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정계인사 (4)2021.06.05.
한 작품이 낙찰되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면서 스크린에 선영주 화가의 노란색 단색화가 띄워졌다. 최기석이 이 그림을 낙찰받아야 미션을 성공한다. 확 조여드는 긴장감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제야 나는 현장 고객 중에 혹시나 최기석이나 보좌관이 있는지 둘러봤다. 하지만 역시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성향상 정재계 인사는 시간이 있어도 직접 경매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대부분 전화 응찰을 한다. 전화 응찰일 경우 담당 스페셜리스트가 고객과 통화를 하면서 대신 응찰에 참여한다. 직원들이 경매장 한편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사람은 바로 김도균이다. 김도균은 매처럼 날카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선영주 그림 응찰에 참여한다. 전화 상대가 최기석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온화한 미소를 띤 서정선이 그림을 설명했다.
“51번 선영주의 ‘정(正)’을 소개합니다. 밝은 색감과 곧은 선이 선영주 작품의 주요 특징을 잘 보여주는 2000년대 대표작입니다. 추정가는 일억 오천부터 이억입니다. 시작은 일억 삼천부터 오백만 원씩 올라갑니다. 일억 삼천!”
여기저기서 패들을 들면서 경쟁 같은 응찰이 시작되었고, 서정선은 패들을 날카롭게 짚어내면서 가격을 불렀다.
“423번 고객님, 일억 삼천오백. 일억 사천. 137번, 일억 사천오백. 94번 고객님, 일억 오천.”
137번이 김도균이 든 패들 번호였다. 경쟁적인 응찰 속에서 낙찰가는 순식간에 일억 팔천을 돌파했다.
“일억 팔천. 일억 팔천오백. 일억 구천.”
일억 팔천이 되자 다른 경쟁자들은 없어지고 94번과 137번만 남았다. 경매회사에서 하는 말이 있다. 낙찰가가 올라가는 데는 딱 두 명만 있으면 된다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일억 구천오백.”
이러다 최고가 찍는 것 아닐까. 안경으로 본 이 그림의 최고가는 2억 5천이었다.
“137번, 이억.”
2억을 찍자 서정선은 빠르게 숨을 고르고 멘트를 이어갔다.
“이억부터는 천만 원씩 호가하겠습니다. 94번 고객님, 이억 천. 137번 고객님, 이억 이천.”
안경이 최고가를 알려주었으니 이억 오천은 넘지 않는다. 그러니 1분도 지나지 않아 낙찰자가 정해질 것이다.
“94번 고객님, 이억 사천.”
김도균이 패들을 들지 않은 것을 보고 서정선이 말했다.
“이억 오천 없으십니까?”
빨리……! 빨리 들어라! 나는 눈이 튀어나올 듯 김도균을 봤다. 그가 패들을 올렸다. 그렇지!
“137번, 이억 오천.”
서정선의 시선이 곧바로 94번 고객을 보았다. 고객은 패들을 꽉 쥔 채 고민하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94번 고객에게 쏠렸다. 응찰을 계속할지 그만할지 알고 싶은 것이다. 나는 94번 고객이 응찰하지 않을 것을 안다. 이 그림의 최고가는 이억 오천이니까. 94번 고객을 보면서 서정선이 한 번 더 말했다.
“이억 오천 안 계십니까?”
94번 고객은 끝내 패들을 올리지 못했다.
“137번, 이억 오천만 원 낙찰입니다.”
서정선은 경매봉을 땅하고 두드려 낙찰되었음을 알렸다. 김도균이 통화한 고객이 정말 최기석이라면 미션이 성공했다는 메시지가 뜰 것이다. 근데 몇 초가 지나도록 메시지가 뜨지 않자 나는 불안해졌다.
“최 의원이 아니었던 건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시지가 떴다. [미션을 성공하셨습니다. 4단계 메시지인 작가와 연대가 제공됩니다. 물건에 따라 두 정보 중 하나만 제공되기도 합니다.] 성공했다. 성공했어!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던 나는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랐다. 김도균이 멀리서 나를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눈치챘나……?”
나는 보지 못한 척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경매장에서 빠져나왔다. * 허공에서 만난 4개의 맥주잔이 짠하고 부딪혔다. 박도희가 명랑하게 말했다.
“첫 잔은 원샷인 거 알죠오.”
“알지!”
다영이 쾌활하게 답했고, 나도 맞장구 쳤다.
“원샷 콜.”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잔을 시원하게 비워냈다. 첫 경매를 끝나고 마시는 술이라 다 기분이 좋았지만 강민수는 그렇지 못했다. 강민수가 위탁받은 4점의 그림 중 2점이 유찰되었기 때문이다. 힐끗 나를 본 강민수가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위탁한 작품이 다 높은 금액으로 낙찰되어서 기분이 좋은가 봐요?”
“네. 좋네요.”
얼굴이 벌게진 강민수는 더 말을 못하고 맥주를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위탁받은 소진열 화가의 작품 6점은 모두 추정가 이상으로 낙찰되었고, 오 장관에게 위탁받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은 작가의 그림 중 한국 시장에서 최고가를 찍었다. 사실 나는 그것보다 선영주 화가의 그림이 최기석에게 낙찰된 것이 더 좋았지만, 이것은 이 테이블에 앉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 소진열 화가의 작품 6점,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품과 선영주 화가의 작품 모두 내가 본 최고가로 팔렸다. 좋아야 하는데, 너무 행운이 몰려와서인지 경계심이 들기도 했다. 내 이야기에 다영이 신이 나서 말했다.
“이 팀장님이 오빠 칭찬 엄청 하신 거 알아요? 고미술, 근현대 안 가리고 작품에 대한 이해가 폭넓고, 위탁도 잘 받는다고.”
박도희가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이 팀장님이 우리 볼 때는 심드렁하면서, 오빠 볼 때는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잖아요. 같은 남자인데도! 빨리 다음 달이 와서 오빠랑 같이 일하고 싶으시대요.”
나는 장난스레 받아쳤다.
“그것 좀 부담스러운데. 기대에 부응하려면 정말 잘해야 하잖아.”
“에이. 괜히 엄살 떠는 것 봐.”
“그러니까요. 언니.”
하하호호. 모두 즐거운 가운데 강민수는 썩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저럴 거면 그냥 가지. 강민수랑 이렇게 사적으로 술을 마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다영에게만 경매 뒤풀이 겸 술을 마시자고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온 박도희가 같이 가고 싶다고 하면서 강민수도 끼게 되어 이렇게 되었다. 자리가 파할 때가 되자 강민수는 술이 잔뜩 취해 술주정을 부렸다.
“2차 가자, 2차!”
나와 다영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박도희는 그런 술주정을 받아주었다.
“그래요. 2차 가요오. 2차!”
다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가게?”
“아니요. 맞장구 쳐주는 거죠. 민수 오빠네 형이 데리러 온대요. 지감 오빠, 언니 좀 데려다 줘요.”
뭐가 그리 민망한지 다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 하나도 안 취했거든. 뭘 데려다 줘.”
“안 취했어도 데려다 줘야죠. 밤이 늦었잖아요.”
“네가 안 그래도 데려다 줄 생각이었거든? 가자. 다영아.”
“됐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영은 내 뒤를 쪼르르 쫓아왔다. 택시가 도착하자 우리는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인성동으로 가주세요.”
“네.”
“고마워요. 오빠.”
“고마울 게 뭐가 있어. 당연히 이게 맞지.”
“이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어요. 당연한 것도 실은 누군가의 배려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그런가.”
싱긋 웃는 나를 보며 다영이 얼굴을 밀착시켰다.
“고마우니까 비밀 하나 이야기해 줄까요?”
“무슨 비밀?”
“오늘 소진열 작가 그림 6점, 낙찰자가 한 명이라는 것 알아요?”
“아니, 몰랐어.”
“이 팀장님이 저에게만 슬쩍 이야기해 주셨어요. 누구일 것 같아요?”
6점을 높은 추정가 이상의 금액을 주고 샀다. 이 그림들이 낙찰자에게 분명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쳤다.
“조성오?”
“맞아요! 팀장님이 비밀이라고 했으니까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걱정 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국회의원 조성오, 그러니까 위탁자 권미애의 전남편이다. 전부인은 이혼하고 5년 주기로 받았던 그림을 처분했고, 전남편은 그 그림을 샀다. 이 이상한 조합은 뭘까?
“이유가 뭐래?”
“이유에 대해서 딱히 이야기한 것 같진 않아요. 추억이 담겨 있는 그림이니까 되찾고 싶은 거 아닐까요.”
“이미 헤어진 마당에?”
“헤어져도 추억마저 없애고 싶진 않잖아요. 왜 그런 거 있지 않아요? 헤어져도 막상 사진은 지우기 힘든 거.”
이해하기가 어려워 나는 갸우뚱거렸다.
“그 사람이 그리워서?”
“그 사람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때가 그리운 거죠.”
“그런가……. 나는 잘 모르겠어.”
“첫사랑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텐데에. 첫사랑과 관련돼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물건 있잖아요.”
“없는데?”
“……거짓말.”
“진짜 없어.”
정말 없다. 첫사랑에 대해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관련된 물건은 없다.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감정이 정리되는 대로 상대의 흔적을 모두 지우는 편이다. 그 사람이 아닌 그때가 그리운 적은 있지만, 추억을 되새기는 건 기억으로 충분하다. 단호한 나를 보고 다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안 그렇게 생겨서 사람이 은근 냉정해.”
“그래. 냉정한 사람이라 너 먼저 데려다 준다, 됐냐?”
“알았어요. 냉정한 건 좀 너무한 것 같으니까 츤데레로 해줄게요.”
“됐거든.”
다영과 말장난을 하면서도 조성오가 왜 그 그림들을 사간 건지 나는 궁금했다. 다영의 말대로 추억 때문인 걸까? * 출근하자마자 김도균의 호출을 받아 회의실에서 그와 마주했다. 아무래도 최기석 의원 때문에 나를 부른 것 같았다. 경매가 끝나고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내내 정신이 없다가, 주가 바뀌고 나서야 짬이 나서 나를 부른 것이다. 밀폐된 장소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 둘이 있으려니 벌써부터 숨이 막혀 오는 것 같다. 내 얼굴이 뚫어질 정도로 김도균은 빤히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최기석 의원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 있습니까?”
“번호도 모르는데 어떻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겠습니까.”
SNS로 DM 보낼 생각은 했지. 하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그래요? 정말 연락한 적 없어요?”
“네. 없습니다.”
사실이었기에 거리낄 것이 전혀 없었다. 김도균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내 당당한 태도에 한 발짝 물러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도리어 질문했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경매일 당일에 최기석 의원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 전까지는 백자 불상을 응찰하기로 말이 되어 있었는데, 대뜸 선영주 화가와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품을 응찰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
아.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품도 최기석이 낙찰받았구나. 안경에서 본 최고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오 장관에게 엿을 먹이고 싶은 최기석의 강한 욕망이 작용해서였다. 앙심의 힘이란 대단하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모른다는 표정을 유지해야 했다. 김도균은 쉬지 않고 쏘듯이 말했다.
“어디서 무슨 말은 들었는지 선영주 화가의 작품이 투자 가치가 있다고, 제가 말리는데도 높은 추정가보다 훨씬 높은 금액으로 응찰하더군요.”
“작품이 마음에 드신 거 아닙니까?”
“하필이면 오 장관님이 위탁하신 딱 두 작품을요?”
“제가 선영주 화가의 그림에 대해 설명한 것이 인상에 남아서 응찰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때 최기석 의원 표정 못 봤습니까? 그림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지감 씨가 고려불화랑 그 그림이 비슷하다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더 그랬다구요.”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나도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김도균 앞에서 이렇게 꿍얼거릴 수는 없기에, 나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의욕이 앞서서……. 근데 정말 최 의원님 일은 모릅니다.”
“알겠어요. 그만 나가요.”
“네.”
나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회의실에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핸드폰이 지이잉 울렸다. 지 팀장에게 온 메시지였다. ‘지감 씨, 옥상으로 좀 와.’ 이 추운데 옥상으로 가야 한다니. 나는 코트를 챙겨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를 본 지 팀장이 황급하게 담배를 껐다.
“어. 지감 씨. 왔어?”
“네.”
“총괄님이 뭐 때문에 부르신 거야?”
“아……. 그게.”
나는 회의실에서 오갔던 대화를 간략하게 지 팀장에게 전달했다. 지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총괄님이 참 중립적이신 분인데 말야. 유독 지감 씨에게는 그러지 못하시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나 봅니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마. 언젠가는 총괄님도 지감 씨 진심 알아주실 거야.”
“네. 팀장님.”
부디 그게 인턴이 끝나기 전이길 빈다. 그러지 않다면 정직원이 되기도 힘들 터이고, 된다 하여도 가시밭길 예약이다.
“근데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야. 하아…….”
지 팀장의 짙은 한숨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말씀하세요.”
“저…… 이런 말 좀 그런데, 지감 씨 아버님을 설득할 방법이 없을까?”
그제야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이순신의 쌍룡검은 얼마 전 입고되어 감정을 마쳤다. 감정 결과 ‘조선미술대관’에 나온 그 쌍룡검이 맞다는 결론이 났다. 절차대로 지 팀장은 가격 협상을 시도했지만, 아버지가 회사의 가격에 맞춰주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를 설득할 방법이요?”
“응…….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총괄님이 내정가 올리는 건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시지, 지감 씨 아버님도 물러서지 않으시지……. 그래서 너무 힘들어서 묻는 거야. 이러다 쌍룡검이 다른 쪽에 넘어가는 건 아닌지 너무 불안해서 내가 요새 잠도 잘 못 자.”
쌍룡검이 다른 곳에 넘어가는 것만은 나도 피하고 싶다. 내 손으로 쌍룡검을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어그러진다. 하지만 칼 같은 아버지를 설득할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