는 몰랐다. 하지만 ‘고미술의 밤’에서 이 회장이 김용식을 시켜 나를 짓밟으려 했다가 실패했을 때, 권미애가 ‘정경유착’이란 힌트를 주었다.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 최기석이 내가 어렵게 구한 아미타불화를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업계에 있으니까 이렇게도 보게 되는구나. 참 기분이 묘하네. 이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최기석은 끄덕거리며 김도균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분명 우리나라 것인데도 해외에 더 많은 수가 있다니. 한지감 씨는 고려불화 좋아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좋아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월관음도가 공개되었을 때 제대로 보고 싶어서 한 시간 넘게 보기도 했습니다.”
도강 그룹 강 회장 덕분에 봤던 아미타불화가 개인적으로 더 인상적이었지만, 불교 미술은 모두에게 공개된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안전했다. 골동상을 하면서 비밀스럽게 봤던 작품들은 장물이 아니더라도 괜한 이야기가 튀어나와 소장자를 곤란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십중팔구 최기석이 갖고 있을 아미타불화 이야기를 꺼낸다고 치자. 내 말을 들은 최기석이 그거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반가워할까? 기업에게서 받은 뇌물성 물건이기에, 그런 물건은 본 적도 없다고 정색할 것이다. 최기석이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저도 그 작품 좋아합니다. 그게 몇 세기 작품이었죠?”
“14세기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맞아요. 요새 내 정신이 이렇다니까. 정말 화려한 작품이었죠.”
“네. 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전 세계 46점밖에 없는 수월관음도 중 한 작품을 본다는 것이 굉장히 특별한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수월관음도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사실이었지만 내 발로 걸어가서 본 건 아니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은 국립 박물관 중 최초로 수월관음도를 소장했고, 아버지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나를 억지로 끌고 갔다. 막상 가 보니 좋았지만, 가는 과정은 썩 아름답지 않았다. 내 말을 들은 최기석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지감 씨 이야기를 들으니 그때 감동이 다시 떠오르는 것 같네요.”
다른 유물로 옮겨가면서 최기석과 나의 대화는 끝이 났다. 출품된 고미술품을 다 둘러본 최기석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이곳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선영주 화가에 대해 뭐라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나는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혹시 근현대 미술은 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김도균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하며 최기석을 보았다. 동그란 눈을 한 최기석이 내게 물었다.
“시간이 빠듯해서 거기까지 보긴 어려울 것 같은데, 좋은 작품이라도 있어요?”
“선영주 화가의 작품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해서요. 고려불화와 다른데도 어쩐지 비슷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고려불화’라는 말에 최기석은 호기심을 가졌지만, 김도균은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냐는 듯 나를 노려본 뒤 애써 웃으며 말했다.
“바쁘신데 굳이 보실 필요 없습니다. 로비로 가시죠.”
“아니요. 지감 씨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궁금하네요. 그 그림만 보고 가죠.”
“네. 알겠습니다.”
김도균은 내게 눈치를 주면서도 최기석 앞에서는 편안한 미소를 유지했다. 근현대미술품이 전시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선영주 화가의 작품 앞에 섰다. 가로 130cm, 세로 100cm 정도 되는 화폭이 반복되는 노란색 일자선으로 꽉 차 있다. [ 150,000,000원 | 진 | 250,000,000원 ] 언뜻 보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 같아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선의 반복은 작가의 반듯한 정신을 캔버스로 옮긴 것이다. 가만히 그림을 보던 최기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떤 부분에서 고려불화와 비슷한지 찾지 못해서였다. 나는 분명히 ‘다르면서도 어쩐지 비슷하다’고 했지, ‘비슷하다’고는 안 했다. 고려불화와 이 그림의 공통점을 급조해서 만들어냈다.
“다른 느낌이지만 화려하면서도 더없이 섬세한 부분이 고려불화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군요.”
최기석은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옥션 회사 직원이라는 자리에 있으니, 그로서는 내가 자신보다 미술지식에서는 위에 있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전혀 비슷하지 않다는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가는 미적 안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나는 그런 부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처럼 선영주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선영주 화가의 작품을 보면 항상 곧은 정신이 보는 것 같아 한편으로 기분이 좋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강박증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부분은 의원님과 몹시 닮아 있네요.”
“그런 이야기를 듣기엔 제가 아직 미성숙해요.”
최기석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꼬리가 몹시 올라가 있었다. 김도균이 따가운 눈총을 보냈지만 나는 모른 척 최기석을 보며 웃었다. * 최기석을 배웅하자마자 김도균이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봤다. 김도균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안다. VIP의 담당이 되고 싶어 아부를 서슴지 않고 회사의 격을 떨어트리는 존재로 보이겠지. 시스템상 VIP가 배정될 수도 없는 위치라는 파악조차 못한 천둥벌거숭이로 보일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눈빛은 너무 노골적이다.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지른 줄 알겠다. 최기석이 있을 때는 모른 척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수도 없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리고, 손발을 어떻게 둬야할지 모르겠다. 안절부절 못하는 나를 김도균은 싸하게 말했다.
“잘못 행동한 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뭡니까?”
“아니 전…… 그냥 좀 더 설명드리고 싶어서…….”
“고려불화랑 선영주 화가의 그림이 비슷해요?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혀 다르다고 느낄 거예요.”
그래서 내가 다르면서 비슷하다고 했잖아.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나를 아주 죽이려 들겠지. 나는 굽는 오징어처럼 쪼그라들어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의욕이 앞섰나 봅니다.”
“들어나 보죠. 도대체 왜 그렇게 아부를 떠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최기석 의원이 본인 담당이 될 것 같아요?”
“제가 회사를 잘 모르지만, 인턴에게 VIP를 배정하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압니다.”
“그럼 정계인사 인맥이라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미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나는 애초에 최기석을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권이 없었고 안경은 내게 미션을 주었다. 억울한데 안경 이야기를 꺼낼 수 없으니 마땅히 할 대꾸가 없다.
“정계인사 인맥 있으면 좋죠.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인데요?”
“탑 옥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최기석 의원이 관심 가지는 고미술만큼이나 괜찮은 근현대미술 작품들을 위탁받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초과 근무를 하면서까지 수행을 하는 것이니만큼, 하나라도 더 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 말 부디 진심이기를 바랍니다.”
김도균의 표정이 살짝 풀렸고 나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저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봐요.”
“최기석 의원님은 지 팀장님이 담당하십니까?”
“왜 지 팀장에게 배정될 거라 생각하죠?”
“최기석 의원의 주 관심사가 고려불화이다 보니, 지 팀장님이 잘 맞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지 팀장이 담당 스페셜리스트가 된다면 그나마 일이 수월하다. 지 팀장은 나에게 우호적인 데다가, 쌍룡검 사건으로 나를 신임하고 있다. 내 의견을 무시하진 않을 것이다.
“그 부분은 인정하지만, 담당 스페셜리스트는 지 팀장이 아니에요.”
“혹시 이미 정하셨습니까?”
“네.”
지 팀장이 아니어도 내게 우호적인 인물이라면 된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내 앞에 있는 김도균만 아니면 된다.
“누구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한지감 씨 앞에 있는 사람이요.”
“네……?”
내 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김도균이잖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하지만 내 귀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그래요. 나 맞아요. 차기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VIP를 팀장급에서 감당할 순 없잖아요. 내가 최선의 선택지죠.”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 김도균은 싱긋 웃고 앞서 걸어갔다. 충격받은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김도균은 한 번도 순순히 내 의견을 들어준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이 제안했으면 순순히 받아들일 일도, 내가 말하면 반대하고 보는 인간이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저 비협조적인 인간을 움직여 최기석이 낙찰 받게 한다고? 차라리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것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