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백하진 (3)2021.07.14.
“지감 씨,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가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해요?”
“아주 작은 점 정도 되겠죠.”
“안타깝지만 점도 되지 않아요. 내일이면 사라질, 아니 지금 당장에라도 사라질 먼지예요.”
“그래서요?”
“사라지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넘어가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임병규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나를 압박했다. 나는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그래요. 이게 다예요.”
그는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임병규 대표님. 이제 가 봐도 되겠습니까? 먼지 같은 직장인에게 토요일인 황금 같은 휴일이거든요.”
“그 생각을 못했군요. 가 보세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지감 씨도요.”
임병규의 눈빛은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내가 그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라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듯했다. 갤러리를 나온 나는 싸한 눈으로 그곳을 훑어봤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조선웅이 서 있었던 난간이 보였다.
“이렇게 친히 경고까지 주시니 내가 상관해줘야지.”
이를 악물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 다음 날, 조선웅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전날 그를 고시텔 앞까지 데려다줬기에 그곳으로 찾아갔다. 문을 열자 지독한 술 냄새가 나를 덮쳐왔다. 술에 쩔어 있던 조선웅은 나를 보고 번쩍 눈을 뜨더니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의 방은 침대와 책상만으로 꽉 차는 좁은 공간이었고, 햇빛조차 들지 않았다. 거기에 술병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안 받으셔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오실 줄 알면 치워 놓는 건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밖에 나가서 말씀 나누실 수 있을까요?”
“네……. 옷만 걸치고 나가겠습니다.”
겉옷을 입은 조선웅과 고시텔에서 나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어제 일 때문인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선생님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이대로 있으실 겁니까?”
고개를 떨군 조선웅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요?”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 방법이 뭡니까?”
“방법은 선생님이 뭘 원하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제가…… 원하는 것이요……?”
“임병규 대표에게 약속받았던 갤러리와의 전속 계약, 개인전……. 그것이 선생님이 원하는 겁니까?”
“네……. 그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힘이 없었다. 오랫동안 그의 꿈이 짓밟혀왔기에, 언젠가 꿈이 이루어질 거란 희망은 힘을 잃어버렸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복수하고 싶은 대상이 임병규 대표입니까? 아니면 백하진 작가입니까?”
“둘 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한 사람만 고르라면 임병규 대표입니다. 임병규 대표와 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고, 그래서 백하진 작가를 소개받았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저를 조수로 써준다는 것에 바보같이 감사해했습니다.”
“믿었던 사람이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죠.”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안 좋은 결과를 접했을 때 그런 상대를 믿은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는 것에 있었다.
“그럼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제안을 설명했지만 조선웅은 쉽게 응하지 못했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가능할지 안 할지는 해 봐야 알겠지만, 저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지그시 나를 보던 조선웅이 조심스레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걸 물어보고 싶으신 겁니까?”
“네.”
그는 질문을 맞춘 나에게 놀라면서도 답을 바랐다. 요새 들어 왜 이렇게까지 하는 말을 참 많이 듣는 것 같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옥상에서는 그저 살리고 싶다는 마음만 강했습니다. 선생님을 응원했지만 제가 나서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임병규 대표를 만나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더 많은 사람이 다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솔직하게 의문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한지감 씨하고는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아니요. 상관없지 않습니다. 어제 집에 가서 몇 년간 발표된 백하진 작가들의 작품들을 봤습니다. 한 작품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작품이 없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본 건데도요. 실제로 보면 어떨지 기대가 되더군요. 선생님의 이름으로 된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울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만 무언가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다. 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돈 보다도 버틸 수 있도록 자신을 잡아주는 인정이다. 1년 전 나도 그랬으니까.
“저도 노력한 것을 받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어서 자포자기했던 시절이 있었죠. 선생님의 겪으신 일에 감히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드린 제안, 받아들이시겠습니까?”
“…….”
10년 동안 겪은 수많은 실패 때문인지, 그는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 듯했다. 외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 등을 부러뜨린다.’ 한계치가 다다른 존재는 아주 작은 일로도 주저앉는다. 지칠 대로 지친 조선웅에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지구를 들어올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 누구도 그 한 걸음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결정은 선생님이 하셔야 합니다. 선생님이 결정하시지 않으면 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마른 침을 삼킨 조선웅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겠습니다.”
“어려운 결정 감사드립니다.”
* 임병규가 이 국장에게 사케를 따랐다.
“술 한잔 받으시죠.”
“좋지.”
접대를 위해 임병규가 자주 찾는 이곳은 강남에서 가장 비싼 일식당으로, 일반 직장인은 갈 엄두도 못내는 곳이었다. 상에는 사케와 잘 어울리는 회와 초밥이 화려함을 빛내며 차려져 있었다. 술을 한잔 걸치고 기분이 좋아진 이 국장이 입을 열었다.
“부탁할게 뭐야?”
“지난번에 말씀드린 백하진 화가 조수 말입니다.”
“아. 그 사람 또 사고 쳤어?”
“뭐가 또 불만인지 언론사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피해자처럼 임병규는 얕은 한숨을 쉬었고, 이 국장은 혀를 끌끌 찼다.
“몹쓸 사람이구만. 예술성도 없는 인간을 자네가 구제해주지 않았나.”
“구제라기보다 도와준 거죠…….”
“사람이 쓸데없이 착해 빠져서는! 내가 뭐랬나.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잖나. 그런 사람 진작에 잘라버리라니까.”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사정이 워낙 딱해서…….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미술 한다고 가정도 안 만든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저도 더 이상 참기가 어렵네요.”
힘겨운 듯 임병규가 고개를 떨구었다. 임병규는 지금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그에겐 진실이었다. 나쁜 건 조선웅이었고, 자신의 선의는 이용당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국장은 사람이 너무 착한 것도 독이라고 여기며 안쓰러운 눈길로 임병규를 봤다.
“이번 기회에 정리해.”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인데, 언론에 이상한 말이라도 나돌지 않을지 걱정이 되네요.”
“걱정 말게. 내가 쫙 연락 돌려서 한마디도 안 나오게 하겠네.”
그동안 조선웅이 접촉했던 기자들이 다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드물게 몇몇 기사들이 미술계에서 영향력이 큰 임병규와 척을 질 생각을 하면서까지 기사를 썼지만, 기사가 나가는 일은 없었다. 데스크에서 승인해주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 사실을 조선웅에게 말해주지 않았기에, 그는 기자들이 모두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만 여겼다. 이 국장의 말을 들은 임병규의 표정은 환해졌다.
“정말 그래주실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네 일인데 내 당연히 들어줘야지.”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잔말 말고 술이나 따라주게!”
임병규가 술잔을 다시 채웠고, 이 국장은 흡족하게 잔을 비워냈다. 그런 이 국장을 보면서 임병규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한지감이 문제를 만들 것 같진 않았다. 그렇지만 자살 소동까지 벌인 조선웅이 또 무슨 짓을 벌일까 내심 불안했고,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는 차원이었다.
“그런데 언론은 내가 단속한다 쳐도, 고소가 들어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다른 수가 있나요. 차 변호사에게 연락해서 진행해야죠.”
“그래. 혹시 재판이 진행되어도 기사는 안 나갈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네. 감사합니다.”
고소가 되면 골치 아프긴 했지만, 공론화되지만 않으면 비난받을 일이 거의 없다. 법적으로도 대작 혐의는 나머지 조수들을 입을 맞추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일이다. 작업 노트가 좀 걸리긴 하지만, 집을 뒤져서 안 나왔으니 작업실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결국 조선웅은 패소할 것이고, 만에 하나 승소한다 해도 한국에서 화가로 활동하기는 힘들다. 유명하면 모를까, 보수적인 미술계에서 갤러리와 법정까지 간 화가를 반길 리는 없었다. 결론적으로 뭘 하든 조선웅은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자네도 술 한잔 받게.”
“네.”
술을 받은 임병규가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술이 다네요.”
승리는 달콤하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승리의 여신은 임병규의 편이었다. * 현관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오 장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
오 장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를 거실로 안내했다. 거실 한가운데 그가 나에게 구매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이 걸려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지, 작품을 보는 오 장관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급하게 찾아뵙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것도 하필 일요일 밤이라니 정말 달갑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빠른 처리를 요하는 것이기에 연락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오 장관은 무슨 일로 왔냐는 듯 멀뚱히 나를 봤다. 나는 가방에서 조선웅에 관련된 자료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봐주셨으면 합니다.”
안경을 끼고 오 장관은 천천히 그 자료를 전부 읽고, 좀처럼 듣기 어려웠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에게 이걸 보여주는 이유가 뭐요? 문체부 장관인 내가 나서길 바라는 것이오?”
“고소를 진행할 겁니다. 그때 장관님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오 장관의 표정이 굳어졌다.
“개인적인 인연을 공적인 일에 이용하는 사람인지는 몰랐소.”
“이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동등한 조건을 원하는 것뿐입니다.”
설명이 이어졌지만 오 장관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반복된 말에 피로했는지 오 장관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생각해 보겠으니 이만 가보시오.”
“네. 가보겠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더 있다가는 역효과가 나올 것 같아 나는 그만 일어섰다. 차에 타는데 조선웅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발 일이 잘 되었어야 하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기로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제 오 장관의 도움만 받는다면 판이 완성된다. * 임병규의 설명을 들은 차 변호사가 말했다.
“작업 노트가 있다고 해도 백하진 작가의 감독하에 이뤄진 작업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됩니다. 작가님이 따로 쓰신 일지나 일기, 그리고 조수들의 증언이 있으면 승소는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조치를 취하도록 하죠.”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이 딱 맞군요.”
임병규가 씁쓸하게 웃었다.
“집안 단속을 잘못한 제 탓이죠.”
“그게 왜 대표님 탓입니까. 그런 생각 마세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차 변호사가 있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되네요.”
“과찬이십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직원이 헉헉 숨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대표님……. 지금 뉴스에…….”
“천천히 말해 봐요.”
“백하진 작가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습니다…….”
“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임병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는 것이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직원은 TV를 켰다. 뉴스엔 정말 백하진과 조선웅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나왔다.
“이게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짐작이 되지 않아 임병규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TV속 백하진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임병규 대표님은 제 은인이지만 제 수석 조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계속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 저도 수석 조수도 지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고민 끝에 수석 조수와 함께 세원 갤러리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