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스파이 (4)2021.07.07.
김도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민수를 채용하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수지 관장에게 전화가 왔어.”
흥분할 만도 한데 황덕현은 더없이 차분했고, 그런 반응이 김도균은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그대로 하겠다는 거야?”
“응.”
“형!”
“나 아직 귀 안 먹었어. 그러니까 그렇게 소리 지르지 좀 마.”
마른 침을 삼킨 김도균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았다.
“그래. 나도 형 이해해. 이수지, 잃기 싫은 고객이지. 하지만…….”
“이수지뿐만 아니라 현성가 전원이 발길을 끊을 거라더라. 그럼 매출에 큰 영향이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른 고객을 끌어와야지. 요구를 들어줄 게 아니라!”
“나쁜 요구 같지가 않아서 들어주려는 거야.”
기가 막혀 김도균은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하하. 나쁜 요구 같지가 않다고? 그게 어떻게 나쁜 요구가 아니야? 강민수는 회사의 중요한 정보를 넘겼어. 다시 안 그럴 것 같아?”
“그러겠지.”
“회사에 그런 사람을 안고 있는 거 자체가 얼마나 큰 리스크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리스크가 되겠지. 하지만 그 리스크를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황덕현은 답답함을 참고 말했다.
“도균아. 이수지 정도 되는 사람이 우리 회사에서 한 명 포섭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다른 사람이 포섭되는 것보다는,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강민수인 게 나아. 그러면 정보를 조절할 수도 있고, 역으로 정보를 흘려야할 때 활용할 수도 있으니까. 대외적으로는 이수지 면도 세워주는 것이 되고.”
“…….”
쉬이 납득하지 못하는 김도균을 보고 황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넌 다 좋은데 사람이 너무 고지식해.”
“한번 원칙을 어기면 그 다음부터 원칙을 어기는 건 쉬워지잖아. 그러다 보면 지켜야 할 선을 잃어버리게 돼.”
“…….”
김도균이 왜 이런 고지식한 성격을 가지게 됐는지 알기에 황덕현은 말하기가 어려웠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황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강민수, 한 번만 더 고려해줘. 도균아.”
“생각……해볼게.”
“고맙다.”
차를 마시며 황덕현이 김도균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렇게 봐?”
“좀 웃겨서.”
“뭐가?”
“1년 동안 네가 나에게 가진 불만은 ‘한지감’이었잖아. 그런데 오늘은 아니네.”
“흐음…….”
김도균은 딴청을 부렸고, 그 모습에 황덕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뭘 알았다는 거야.”
“한지감이 마음에 들었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같이 일해도 될 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뿐이야.”
“김도균이 같이 일해도 될 만한 존재로 여겼다는 것은 그 사람을 인정했다는 뜻 아닌가? 뭐가 우리 총괄님의 마음을 이렇게 바꿔놓으셨을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장난기 가득한 황덕현의 말투가 얄미워서 김도균은 대답을 피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 궁금해서 그래.”
“……자기 이익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서. 그래서야.”
진심이 통했던 순간, 김도균은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한지감을 배척한 것 같아 한없이 미안해졌다. 망령에 사로잡혀서 한지감의 진심을 보지 않았던 것은 김도균이었다.
“아만다 우의 유작 소장자에게 한지감이 어떻게 접근했을지에 대해서도 의심했었어. 정말 진심으로 소장자를 생각해준 건지…… 소장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그것뿐이어서 인심 쓴 척한 건 아닌지.”
“근데 이수지 때문에 그 의심이 풀린 거구나.”
“응. 그 정도로 이익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이수지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겠지.”
“이수지를 잃고 김도균을 얻었다, 이거 손해 보는 장사인데에.”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김도균은 정색했다.
“그게 어떻게 손해야. 훨씬 이익이지!”
“어떻게 이익이야. 이수지 관장 정도의 큰 고객은 드물어.”
“없는 건 아니잖아. 대체재가 있지. 하지만 나는 유일해.”
김도균의 말은 100%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황덕현은 빙그레 웃었다. 또한 마냥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 그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 넌 유일하지. 앞으로 그 유일한 실력 좀 펼쳐줘.”
“걱정하지 마. 원하지 않아도 보게 될 테니까.”
김도균을 보는 황덕현의 표정이 묘했다. 강민수를 채용해야 하는 이유에 관하여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바로 메기 효과였다. 강민수의 존재는 한지감을 거슬리게 만들겠지만, 그만큼 성장시킬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기대가 되었다.
“기대할게.”
강민수라는 경쟁자에 김도균이라는 날개를 얻은 한지감이 어떻게 성장할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 안 보는 척했지만 모두의 시선은 회의실을 향했다. 10분전 서정선이 다영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일이 인턴 마지막 날이기에 저 면담은 정직원 채용 여부를 알려주는 자리였다.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다영이 회의실에서 나왔다. 설마…… 떨어진 건가? 궁금함을 참지 못한 박도희가 다영에게 다가갔다.
“언니이.”
그때 회의실 밖으로 얼굴을 내민 서정선이 박도희에게 손짓했다.
“도희 씨, 회의실로 들어와요.”
“아. 네에.”
순식간에 박도희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얼어붙어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다영이 박도희의 손을 꼭 잡아줬다. 그 덕분에 박도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회의실로 쏠렸다. 나는 그 틈을 타 다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붙었어?’
‘오빠 면담하고 나면 그때 결과 교환해요.’
나는 반사적으로 다영이 앉은 곳을 보았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결과 교환이 뭐냐며 내가 화내는 제스처를 하자 다영은 얄밉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많이 컸다. 정다영! 잠시 후, 박도희가 축 쳐져서 회의실에서 나왔다. 떨어진 것이 확실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메시지가 들어오는 소리에 나는 재빠르게 확인했다. 다영이 보낸 건 줄 알았는데 이 팀장이 보낸 거였다.
‘지감 씨, 옥상에서 잠깐 보자.’
‘네.’
이제…… 내 차례다. 나는 꿀꺽 마른 침을 삼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옥상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는데, 마치 1년인 것처럼 길게 느껴지면서 머리가 어지럽다. 지난 3개월의 고생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꼭 잡고 싶은 기회, 그 결과가 곧 나온다. 빨리 결과가 나오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주할 결과가 무섭다.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가자, 난간에 기대어 있는 이 팀장이 보였다.
“빨리 왔네.”
“마음이 급해서요.”
“마음이 왜 급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이 팀장은 두 눈을 깜빡였다. 나는 애가 탔다.
“정직원으로 채용되는지 아닌지 말씀해 주시려고 부르신 것 아니세요?”
“맞아. 그거 말해 주려고 불렀어.”
빨리 결과를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이 팀장은 물끄러미 나를 보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철렁 가슴이 떨어졌다. 안 됐구나…….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축하해. 지감 씨.”
“……네?”
“정직원 됐다고.”
“정말요?”
“정말이지. 그럼.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어? 실적이 월등하잖아.”
“그래도 모르는 거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됐구나. 됐어! 내가 탑 옥션의 일원이 됐다! 마음 같아서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이 팀장 때문에 그 마음을 꾹 눌렀다. 그러다 문득 다영이 정직원이 된 건지 궁금해졌다.
“저 외에 다른 2명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좀 곤란한데…….”
“그렇군요.”
“하아…….”
얕은 한숨을 쉰 이 팀장이 입을 열었다.
“원래 말해 주면 안 되는 건데…… 다른 2명 중에 강민수가 있어.”
“네……? 어떻게 강민수가…….”
“이수지 관장에게 압력이 들어왔나 봐. 어쨌든 기분을 상하게 한 상황이라서, 안 들어줄 수가 없는 모양이더라구…….”
내가 정직원이 되고 말고와 상관없이 강민수는 절대 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놀랐지?”
“네. 놀랐어요. 규정을 어긴 사람을 채용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해서요.”
놀란 정도가 아니라 충격받았다. 이수지가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은 당연히 알았지만, 그렇다고 황덕현이 받아들일지는 몰랐다. 그제야 이 팀장의 고민스런 표정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갔다. 강민수가 정직원이 된 이 불합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나도 같은 마음이야. 지감 씨 마음 충분히 이해해.”
“총괄님도 받아들이신 건가요?”
“응. 말씀은 안 하시는데, 대표님이 사정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신 모양이더라구.”
“……그렇군요.”
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좀 의아하긴 했다. 김도균도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
“오빠! 같이 가요!”
회사 정문을 나서는 나를 다영이 쫓아 나왔지만 못 들은 척하고 걸어갔다. 열이 받은 다영이 내 앞을 막았다.
“자꾸 못 들은 척할 거예요?”
“정다영 씨, 왜 자꾸 친한 척을 하세요? 합격 여부도 안 알려주시는 분이.”
“오빠가 알려주면 저도 알려준다니까요.”
“알려줄 필요 없어. 나는 이미 너 합격한 걸 알고 있으니까.”
놀란 다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이 팀장이 말씀해 주셨어요?”
“역시 합격했구나.”
“뭐야. 지금 나 낚은 거예요?”
“응. 낚은 건데에.”
장난스런 말투가 다영의 화를 돋았지만 그녀는 애써 참고 물었다.
“이제 알았으니까 오빠도 까 봐요. 합격, 했죠?”
“글쎄에.”
“아! 진짜! 이러기예요!”
버럭 지른 소리에 길을 지나던 시선들이 쏟아졌고, 나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래. 합격했다, 했어! 됐냐.”
“됐어요.”
“그렇다고 사람 이렇게 많은 대서 소리를 지르냐!”
“애초에 오빠가 약 안 올렸으면 됐잖아요.”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하. 어이가 없어. 약을 올린 사람이 누군데.”
“내가 언제 약을 올렸다고 그래요.”
“내가 처음에 물어봤을 때 결과 교환하자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그거야…… 내가 붙었으면 오빠는 당연히 붙었을 테니까 같이 축하하고 싶어서 그런 거죠!”
“네 의도야 어떻든 나는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그렇다면 미안해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자 안쓰러워 보였다.
“이 오빠가 넓은 마음으로 사과를 받아주마.”
내 말에 다영이 싱긋 웃었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일까요? 도희는 아니라는 거 들었고, 강민수는 당연히 아닐 테고, 김현아 씨일까요?”
“강민수야.”
“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이수지라면 가능하더라.”
나는 이 팀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진짜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너무 화가 나요! 오빠는 괜찮아요?”
“화가 나지. 그런데 강민수가 정직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분노하기로 했어.”
“어떤 방식이요?”
“강민수를 제대로 이겨서, 자기 발로 나가게 하려구.”
의아한 다영이 갸우뚱거렸다.
“과연 자기 발로 나갈까요? 이수지의 힘을 빌려서까지 탑 옥션에 있으려는 사람인데?”
“강민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잖아. 아마 지금 버틸 수 있는 건, 곧 나를 밟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거야.”
“그건 거의 망상 아니에요?”
“망상이라는 걸 제대로 알려줘야지. 그렇게 자존심이 완전히 상하게 되면 강민수는 자기 발로 탑 옥션에서 나갈 거야.”
강민수, 내가 반드시 네 발로 걸어 나가게 만들 거다. * 인턴으로 근무하는 마지막 날, 회사로 출근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세원 갤러리 임병규 대표에게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모던한 갤러리의 인테리어 때문에 나도 절로 모던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즐기는데, 나를 본 직원이 다가왔다.
“한지감 씨?”
“네.”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나는 대표실로 갔고, 임병규 대표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오느라고 수고했어요.”
“수고는요.”
며칠 전 안부차 전화를 걸었을 때, 임병규는 위탁하고 싶은 그림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따듯한 차를 대접했다.
“탑 옥션에서 일해 보니 어때요? 계속 일하고 싶은 곳인가요?”
“네. 일이 재밌어요.”
“아쉽네요. 재미없다고 했으면 바로 스카웃 제의하려고 했는데.”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언제라도 우리 갤러리 오고 싶은 생각이 들면 연락해요.”
“네. 그러겠습니다.”
서로의 근황 이야기를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차를 다 마시고 나서 임병규는 나를 수장고로 데려갔다. 그가 보여주기로 한 그림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백하진 작가가 그린 그림이었다. 황량한 벌판에서 뻗어진 손이 멀리 있는 꽃밭을 향해 있었고, 크기는 가로 100cm, 세로 80cm 정도 됐다.
“그림을 원하는 손님들은 많지만 지감 씨하고 관계를 생각해서 연락했어요.”
“감사합니다.”
바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 20,000,000원 | 진 | 35,000,000원 | 백하진 (조선웅) / 2010년대 ] 근데 왜 작가 이름 옆에 괄호가 쳐져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