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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스파이 (2) (92/226)

92화 스파이 (2)2021.07.03.

16560271062923.jpg“괘씸하기로 치면 제가 제일 심하죠. 이 모든 일이 저 때문에 생긴거잖아요. 제가 제대로만 했어도 강민수 씨가 스파이 같은 일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에요.”

16560271062929.jpg“맞아. 강민수, 아주 구질…….”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이수지가 말을 멈췄다. 나는 굳은 얼굴로 이수지를 응시했다.

16560271062923.jpg“역시 강민수였군요.”

16560271062929.jpg“감히 나를 떠봐?”

이수지가 눈을 부라리며 압박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16560271062923.jpg“저도 떠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확인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건지 말입니다.”

16560271062929.jpg“끝까지 잘못한 거 없다?”

16560271062923.jpg“…….”

자기가 잘못해 놓고 내 잘못인 양 말하는 건 아주 고질적인 병이다. 병. 애초에 상류층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건가? 화가 난 이수지가 거칠게 숨을 내쉬는 꼬라지를 정말 보기 힘들었다. 더 있다가는 욕만 오갈 것 같아서 일어섰다.

16560271062923.jpg“기분 상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가보겠습니다.”

16560271062929.jpg“한지감, 거기서. 당장 사과해!”

뭘 사과하라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욱한 나는 실리보다 감정이 앞섰다.

16560271062923.jpg“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16560271062929.jpg“한지감!”

그래서 이수지가 내 뒤통수를 향해서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사무실 앞에 있는 수행원에게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는데 나를 막았다.

16560271091811.jpg“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16560271062923.jpg“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로 들어가서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이게 제가 잘못한 상황입니까?”

16560271091811.jpg“관장님 입장에서는…….”

16560271062923.jpg“저도 제 입장이란 것이 있습니다. 관장님이 큰 손님이셔서 여태까지 최대한 맞춰드렸던 건데,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16560271091811.jpg“…….”

수행원도 할 말이 없는지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이수지가 탑 옥션에 요구한 것은 소장자의 주소였다. 이는 명백히 규정에 위반되는 것이었고, 상도에도 어긋나는 행위였다. 나는 수행원을 지나쳐 현성 미술관을 빠져나오며 이를 악물었다. 강민수, 네가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쳤다 이거지. 이런 놈인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네가 이렇게 원하니 전면전을 해주지.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 회사로 복귀한 나는 바로 이 팀장에게 갔다.

16560271062923.jpg“팀장님, 잠깐 탕비실에서 차 한잔 하시죠.”

1656027109184.jpg“그래.”

이 팀장과 탕비실로 가는데, 강민수가 곁눈질로 힐끗거리는 것이 보였다. 쫄리긴 하나 보지? 탕비실로 들어서자마자 이 팀장이 물었다.

1656027109184.jpg“이수지 관장 만나러 간다더니, 무슨 일 있었어?”

16560271062923.jpg“네. 있었습니다. 누가 이수지 관장에게 정보를 흘렸는지 들었습니다.”

1656027109184.jpg“이수지가 정보를 아는 것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우리 내부 사람일 줄은……. 정보를 흘린 사람이 누구야?”

16560271062923.jpg“강민수 인턴입니다.”

1656027109184.jpg“뭐……?”

많이 놀랐는지 이 팀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1656027109184.jpg“도대체 왜……?”

16560271062923.jpg“……그건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1656027109184.jpg“그렇지. 그건 지감 씨가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지. 강민수 씨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는 일이지. 하지만…… 이건 내가 추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16560271062923.jpg“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힘겹게 입을 연 이 팀장이 말했다.

1656027109184.jpg“……총괄님께 말씀드려야지. 일단 내색하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 있어.”

16560271062923.jpg“네.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왔고, 이 팀장은 곧장 김도균에게 갔다. 최대한 자연스레 일에 집중하려 했지만, 뭔가 눈치챘는지 강민수의 시선이 계속 나에게 꽂혔다. 그 시선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그래, 마음껏 봐라. 곧 너는 파국을 맞을 거다. 그때까지는 넓은 마음으로 버텨주마.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이 팀장이 말했다.

1656027109184.jpg“한지감 씨, 강민수 씨. 지금 회의실로 와요.”

왜 나를 부르지? 혹시 스파이를 확인한 사람이 나이기 때문인가? 그때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었다. 김도균은 아직도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 일도 내가 강민수를 꺾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거라 여길 수도 있다. 김도균이 그렇게 나온다면 내 입장은 굉장히 불리해진다. 물론 증거는 있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아까 이수지와의 대화는 녹음해두었다. 하지만 김도균이 그 녹음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수지에게 다시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어렵다. 나에게 화가 난 이수지가 강민수가 이런 일을 벌였다고 순순히 말해줄 리 없었다. 아까 너무 감정이 앞서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회의실 의자에 앉았다. 이런 상태라는 것을 강민수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다. 이 팀장이 마지막으로 들어오고 회의실에 문이 닫히자, 김도균이 나를 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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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27113146.jpg“한지감 씨, 아만다 우의 유작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언제죠?”

16560271062923.jpg“지난주입니다.”

1656027113146.jpg“정확하게 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죠?”

이건 완전한 취조다. 김도균은 나를 의심한다. 울컥했지만 지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16560271062923.jpg“골동상으로 일할 때 알게 된 분이, 지인의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확인해 보니 아만다 우의 유작이었습니다.”

1656027113146.jpg“그 사실을 회사의 누구에게 보고했나요?”

16560271062923.jpg“저는 이 팀장님께 보고 드렸고, 제 일을 도와준 정다영 씨는 자신의 팀의 서정선 팀장님께 보고드렸습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이렇게 강민수까지 두고 왜 말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도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질문을 이어갔다.

1656027113146.jpg“아만다 우의 유작을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인데, 자랑삼아 다른 직원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16560271062923.jpg“…….”

그러니까 지금 내가 자랑삼아 다른 직원에게 떠들어댔고, 그걸 강민수에게 덮어씌웠다는 그런 말인가? 화가 나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1656027113146.jpg“대답하세요. 한지감 씨.”

16560271062923.jpg“그런 적 없습니다.”

1656027113146.jpg“왜 그랬죠?”

흥분한 내가 소리치듯 말했다.

16560271062923.jpg“이런 일이 생길까 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1656027113146.jpg“이런 일이라면, 이수지 관장이 소장자를 알고 싶다고 회사를 찾아온 일을 말하는 것이 맞나요?”

16560271062923.jpg“네! 도대체 왜…….”

김도균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1656027113146.jpg“그러니까 한지감 씨는 이.런.일.이 생길까 봐 미리 보안에 신경 썼군요.”

16560271062923.jpg“네. 그렇습니다.”

1656027113146.jpg“그런데 이수지 관장은 어떻게 알고 회사에 찾아온 걸까요?”

16560271062923.jpg“그건 저도…….”

1656027113146.jpg“지금 저는 한지감 씨에게 물은 것이 아닙니다. 강민수 씨에게 물은 거죠.”

날이 선 시선이 꽂힌 곳은 내가 아닌 강민수였다. 강민수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16560271189767.jpg“저는…….”

1656027113146.jpg“강민수 씨. 사실을 제대로 이야기한다면 이번엔 그냥 넘어가죠.”

뭐야. 나를 의심하는 게 아니었네? 눈물을 글썽이며 강민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16560271189767.jpg“……정말 죄송합니다…….”

어서 말해. 날 제끼고 싶어서, 이수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정보를 넘겼다고! 고개를 떨군 강민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6560271189767.jpg“이수지 관장에게 연락이 와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뭐…… 뭐가 어째? 연락이 와서 어쩔 수가 없어? 힘겨워하는 가증스런 모습을 보이며 강민수는 말을 이어갔다.

16560271189767.jpg“거절하면…… 앞으로 미술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 협박했습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됐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뵐 면목이 없습니다…….”

비련의 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기가 막힌 나와 달리 김도균과 이 팀장은 어느 정도 공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 차리세요! 이거 다 쇼라구요! 이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다. 이번에 넘어가면 강민수는 잠시 몸을 사리겠지만, 그 이후에는 보란 듯이 나를 더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16560271062923.jpg“정말 협박당한 거라면…….”

내가 말하려는데 김도균이 손을 들어 하지 말라는 표시를 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닫았다. 지그시 강민수를 보던 김도균이 입을 열었다.

1656027113146.jpg“이수지 관장에게 협박을 받았다면,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였을 거라고? 그럼 이수지랑 대거리하고 온 나는 뭐가 되는데! 강민수가 한 짓이 만천하에 드러날 거라는 희망은 어느새 송두리째 흔들렸다. 강한 실망감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얼얼한 여운을 주어 멍해졌다. 이 팀장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6027113146.jpg“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어요.”

16560271189767.jpg“정말 죄송합니다……. 어떤 처분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김도균은 단호하지만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027113146.jpg“따로 징계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땐 그냥 넘어가지 않아요. 알겠어요?”

16560271189767.jpg“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정말입니다.”

1656027113146.jpg“좋아요. 이만 가 보세요.”

16560271189767.jpg“감사합니다. 총괄님……!”

연신 고개를 숙인 후 강민수는 회의실을 떠났다. 나는 그 모습이 환영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겨우 증거를 잡아 강민수를 잘라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이렇게 끝이 나다니……. 하늘도 무심하다.

1656027113146.jpg“정신 차리세요. 한지감 씨.”

16560271062923.jpg“…….”

고개를 돌리니 김도균이 깐깐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규정을 어긴 강민수에게는 천사가 따로 없더니, 내 앞에서는 폭군이다. 그래. 더 이상 기대도 없다. 네 마음대로 해라.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너무 충격을 받아서인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이 팀장이 김도균을 보면서 얕은 한숨을 쉬었다.

1656027109184.jpg“역시 이수지 관장에게 이미 들은 거 같죠?”

1656027113146.jpg“아니길 바랐지만 그런 것 같군요.”

이수지에게 이미 들었다니, 이게 무슨 소리지?

16560271062923.jpg“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지금 상황이 힘이 빠지는지 이 팀장의 눈동자는 반쯤 풀려있었다.

1656027109184.jpg“아 그게. 지감 씨에게 들은 이야기 총괄님께 말씀드리니까, 이수지 관장이 이미 연락해서 강민수 씨가 대비책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시더라구.”

1656027113146.jpg“그래도 만에 하나 그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죠. 결과적으로는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힘 빠지는 건 김도균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16560271062923.jpg“일부로 취조하듯이 저를 다루신 거군요. 강민수가 방심하게 하려고.”

그렇게 강민수가 사실을 털어놓긴 바랐지만, 그는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서 빠져나갔다. 이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추측이 사실임을 확인시켜줬다.

1656027109184.jpg“맞아. 지감 씨. 역시 눈치가 빨라.”

16560271062923.jpg“그럼 먼저 귀띔이라도 해주시죠……!”

강민수가 그냥 빠져나간 상황이 아니란 것이 안도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는지 서운했다.

1656027109184.jpg“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1656027113146.jpg“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시간이 없었기도 했고, 눈치가 빠른 강민수 씨는 무언가 짜여진 상황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거든요. 미안해요.”

16560271062923.jpg“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미안함’이라면 나는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도균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감정위원으로 위촉될 때 권정애의 집에서 품은 오해를 사과했던 것처럼 말이다. 항상 날 의심만 하던 사람이 보여준 진심은 신선하고도 따듯했다. 그때 이 팀장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가 전화를 받기 위해 나가자 회의실에는 김도균과 나만 남았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자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16560271062923.jpg“그럼 저도 나가 보겠습니다.”

1656027113146.jpg“한지감 씨.”

16560271062923.jpg“네?”

1656027113146.jpg“…….”

사람을 불러세워 놓고 김도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을 하길 망설였다.

16560271062923.jpg“총괄님, 말씀하세요.”

1656027113146.jpg“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왜 이수지 관장을 찾아갔습니까? 지감 씨를 난처하게 만들긴 했지만, 큰 고객의 성미를 거슬러서 좋을 것은 없었을 텐데요.”

16560271062923.jpg“누가 이렇게 일을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규정은 물론이고 상도덕에도 어긋나는 짓이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경숙 고객은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가 외부로 알려지지 않길 바라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화가 났습니다.”

회사의 정보를 넘겼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화가 날 상황이었지만, 관련된 이야기가 외부로 알려져도 되는 경우라면 이렇게 감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1656027113146.jpg“상대가 강민수 씨가 아니었어도 화가 났을까요?”

16560271062923.jpg“네. 하지만 강민수 씨라서 더 화가 났습니다. 절 의식하고 벌인 일일 테니 말입니다.”

1656027113146.jpg“강민수 씨를 의식하는 건 한지감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는 솔직히 마음을 털어놓았다.

16560271062923.jpg“의식하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더러운 방법은 쓰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이건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는 상황이 되었지 않습니까.”

1656027113146.jpg“그렇군요.”

씨익 김도균의 입꼬리가 산뜻하게 올라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김도균의 등 뒤에서 환한 후광이 비췄다. 언젠가 황덕현의 뒤에서 봤던, 바로 그 후광이었다. 왜 지금 이 후광이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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