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백하진 (1)2021.07.10.
[ 20,000,000원 | 진 | 35,000,000원 | 백하진 (조선웅) / 2010년대 ] 근데 왜 작가 이름 옆에 괄호가 쳐져 있지? 내가 뭘 잘못 봤나? 눈을 비비고 다시 메시지를 봤지만 여전히 괄호 속 이름은 선명했다.
“왜 그래요? 뭐가 이상한가요?”
임병규의 물음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긴요. 그냥 눈이 좀 건조해서요. 며칠 동안 무리해서 그런가 봐요.”
“그렇죠. 조금만 무리해도 눈이 뻑뻑하죠. 인공눈물 자주 넣고, 그래도 안 좋으면 꼭 병원 가 봐요.”
“네. 감사합니다.”
수장고에서 나오며 나는 임병규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좋은 작품 위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아주니 고맙네요.”
그때 임병규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거 어쩌죠? 중요한 통화라 배웅을 못할 것 같네요.”
“괜찮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요.”
“네.”
전화를 받은 임병규는 대표실을 향해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괄호 속 의미를 생각하면서 정문을 나서는데, 앞이 소란스러웠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가 보안직원 두 명의 제재를 받고 있었다.
“놔! 놓으라고! 나는 임병규를 만나야겠단 말이야!”
체격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보안 직원과 상대가 되지 않는데도 남자는 악을 쓰며 앞으로 가려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저러는지 궁금했지만, 끼어들어 좋을 것이 없기에 나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걸음을 떼었다. * 시끌시끌한 회식 분위기 속, 나는 한숨을 돌리며 푹 소파에 기댔다.
“하아…….”
오늘 이상하게도 유독 온라인팀으로 문의전화가 몰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전화가 꼭 꼭 강민수와 김현아가 자리를 비울 때 와서, 나 혼자 10통도 넘는 전화를 소화하느라 진이 빠졌다. 앞에 있는 다영이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봤다.
“오빠 괜찮아요?”
“안 괜찮아. 진이 빠진다.”
“원래 전화 받는 것이 힘들어요.”
“이 정도로 진이 빠질 줄은 몰랐어.”
골동상을 하면서 하루에 여러 곳에서 나를 부른 적은 있었지만, 이런 전화 폭탄을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대각선 방향에 앉은 박도희가 나를 보면서 픽 웃었다.
“액땜했다고 생각하세요오. 오빠 탑 옥션의 신입사원이 됐잖아요.”
“그래야지.”
김현아를 생각하면 내가 전화를 많이 받는 것이 맞는데, 강민수를 생각하면 억울했다. 저 자식, 전화 피하는 텔레파시라도 있나? 인턴의 마지막 날, 3개월 동안의 고생을 위로하려고 열린 회식이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이런 감정은 잠시 접어두자. 그러다 문득 잊고 있었던 괄호가 떠올랐다. 잠깐, 백하진이면 다영이 지난번에 만났잖아. 잘됐다!
“다영아. 너 지난번에 백하진 작가 만났다고 했지?”
“네. 만났죠오.”
자신의 양손을 꼭 잡은 다영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백하진과 만난 것이 어지간히 좋았던 모양이다.
“그건 왜요?”
“혹시 백하진 작가 주변인 중에서 조선웅이라는 사람 있어?”
기억을 더듬는 다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들은 것 같은데…….”
옆에 있던 박도희가 끼어들었다.
“언니 기억 안나요? 수석 조수님이요.”
“수석 조수? 조수가 또 있어?”
의아한 내 물음에 다영이 대답했다.
“엄청 많죠. 설치작가잖아요. 작품 들어갈 때마다 거의 10명 정도 붙어요.”
“그 정도로 조수가 많은지 몰랐어.”
“그 정도는 많은 것도 아니에요. 데미안 허스트는 한창 때 조수가 100명이었다니까요.”
“아. 그래. 들은 적 있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수로 일할 수가 있는지 신기해서 기억에 남았다. 백하진의 수석 조수가 조선웅이다. 그렇다면 아까 그림을 실제로 그린 사람이 조선웅이어서 괄호로 표기된 것이 아닐까. 이번에 처음 괄호를 보게 된 이유는 4단계 미션을 얼마 전에 통과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백하진 작가님은 왜 물어요?”
“오늘 백하진 작가 작품을 보고 왔거든. 그래서.”
“아아. 왜 말 안 했어요? 나도 보고 싶은데에! 좀 같이 가지!”
“입고되면 그때 보면 되지.”
“그래도요. 근데 조선웅 조수님 이름은 어디서 들었어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임병규 대표님하고 이야기 나누다가 이름이 나왔는데, 백하진 작가님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기억이 안 나서.”
“아아. 그랬구나. 그분, 백하진 작가님 밑에서 10년 이상 있으셨대요. 대단하죠?”
“경력도 꽤 있는데, 그 정도면 수석 조수가 아니라 작가로 활동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잘 안 풀렸나 보죠. 주목 받는 것이 쉽진 않잖아요.”
끄덕이며 박도희도 말을 보탰다.
“맞아요오. 실력 있는 화가들도 주목 못 받으면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그러니까. 안타까운 현실이지.”
나를 보며 다영이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작품을 못해서인지 좀 의기소침해 보였어요.”
“직접 봤어?”
“백하진 작가님 뵈었을 때 잠깐 오셨었거든요.”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오늘 갤러리에서 봤던 남자가 스쳤다.
“혹시 그분, 40대 초반에 호리호리한 체형인가?”
“어떻게 알았어요?”
역시 맞았구나. 아무래도 임병규와 조선웅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는 다영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각자 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갈등이 거론되면 집중될 게 분명하다.
“이번에 갤러리 갔을 때 스치듯이 본 것 같아서.”
“아. 그랬구나.”
내가 오늘 봤던 그 남자가 조선웅이었구나……. 그림의 실제로 그린 사람이 조선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오래 묻어두었던 생각이 튀어나왔다.
“다영아. 작가가 아니라 조수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죠. 더 이상 아이디어만 내고 그리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비난하거나, 아이디어를 낸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일은 업계에 거의 없잖아요.”
“도희 너도 그렇게 생각해?”
“저는 한 가지 더 덧붙여서, 작가의 감독 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구나.”
역시 나와 생각이 완전히 다르다. 나만 이상한 건가? 나를 살피던 다영이 물었다.
“오빠는 생각이 다르죠?”
“응. 한국화에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경우는 없거든. 불화 같이 여러 인원이 그림을 그리는 경우에는 화기에 그 이름들이 반드시 빠짐없이 기록되지.”
“정말 많이 다르구나.”
“관련된 책 읽으면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는데도 잘 안 되더라구.”
이 고민의 시작에는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이 있다. 공장에서 제작되어 대중에게 판매되는 변기를 가져다 놓고 뒤샹이 서명함으로써 ‘완성’된 그 작품 말이다. 이와 같은 ‘레디메이드’ 작품은 물리적인 차이가 아닌 개념적인 차이를 지닌다. 변기를 만든 건 뒤샹이 아니지만, 의미를 부여해 작품으로 만든 것은 뒤샹이다. 이후 앤디 워홀을 통해서 작품 방식을 대량 생산처럼 바꾸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초기에는 작가가 작품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는 것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반감은 차차 줄어들었다. 현재 외국의 유명 화가들은 중소기업 수준의 많은 조수들을 쓰면서 자신의 작품을 찍어내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시무룩한 나를 다영은 위로했다.
“아무래도 오빠는 고미술을 오랫동안 접했으니까 거부감이 들 수 있죠.”
“기사에서 외국 유명 화가가 그림에 서명만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서 조수가 서명까지 했다는 걸 읽었거든. 그걸 보니까 더 반감이 들더라구. 작가와 실행자 사이에 가이드라인이 있긴 한 건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다영이 말했다.
“확실히 그런 가이드라인이 아직 뚜렷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작가가 직접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합의는 되어있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우왕좌왕하는 거죠.”
“그렇구나.”
미션을 수행하면서 현대미술이 조금 익숙해진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골동품집 아들로 컸지만 큰 영향을 받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하다 보니 새삼 내 머릿속에 그 시각이 깊숙이 박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선웅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결국 백하진의 아이디어로 그려진 그림이니 백하진의 작품이다. 여전히 찝찝하지만, 업계의 시스템이 그런 것을 어쩌겠는가.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것 같아 박도희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준비할 거야?”
“아직 정해지진 않았는데 리아 갤러리 같은 대표적인 곳을 노려 보려구요.”
“나중에 도희 네 도움 크게 받을 수도 있겠다. 미리 잘 부탁한다.”
미간을 크게 찌푸린 다영이 팔짱을 꼈다.
“오빠, 치사하게 혼자만 부탁하기예요? 나도 잘 부탁해, 도희야.”
“앞으로 자주 연락하시면 잘해드릴게요!”
그 말에 나와 다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며 무심코 시선을 돌리는데, 김도균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강민수가 보였다. 강민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남았어야 하는데,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 백하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임병규에게 소리쳤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평소 신사적인 그였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신경질적이었다. 임병규는 한지감 앞에서와 달리 껄렁하게 한쪽 다리를 자신의 무릎에 걸쳤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선웅이 눈이 뒤집어졌다구요! 이대로면 무슨 일 벌일 것 같단 말입니다!”
“걔가 뭘 할 수 있는데.”
피식 웃은 임병규가 백하진의 뺨을 양손으로 툭툭 가볍게 쳤다. 백하진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었다.
“하진아. 넌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그렇게 해서 베니스에서 상도 탔잖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임병규의 눈이 희번덕거리자 백하진이 움찔했다. 그런 백하진을 보면서 임병규의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올라갔다.
“짜식. 쫄긴. 형이 너 때리겠냐? 우리 갤러리 간판스타이신데. 안 그래?”
“……그렇죠…….”
얼어붙은 백하진의 혀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룸살롱에나 가서 놀던 대로 놀아. 알았지?”
“알았어요.”
“가봐.”
덜덜 떨면서 백하진은 대표실에서 나갔다. 혼자 남은 임병규는 1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물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버러지같은 놈이 담배를 다시 피우게 만드네.”
담배를 반쯤 태웠을 때쯤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잘 지냈냐?”
[못 지낼 게 뭐가 있수.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 연락했어?]
“물건 하나 찾아주면서 사람 손모가지 하나 분질렀으면 해서 말이야.”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었지만, 서늘한 눈빛은 그의 말이 진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 다음 날, 모처럼 주말의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누구야……?”
겨우 실눈으로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임병규가 대표로 있는 세원 갤러리였다. 이거 왠지 느낌이 안 좋다. 목이 잠겨 있어 급하게 정돈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세원 갤러리입니다. 탑 옥션 한지감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대표님이 급하게 전해드리라는 말씀이 있어 이렇게 전화 드렸습니다.]
안 좋은 느낌이 더 강해졌지만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백하진 작가의 작품, 위탁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말씀 안 해 주셨나요?”
[네. 거기까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바로 임병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가 꺼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건가?”
위탁을 이미 하기로 한 이상,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도 거절하는 것이 예의였다. 정 상황이 여의치 않아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쳐도 직접 전화를 줘야지, 이렇게 직원에게 시키는 것은 뭘까. 그동안은 임병규가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도 예의를 차릴 정도로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가 다르게 느껴진다. 침대에서 나와서 거실을 서성이자, TV를 보던 경환이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무슨 고민 있어?”
“고민이라기보다 찜찜한 상황 때문에 신경이 거슬려.”
“신경이 거슬리면 안 되지. 어떻게 하고 싶은데?”
“확인하고 싶은데, 왠지 확인하고 싶지 않기도 하네.”
“그게 무슨 소리야?”
“흐음……. 나도 모르겠다.”
경환이 소파에 깊게 기댔다.
“모르겠으면 그냥 확인하고 와. 그게 마음은 더 편하지 않겠어?”
“그렇지.”
나는 재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가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나갈 준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확인하는 것보다 확인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었고, 이번이 그랬다. * 나는 차를 끌고 세원 갤러리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차에서 내려 갤러리로 들어서려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왜 문이 잠겨 있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앞을 서성거릴 때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갤러리 앞으로 모여들었다.
“저 사람…… 지금 죽으려는 건가?”
“그런 거 같아. 빨리 112에 신고해.”
죽으려고 한다고? 누가? 나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시선이 모이는 곳을 보았다. 갤러리 건물 옥상 난간에 한 남자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저 남자는…….”
어제 소란을 피웠던 바로 그 남자, 조선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