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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백하진 (2) (96/226)

96화 백하진 (2)20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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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으려고 한다고? 누가? 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갤러리 건물 옥상 난간에 한 남자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1656027245752.jpg“저 남자는…….”

어제 소란을 피웠던 바로 그 남자, 조선웅이었다. 텅 빈 그의 눈에는 아무 희망도 없어 보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뒤늦게 갤러리 문이 열리고, 조선웅을 본 직원이 혼비백산했다.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군중들 사이로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60272457525.jpg“네. 여기 세원 갤러리 앞인데요. 어떤 남자가 옥상에 서있어요! 빨리 좀 와주세요!”

그 목소리에 겨우 정신이 났다. 경찰이 온다면 조선웅도 내려오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전에 조선웅이 뛰어내려버린다면 소용없다. 이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한 발을 허공 위로 가져갔다.

16560272457525.jpg“다시 한번 생각하세요!”

16560272457525.jpg“그러지 마세요!”

16560272457525.jpg“가족을 생각하셔야죠!”

모여든 인파가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몸의 중심이 허공으로 점차 쏠려갔다. 사람이 죽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다. 뭐라도 해야 한다.

1656027245752.jpg“조선웅 선생님!”

나는 최대한 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선웅이 움찔하더니 나를 보았고, 사람들의 시선도 나에게 쏟아졌다. 아……. 진짜 이런 상황 싫다. 눈앞이 하얘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견뎠다.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경찰이 올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텨 보자.

1656027245752.jpg“전 탑 옥션에서 일하고 있는 한지감이라고 합니다. 백하진 화가의 수석 조수님, 맞으시죠?”

16560272457553.jpg“…….”

조선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해서 난데없이 소개를 하긴 했는데,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쨌든 뭔가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끌면 되지 않을까?

1656027245752.jpg“제가 지금 옥상으로 올라겠습니다. 저랑 담소 좀 나누시죠.”

16560272457553.jpg“…….”

나는 직원을 보고 말했다.

1656027245752.jpg“옥상 어떻게 올라가면 됩니까?”

16560272457525.jpg“네에……?”

직원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봤고, 마음이 급한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1656027245752.jpg“옥상 어떻게 올라가면 되냐구요!”

16560272457525.jpg“아……. 네. 이쪽으로…….”

직원의 안내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지만,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버리려 할 정도라면 감당해내기 버거운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나와 대화를 나눈다고 그 버거운 이유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흩트리다가 무심코 직원을 보게 되었다.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식은땀에 절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옥상에 있는 조선웅을 살리는 것이다.

1656027245752.jpg“저분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습니까?”

16560272457525.jpg“네……?”

1656027245752.jpg“어제 우연히 조선웅 조수님이 보안직원들의 제재를 받는 모습을 봤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16560272457525.jpg“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직원은 나의 눈을 피해버렸고,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섰다. 나를 피하려는 듯 직원은 후다닥 내리더니 옥상으로 가는 계단으로 올라가 문 앞에서 섰다.

16560272457525.jpg“여기입니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간이 있다면 구슬려 입을 열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일단 빨리 조선웅과 마주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나는 철제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갔다. 다행히 아직 조선웅은 난간 위에 서 있었다.

1656027245752.jpg“저 왔습니다.”

16560272457553.jpg“…….”

조선웅은 몸을 비스듬히 돌려 나를 보았다.

1656027245752.jpg“어제 백하진 화가님의 작품을 보러 이곳에 왔습니다. 전쟁이 아픔이 표현된, 슬프지만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그리는 데 분명 선생님의 노고도 많이 들어가 있을 겁니다.”

16560272457553.jpg“노고라…….”

쓴웃음이 조선웅의 입가에 스쳤다.

16560272457553.jpg“그래요. 노고일 뿐이겠죠. 사람들에게는 백하진의 작품일 테니…….”

사람들의 백하진의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드러냈다.

1656027245752.jpg“선생님이 노력하신 부분을 뺏기는 것 같은 기분 이해합니다. 결코 쉽게…….”

차분함을 유지하던 조선웅이 버럭 소리 질렀다.

16560272457553.jpg“노력이요? 난 약간의 기여를 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디어부터 만들기까지 모두 내가 했단 말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다 직원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이, 조선웅이 한 말이 진실임을 말해주었다. 피를 토해내듯 조선웅은 말했다.

16560272457553.jpg“전부 내가 다했습니다! 아이디어를 내고, 그리고, 작품을 설치하고…… 다른 조수들이 만들도록 감독하는 것까지 내가 다했단 말입니다! 백하진 그 사람이 한 것이라고는 전쟁과 관련된 작품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완성된 작품에 서명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업계 관행으로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한두 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왜 조선웅은 그냥 참았을까?

1656027245752.jpg“왜 그만두지 않았습니까?”

16560272457553.jpg“5년만 지나면…… 전속 작가로 계약하고……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전속 작가로 계약하고,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했다고……? 작가가 약속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1656027245752.jpg“임병규 대표가…… 약속했습니까?”

16560272457553.jpg“네…….”

눈물을 글썽이며 조선웅이 이를 악 물었다. 여태까지 알던 임병규의 모습이 아니기에 머리가 띵해졌다. 폭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붕대를 칭칭 감은 왼손을 보여주었다.

16560272457553.jpg“이게 왜 이렇게 된지 아십니까? 더 이상은 못 참겠다고 임병규에게 말하니까 깡패를 보내서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작업노트를 내놓으라면서요. 안 내놓으면 오른손을 이렇게 만들어놓겠다고 했습니다.”

1656027245752.jpg“…….”

강한 충격에 뇌가 일시 정지했다. 내가 아는 임병규는 어머니가 감동받은 화가의 작품을 기억하고 마대호 화가를 전시회에 세웠고, 도움을 준 나에게 고맙다며 와유첩을 낮은 금액으로 판매한 진정성 있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선웅이 말하는 임병규는 한 예술가의 인생을 착취하고 밟아 뭉개버린 지독한 인간이었다. 멍한 나를 보고 조선웅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16560272457553.jpg“못 믿네. 그래.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못 믿었지.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고.”

다시 조선웅의 한쪽 발이 허공에 놓였다. 선택지가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것밖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약속했던 것은 하나도 그에게 오지 않았고, 십 년 이상 공들인 노력들은 다 남의 것이 되었다. 진실을 말하는데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절망감의 무게에 나는 짓눌려버렸다. 뭔가 생각해내야 해. 내가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거야…….

1656027245752.jpg“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16560272457553.jpg“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1656027245752.jpg“아직 오른손은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16560272457553.jpg“작품을 만들면요? 무명작가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선웅의 말은 1년 전 자포자기 상태였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갑자기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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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027245752.jpg“그래서 해보지도 않고 이렇게 포기하는 겁니까?”

16560272457553.jpg“네가 뭘 안다고 떠들어! 미치도록 매달렸어! 하지만 되지 않았다고! 가족, 친구, 연인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여기에만 집중했어.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고!”

1656027245752.jpg“지금 죽으면 이 상태에서 자신의 인생을 끝내는 겁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 하나 세상에 내놓지 못한 채 죽어도 좋냐 이 말입니다!”

16560272457553.jpg“…….”

울컥한 조선웅이 말을 잇지 못했다. 덩달아 나도 울컥했지만 애써 참았다.

1656027245752.jpg“전 골동품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죽어도 골동상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게 됐고, 1년 만에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집안들과 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골동상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죠.”

16560272457553.jpg“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1656027245752.jpg“누구나 자신의 삶에도 도려내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게 골동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골동품은 제 무기입니다. 그 무기로 지금 회사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16560272457553.jpg“…….”

안경 덕분이었지만, 내가 골동품집 아들이 아니었다면 고미술품의 정보가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내 삶에서 가장 밀어내고 싶었던 부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1656027245752.jpg“10년의 시간들이 선생님에게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은 끔찍한 시간일 겁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생을 끝내지 않는다면, 이 끔찍하고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 어느 순간 선생님의 무기가 되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처가 별이 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16560272457553.jpg“아니. 그렇지 않아.”

그는 거세게 고개를 저으며 희망을 밀쳐냈다. 여태까지 받았던 희망 고문들 때문인 것 같았다.

1656027245752.jpg“아니요. 선생님이 틀렸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기회가 있다는 겁니다. 아직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제 손을 잡고 내려오세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멈칫거리다 결국 손을 잡았고, 난간에서 내려와 눈물을 터트렸다.

16560272457553.jpg“흐윽 흐윽…….”

그런 조선웅을 나는 옆에서 토닥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656027245752.jpg“하아…….”

바로 그때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경찰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좀 빨리 오지……. 그래도 조선웅이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영은 상황을 부정했다.

1656027259601.jpg“믿을 수가 없어. 정말…… 백하진 작가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고요? 그동안의 작품들이?”

1656027245752.jpg“응. 조선웅이 작업노트까지 보여줬어. 거기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더라.”

1656027259601.jpg“그럴 수가…….”

다영이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졌다. 임병규의 실체를 안 내 표정이 딱 저랬겠지?

1656027245752.jpg“이해한다. 난 임병규랑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충격이 컸어. 그런데 넌 백하진이 우상이었다며.”

1656027259601.jpg“…….”

10분 넘게 멍하게 있던 다영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1656027259601.jpg“이 자식, 아주 질 나쁜 인간이네. 키워드 던져주고, 서명만 해? 그러고도 지가 작가야?”

쩌렁쩌렁한 다영의 목소리에 카페 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나는 사과의 뜻으로 목례를 했다. 소리를 지르고도 다영은 진정이 되지 않는지 내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1656027259601.jpg“이런 느낌이구나.”

1656027245752.jpg“뭐가?”

1656027259601.jpg“친구가 도빈 좋아했거든요.”

1656027245752.jpg“아. 몇 년 전에 성추문 있었던 아이돌?”

1656027259601.jpg“네. 그거 터지고 나서 바로 탈덕했는데 그 분노가 어마어마했거든요. 지금 제가 딱 그 기분이네요. 오빠도 그래요?”

나는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1656027245752.jpg“그 정도는 아닌데, 사람이 무섭다. 내가 본 임병규의 모습은 다 거짓이었을까?”

1656027259601.jpg“아닐 수도 있죠. 사람마다 진심인 부분이 하나씩은 있는 거니까.”

1656027245752.jpg“예를 들면?”

1656027259601.jpg“음……. 누가 있을까. 아! 삼국지 여포 봐요.”

여포는 배신의 아이콘이었지만 여자라고는 초선밖에 없었다. 적어도 사랑에서만은 순정남이었다.

1656027245752.jpg“맞는 말이네.”

1656027259601.jpg“그런데 이러다 보니 사람을 더 믿기가 힘든 것 같아요. 내가 본 그 사람의 모습은 한 단편일 뿐이니 말이에요.”

1656027245752.jpg“생각나는 사람 있다.”

1656027259601.jpg“누구요?”

1656027245752.jpg“나 학교 다닐 때 교수님 한 분이 계셨거든.”

다영에게서 음료수를 가져와 한 모금 마셨다.

1656027245752.jpg“누구에게나 잘하는 분이었어. 학생들에게도 동료 교수에게도, 심지어 청소 아주머니에게도 다 잘하시는 분인데, 자기 방 대학원생들에게는 정말 막 대했어.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게 나쁘다고 인식 자체를 못하더라는 점이야. 그 교수님에게 대학원생은 그래도 되는 존재였던 거지.”

이제 좀 명확해지는 것 같다. 그가 진정성과 배려심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조선웅에게 한 행동은 잘못되었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임병규에게 온 전화였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본 다영이 고개를 저으며 나를 말렸다.

1656027259601.jpg“받지 말아요.”

1656027245752.jpg“안 받으면 회사까지 찾아올걸.”

1656027259601.jpg“그래도…….”

1656027245752.jpg“괜찮아.”

나는 애써 웃어 보이고 전화를 받았다.

1656027245752.jpg“한지감입니다.”

16560272653653.jpg[오늘 갤러리에 들렀다구요.]

1656027245752.jpg“네. 그랬습니다.”

16560272653653.jpg[만나서 이야기 나누죠. 갤러리로 오세요.]

1656027245752.jpg“네. 그러죠.”

  * 임병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나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16560272653653.jpg“위탁 못하게 되어서 미안해요. 직접 연락했어야 하는데, 워낙 정신이 없어서 직원에게 부탁했어요.”

1656027245752.jpg“괜찮습니다.”

그는 낮에 일어났던 사건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건 그 사건을 없는 일로 만들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굳이 말을 꺼냈다.

1656027245752.jpg“조선웅 조수님 자살 시도, 들으셨죠?”

16560272653653.jpg“조선웅이요? 누굴 말하는 건지…….”

1656027245752.jpg“백하진 작가 수석 조수, 조선웅 선생님을 말하는 겁니다.”

그는 여유롭게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나를 봤다.

16560272653653.jpg“지감 씨,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가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해요?”

1656027245752.jpg“아주 작은 점 정도 되겠죠.”

16560272653653.jpg“안타깝지만 점도 되지 않아요. 내일이면 사라질, 아니 지금 당장에라도 사라질 먼지예요.”

1656027245752.jpg“그래서요?”

16560272653653.jpg“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넘어가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임병규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나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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