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스파이 (3)2021.07.05.
쌩쌩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그 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김도균에게서 본 후광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안경으로 인해서 보는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 보이는 건지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보였다.
“웬일이냐?”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무슨 일 있었냐?”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 총괄님에게서 후광을 봤어요.”
“후광?”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광을 봤어요. 사실 예전에도 한번 본 적이 있어요. 황 대표님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봤거든요. 아무래도 안경이 후광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안경이 보여준 거라면, 너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겠구나.”
“그렇죠. 대표님 덕에 감정위원이 됐고, 덕분에 재벌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갖게 할 수 있었죠. 그것이 골동상으로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구요.”
아버지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 그 총괄도 너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일 거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왜 표정이 밝지가 못해?”
“왜 지금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총괄님과 알고 지낸 지 1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 후광이 보이는 걸까요?”
그 부분이 계속 풀리지가 않았다. 메시지가 함께 뜨지 않았기에, 막연히 이익을 가져다 줄 사람이라고 짐작하면서도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아차린 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오늘 그 총괄이라는 사람하고 무슨 일이 있었냐?”
“있었죠.”
나는 간략하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그 강민수인지 뭔지 바퀴벌레 같은 놈 덕분에 널 보는 김도균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 이 말 아니야?”
“네. 맞아요.”
“그럼 결론은 이미 나왔다.”
“결론이 이미 나왔다고요?”
“그래.”
의아한 나를 보며 아버지는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봤다.
“호감을 가졌을 때 아니겠냐.”
“호감이요?”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면, 도와주겠냐?”
“아……!”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아들었다. 생각해 보면 황덕현도 처음 봤을 때 후광을 본 것이 아니다. 추사 김정희의 편지를 감정하고 나왔을 때 후광이 보였다.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핀잔을 주셨다.
“어떻게 가장 간단한 것을 몰라.”
“뭐 어때요. 판단력 좋은 아버지가 이렇게 알려주시면 되죠. 덕분에 아버지도 보고 좋은데요.”
“말이나 못하면.”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버지는 기분이 좋은지 싱긋 웃었다. 오늘 이수지에게도 이런 식으로 살갑게 굴면서 스파이 강민수에 대해 알아내고 상황을 넘겼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 곧 인턴 기간이 끝나지 않냐?”
“네.”
2주 있으면 인턴이 끝난다. 지금 인턴 7명 중 3명만이 정직원으로 채용된다.
“정직원이 될 것 같냐?”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정직원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실적 면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조직생활이라는 것이 실적만으로 결정되진 않는다. 학벌, 커리어, 성격 등이 조직에서는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강민수는 내가 갖고 있지 못한 최고의 학벌과 조직에서 일한 커리어를 갖고 있다.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다. 그게 쉬운 것 같아도 결코 쉽지 않아. 네가 최선을 다했다면 사람들도 알았을 거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꼭 탑 옥션에 남고 싶었다. 골동상 한지감이 아닌 스페셜리스트 한지감으로서 인정받고 싶다. * 술에 취해 얼굴이 달아오른 이 팀장이 푸념처럼 마음속에 말을 쏟아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민수가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건실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아직도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김도균이 쓴웃음을 지으며 소주잔을 비웠다. 그는 이런 자리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 팀장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나칠 만큼 인정머리 없는 성격도 못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의 어두운 면을 마주할 때가 많았다. 평소 때 불우한 이웃을 위해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던 사람도 실적 앞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친다.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하지만, 가끔 얹힌 것처럼 탁 막히는 때가 있었다. 팀장이란 자리에 있으면 그런 마음을 팀원들에게 티내기도 힘들다. 취기가 올랐다고 자각한 이 팀장은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곧 정직원 결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결정해야죠.”
“강민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잘라낼 생각이에요.”
오늘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회사의 규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안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도 강민수를 정직원으로 채용하는 건 안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팀장에게도 상황 공유하실 거죠?”
아직 상황을 모르는 서정선과 지 팀장이 보기에는 강민수가 좋은 인재로 보일 터였다.
“회의할 때 상황 공유할 예정이에요. 이유도 없이 강민수를 정직원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건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거리던 이 팀장이 할 말 있는 표정으로 김도균을 봤다.
“저…… 한지감 씨, 총괄님은 어떻게 보고 있으십니까.”
“이 팀장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데요?”
“저는…….”
김도균의 눈치를 보며 이 팀장은 말하기를 꺼려했다. 경매팀 모든 사람들이 김도균이 한지감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한지감을 보는 김도균의 눈이 달라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는 한지감 씨가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저만 아니라 서 팀장, 지 팀장도 마찬가지죠.”
윗사람들이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할 때는 진심이 아닌 경우가 많았기에, 그는 다른 팀장들을 끌어들여 방패를 만들었다.
“그렇군요. 무척 마음에 드는 정도는 아니지만, 같이 일하고 싶어졌습니다.”
싫어하는 사람과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것이 긍정적인 신호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 팀장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참, 다음 주에 있는 프리뷰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으시죠? 제가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이지수 관장 때문에 정신이 없으셨잖아요. 이해합니다.”
“정신없기론 이 팀장도 마찬가지였잖아요.”
“민 책임이 잘해주고 다른 팀원들도 잘 도와줘서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온라인 경매도 프리뷰는 진행한다. 프리뷰를 통해서 직접 물건을 보고 응찰 여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다.
“프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네.”
그 기대를 만족시키겠다는 듯 이 팀장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이수지는 언짢은 표정으로 앞에 있는 강민수를 봤다. 어젯밤 수행원에게 전화를 걸어 징징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테지만, 한지감을 엿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오라고 했다. 한지감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만큼 이번에 그가 벌인 행동이 더 노여웠다.
“차는 그만 마시고 이제 본론을 꺼내봐. 한지감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곧 인턴 기간이 끝납니다. 7명 중 3명만 정직원으로 채용되죠.”
“탑 옥션에 한지감을 떨어트리라는 압력이라도 행사라는 거야?”
이수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한지감을 엿먹이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미움을 살까 두려웠다. 어제만 해도 한지감이 조금만 더 자세를 낮췄다면 강민수에게 어떤 상황인지 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날카로운 이수지의 반응에 움찔한 강민수는 방향을 바꿔 두 번째 수를 내놓았다.
“그런 것 아닙니다. 그래서 관장님이 얻는 이익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 뭐지?”
“제가 계속 탑 옥션에서 일할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강민수 씨가 탑 옥션에서 일해서 내가 얻는 이익이 뭐야?”
“네……?”
강민수는 당황했다. 어제 위험한 상황을 알려준 것이 이수지의 사람이 된 증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냉랭한 이수지의 표정은, 강민수가 자신과 무관한 사람임을 말해주었다. 그제야 그는 이수지에게 정보를 넘기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이미 그는 선을 넘었고, 이수지에게 붙는 것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멈칫한 강민수에게 이수지는 짜증을 냈다.
“귀 막혔어? 내가 얻는 이익이 뭐냐구.”
“계속해서 탑 옥션의 정보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번처럼요.”
“하아. 누가 보면 대단한 정보를 얻어다준 줄 알겠어.”
혼잣말인 듯한 이수지의 중얼거림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강민수에게 꽂혔다. 그는 흠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지워내고 가면 같은 웃음을 만들었다.
“이번엔 별거 아니었지만 다음에는 아닐 겁니다.”
“글쎄.”
강민수의 말을 비웃으며 이수지는 차를 마셨다. 이수지를 움직일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한지감 씨, 괘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수지가 강민수를 보며 반응을 보였다.
“십중팔구, 탑 옥션에서는 한지감을 채용할 겁니다.”
“십중팔구가 아니라 채용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을걸? 한지감을 다른 곳에 뺏긴다는 것 자체가 탑 옥션의 엄청난 손실이야.”
겨우 지방대나 나온 그런 놈에게 밀린 상황이 강민수의 기분을 상하게 했지만 애써 웃었다.
“이대로라면 한지감은 탑 옥션에서 승승장구하겠죠. 관장님에게 예의도 갖추지 않은 그런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탑 옥션을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견제라.”
흥미로운 제안이긴 했지만 구미가 확 당기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수지를 정확히 파악한 강민수는 이수지가 물 만한 미끼를 투척했다.
“제 배경이 되어주신다면, 한지감이 관장님에게 와서 사죄하도록 하겠습니다.”
* 맥주잔을 든 이 팀장이 힘차게 소리쳤다.
“다들 수고 많았어! 건배하자!”
“건배!”
“건배!”
팀원들이 맥주잔을 다 같이 부딪혔고, 모두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차례로 울릴 때쯤 나는 최요한에게 물었다.
“원래 경매 끝나면 매달 이렇게 뒤풀이해요?”
“아니요. 매달 그러긴 좀 부담스러우니까, 서너 달에 한 번 하죠. 이번에 온라인 경매가 잘되어서 팀장님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요.”
싱글벙글 웃는 이 팀장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이수지가 난리를 친 지도 벌써 2주가 지났고, 어느새 새해가 되었다. 일주일 동안 프리뷰가 열렸고, 그 다음 일주일 동안은 온라인 경매가 진행되었다. 온라인 경매는 일반 경매와 달리 일주일 동안 응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오늘 온라인 경매가 끝났다. 안주를 먹던 민 책임이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며칠 안 남았네요.”
이틀 후면 인턴 기간이 끝나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김현아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말했다.
“책임님하고 일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아쉬워요.”
“말이라도 고마워요.”
“진짜예요.”
“저도 현아 씨랑 일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현아 씨, 수더분하고 일할 때 꼼꼼하잖아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는 민 책임을 보면서 김현아는 좋아하는 남자 앞에 있는 여자처럼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봐주셨다니 감사해요.”
최요한이 입술을 삐죽였다.
“현아 씨, 나는 별로 안 고마웠어요?”
“아…… 아뇨. 당연히 감사했죠. 잘해주셨잖아요.”
“말까지 더듬거리고……. 상처예요.”
“그게 아니라…….”
민 책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김현아를 다독였다.
“그냥 하는 말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눈썹을 꿈틀거리며 최요한이 나와 강민수를 번갈아봤다.
“저와 일하셔서 좋으셨던 분은 안 계신가요?”
“조…….”
좋았다는 말을 하려는데 강민수가 가로채갔다.
“저는 정말 좋았습니다. 선배님. 항상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잖아요.”
“뭐 그 정도 가지고요오.”
민 책임이 그런 최요한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옆구리 찔러서 절 받으니까 좋아요?”
“네에. 좋아요. 책임님. 히히.”
“요한 씨, 후배들도 있는데 그렇게 웃지 말아요. 좀.”
“왜요. 제 개성이에요! 히히. 히히.”
깃털처럼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는 최요한을 보면서 민 책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부러운 듯 두 사람을 보던 김현아가 나와 강민수를 보며 말했다.
“같이 일하지 못해도 연락하고 지내요.”
“왜 이제 못 볼 사람처럼 말해요?”
내 말에 김현아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두 분은 뽑히실 것 같은데, 저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강민수는 아닐 거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바로 이 자리에 있었기에 그렇게 직접적으로는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거죠.”
“맞아요. 결과는 나와 봐야 알죠.”
강민수가 묘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나를 봤다. 자신이 탑 옥션에 있을 거라 자신하는 저 묘한 눈깔은 뭐야. 굉장히 기분 나쁜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김도균이 정신이 있는 사람이면 강민수를 뽑을 리가 없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늘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