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우수정 작가 (1)2021.06.19.
[오빠. 어제 그림 보여주셨던 작가요.]
“아. 우수정 작가?”
[영어 이름은 말씀 안 하셨어요?]
“응. 말씀 없었어. 최 교수님은 그냥 우수정 작가라고만 했는데……. 왜 그래?”
[혹시…… 제가 아는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최 교수님에게 다시 확인해 주세요. 그 다음에 설명드릴게요.]
“응. 알았어.”
아는 작가일지도 모른다고? 뭐 때문에 다영이 이러는 건지 정말 궁금해졌다. 일단 궁금함을 뒤로하고 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감 씨! 어쩐 일이에요?]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뭐든 다 물어봐요!]
“어제 보여주신 그림 말입니다. 작가님 성함이 우수정 작가님이라고 하셨는데요, 혹시 영어 이름은 없으신가요?”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그럼 그림 소장자분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직접 확인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번거롭게 하는 것 아니에요? 안 그래도 폐를 끼친 거 같아서 미안한데…….]
어제 일로 나에게 많이 미안한 모양이었다. 보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번거롭지 않아요. 제 일인데요.”
[고마워요. 그럼 연락처 보낼게요.]
“네. 감사합니다.”
통화가 끝나고 최 교수가 바로 소장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보내왔고, 나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적당히 밝은 톤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도민철 교수님, 탑 옥션 한지감입니다. 최석훈 교수님께 소개받고 연락드렸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도민철입니다.]
“판매하시려는 그림 작가님 성함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우수정 작가님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혹시 작가님의 영어 이름을 알고 계신가요?”
[영어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정보는 이미 확인했지만, 나는 다영의 반응이 걸려 몇 가지를 더 물어보기로 했다.
“사진에는 서명 부분이 잘 안 나왔던데, 서명 부분을 제대로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그림은 어떻게 소장하시게 되었나요?”
[아내의 친구가 선물한 그림이에요.]
“그렇군요. 다시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전화를 마친 나는 다영에게 전화를 걸기 전 인터넷으로 ‘우수정’의 이름을 다시 검색해봤지만 나오는 건 없었다.
“유명 화가는 아닌 것 같은데.”
다영은 왜 그토록 심각했을까? 그때 도민철에게 서명 사진이 도착했다. 영어 필기체로 되어있는 서명이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날 듯 나지 않아 다영에게 사진을 보냈고, 30초도 지나지 않아 다영에게 전화가 왔다.
[설마…… 이게 우수정 작가 서명이에요?]
“응. 이게 서명이래. 영어 이름은 모른다고 하고, 그럼 차라리 서명을 보는 것이 확실할 거 같아서 사진 받았어. 아만다라고 쓰여 있네? 이 서명 어디서 많이 봤는데…….”
[당연히 많이 봤겠죠. 아만다 우의 서명이니까. 물론 사진으로만 봤지만…….]
“잠깐만, 우수정이 아만다 우라고?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한 그 아만다 우?”
[네! 동일인물이에요!]
아만다 우, 그녀는 80년대 미국의 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이들이 낙서한 것 같은 그림체를 가지고 있어 동양의 바스키아로 불렸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까지도 그녀는 바스키아와 비슷했다.
“하지만 양식 자체가 다르잖아. 내가 받은 사진은 추상화야.”
[아만다 우, 그러니까 우수정 화가는 죽기 직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그런데 외부에는 그것이 어떤 그림인지 공개된 적이 없었죠. 측근들을 통해서 겹겹이 원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뿐이에요.]
뭔가 소름이 돋는다. 여태까지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그림이라니……!
“그럼 우리가 본 그림은 우수정 화가가 죽기 전에 그린 그림이라는 거야……?”
[그럴 확률이 있죠. 물론 진짜라는 전제하에서요.]
만약 도 교수가 소장한 그림이 정말 아만다 우의 작품이라면, 경매에 세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슈가 될 수 있었다.
“진짜 고마워. 잘되면 한턱 쏠게!”
[한우로 꼭 쏴요!]
“알았어.”
* 기분 좋은 점심 회식을 끝내고 카페에서 음료를 테이크 아웃해서 돌아왔다. 그 음료를 들고 탕비실로 가서 음료의 주인이 오기 기다렸다. 잠시 후, 음료의 주인인 다영이 왔다.
“핫초코에 생크림 듬뿍 넣은 거야.”
“자주 먹으면 살 찌는데에.”
살짝 고민하는 표정이 보이자 나는 음료를 회수하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재빠르게 다영이 음료를 가져갔다.
“안 먹는다고는 안 했거든요?”
“진작에 가져갔으면 좋잖아.”
“어헛. 은인에 대한 태도가 너무 뻣뻣하십니다?”
“고맙다. 고마워. 됐냐?”
“알면 됐어요오. 소장자랑 만나기로 했어요?”
“응. 내일 만나기로 했어.”
다영과 전화를 마치자마자 다시 도 교수에게 연락해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위탁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그건 안 했어. 실제로 확인한 뒤에 말해도 될 것 같아서.”
“그렇죠. 아무래도 진작이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달콤한 핫초코를 마신 다영의 눈빛은 단번에 영롱해졌다.
“진작이면 좋겠다. 우리나라 옥션에서는 한 번도 아만다 우의 작품이 다뤄진 적이 없잖아요.”
“그렇지.”
아만다 우의 작품은 그녀가 활동했던 뉴욕에서 주로 거래되었다. 한국인 중에도 그녀의 그림을 구매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옥션에는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근데 그 소장자는 어떤 경로로 소장하게 된 거예요? 갤러리에서 직접 구매하셨나?”
“아니. 사모님이 친구에게 받은 거라고 하더라.”
“아만다 우의 그림, 그것도 죽기 전에 그린 그림을 줄 정도면 굉장한 우정이네요.”
“그렇지?”
“오빠. 꼭 위탁 받아요. 그럼 제가 도록 원고 아주 기깔나게 써 줄게요!”
“최선을 다해야지.”
“쓰읍!”
장난스레 미간을 찌푸린 다영이 말했다.
“그렇게 약한 소리 하지 말구요!”
“알았어. 꼭 위탁받아 올게. 됐냐?”
“됐어요.”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다영은 흥얼거리며 핫초코를 마셨다. 그런 다영을 보다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근데 넌 아만다 우가 우수정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검색해도 안 나오던데.”
“아아.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잠깐 아만다가 전속 계약된 갤러리에서 알바한 적이 있었대요. 그때 직원들이 아만다라는 이름으로 안 부르고 크리스탈이라고 불렀다고 하더라구요. 한국 이름이 수정이라서요. 수업시간 때 지나가듯이 이야기했거든요.”
살짝 멍해졌다. 세계는 이어져 있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선생님이 그 갤러리에서 일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야기네.”
“한 가지가 더 있죠. 제가 그 기억의 단편을 비상한 머리로 떠올리지 않았다면, 몰랐을 이야기죠.”
으스대는 다영의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귀여웠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거기에 6년 전에 아만다 사망 이후 났던 기사를 떠올리면서 그 그림이 아만다 우의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날카로운 추리력까지 더해져서 이게 가능해진 거죠.”
“아주 고맙습니다. 정다영 님. 덕분에 아만다 화가의 그림을 영접합니다.”
“알면 됐어요!”
눈을 마주친 다영과 나는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 다음 날 오후, 나는 도 교수의 집을 찾았다. 도 교수는 아내와 함께 나를 맞아주었다. 도 교수의 표정은 한눈에 봐도 선하고 소탈해 보였다.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아닙니다.”
나는 명함을 도 교수에게 주면서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탑 옥션 한지감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러면 다시 인사드리죠. 도민철입니다. 이 사람은 내 아내이자 그림 소장자예요.”
“이……경숙이에요.”
도 교수의 아내 이경숙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낯가림이 심한 사람인 듯했다. 분위기를 풀 겸 이경숙을 칭찬했다.
“사모님이 미인이시네요.”
“그렇죠? 내가 첫눈에 반해서 청혼했다니까요?”
“…….”
칭찬에도 이경숙은 사무적인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원래 감정 표정이 적은 사람인 모양이다. 하지만 도 교수는 그런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했다. 아내를 볼 때면 자동으로 미소가 나왔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버지와 저렇게 알콩달콩 살아가셨을까? 따뜻한 눈길로 아내를 보다 뒤늦게 생각이 난 듯, 도 교수가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그림을 보여드려야죠. 이쪽으로 오세요.”
도 교수는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곳에 사진에서 봤던 그 그림이 한쪽 벽면에 걸려있었다. 가로 세로 2m 정도 되는 큰 사이즈였다. [ 0 | 진 | 4,000,000,000원 | 2010년대 / 아만다 우 ] 크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 압도당하면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던져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우주로 던져진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런데 이상하게도 포근하고도 따듯한 느낌이 들었다.
“멋지죠?”
도 교수의 말에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네. 정말 멋져요.”
사진으로 볼 때는 이런 아우라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엄청났다. 한참을 그림에 압도되어 있다가 뒤늦게야 최고가가 눈에 들어왔다. 사십억이라니! 적정가는 아니겠지만, 최고가가 사십억인 것도 대단했다.
“정말 좋은 작품입니다.”
“좋은 갤러리에 소개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슬슬 위탁 이야기를 꺼내야 할 시점이었다.
“갤러리 말고 옥션은 어떻습니까? 탑 옥션에 위탁하셨으면 합니다.”
갑작스런 제안에 도 교수의 눈이 커졌다.
“옥션에 위탁한다구요?”
“네. 내정가를 높게 약속하지는 못하지만…….”
그때였다. 쟁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도 교수가 밖으로 나갔고, 나도 뒤를 따랐다. 유리잔 두 개가 산산이 부서지고, 오렌지 주스가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었다. 그 앞에서 도 교수의 아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여보. 괜찮아?”
“음료를…… 내가려고 했는데…… 손이 미끄러졌어요.”
“괜찮아. 치우면 되지. 당신 다치지 않았어?”
“전……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과 달리 도 교수의 아내는 혼이 반쯤 나가 있었다. 도 교수는 아내를 조심스레 그 난장판에서 데리고 나와 소파에 앉혔다. 아내가 진정 되고 나서야 나를 보고 미안함을 전했다.
“손님을 두고 소란스러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옥션……?”
“위탁이요.”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고 연락 주세요.”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긍정적인 답변이 오길 기대하면서 나는 그 집에서 나왔다. * 탕비실에서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땅 꺼지겠어요.”
고개를 돌리니 다영이 보였다.
“한숨이라도 안 쉬면 너무 답답해서 그래. 벌써 주가 바뀌어서 월요일인데 아무 연락도 없으니까.”
“아만다 그림 말하는 거죠?”
“응.”
“연락해 봤어요?”
“당연히 해 봤지. 그런데 연락이 안 돼.”
고객과 연락이 안 되는 건 또 처음이라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죠. 좀 더 기다려 보세요.”
“머리로는 아는데 너무 답답하다.”
“그 느낌 잘 알죠.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건 아는데,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너어무 답답해요.”
“그니까. 팀장님들도 기대하는 눈치라 더 초초해.”
“아무래도 그렇죠.”
어쩌면 아만다 우의 그림을 위탁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가 현재 소속된 온라인팀 이 팀장과 위탁받으면 이후 단계를 진행할 근현대미술팀 서정선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말하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위탁하겠다는 연락이 왔는지를 하루에 5번도 넘게 물어 온 것이다. 무언가 생각난 다영이 찰싹 박수를 치며 물었다.
“그림 실제로 봤죠?”
“응.”
“어땠어요?”
“진짜 엄청났어. 사진으로 볼 때는 전혀 그런 느낌 없었는데, 직접 보니까 우주로 던져진 느낌이 나더라니까.”
“오호. 나도 직접 보고 싶다. 아만다 그림이 맞았어요?”
“응. 서명이 사진하고 다를까 봐 걱정했는데, 똑같더라. 아…….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못한 게 아쉬워.”
나는 아쉬워서 얕은 한숨을 쉬웠다.
“아 참. 소장자분은 모르시죠. 아만다 우의 그림이라는 걸요.”
“응. 빨리 나와야 하는 상황이라 거기까지 말씀을 드리진 못했어.”
그때 쑥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일부러 말 안 한 것 아니에요?”
김도균이 탕비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한 것이다.
“일부러 말을 안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그는 커피를 머그컵에 따르면서 말했다.
“알면 한지감 씨가 아니어도 다른 선택지가 생길 테니까.”
“아닙니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말을 마친 김도균은 설명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커피를 가지고 쌩하니 나가버렸다. 아! 열받아! 머리를 흩트리는 나를 다영이 안쓰러운 눈길로 봤다.
“너무 신경 쓰지 마요. 그냥 하신 말씀일 거예요.”
“아니. 내가 하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들어 해.”
“언젠가 총괄님도 알아주실 거예요. 오빠 진심.”
“그럴 날이 올지 모르겠다.”
이제는 그만 그 희망을 접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핸드폰 액정에는 그토록 연락오길 원했던 도 교수의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도 교수님!”
[네. 한지감 씨……. 연락 못해서 미안해요. 그동안 아내가 아파서 정신이 없었어요.]
“사모님 몸은 괜찮으세요?”
[이제 괜찮아졌습니다. 근데…… 아내가 그림을 팔고 싶지 않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