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백하진 (4)2021.07.17.
기자회견 하루 전. 나는 조선웅의 눈을 똑바로 보며 제안했다.
“그럼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백하진 작가와 공동작업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동작업이라뇨?”
“조수가 아닌, 동등한 작가 대 작가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동등한 입장에서요?”
“현재 선생님의 이름만으로는 메이저 갤러리들과 전속계약하기 어렵습니다.”
작가의 세계도 연예계와 다를 것이 없다. 스타성이 있다고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실력이 있다고 스타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더 주목을 받는 자들은 전자이고, 조선웅은 후자이다. 풀이 죽은 조선웅이 힘없이 말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하진 작가와 함께라면 다르죠. 원하시는 대로 전속 계약도, 전시회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단독 전시회는 아니겠지만 말이죠. 몇 년 동안 공동작업을 하시면서 선생님의 인지도를 올린다면, 원하시는 대로 단독 전시회를 하실 수 있겠죠.”
“…….”
지금 상황에서 혹할 만한 이야기인데도 조선웅은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제안이 현실화될 요소들을 말하기로 했다.
“백하진 작가와 임병규 대표 사이가 좋지 않더군요.”
임병규를 만나고 나와 바로 다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갤러리 인맥을 활용하여 백하진 작가와 임병규 대표의 관계가 어떤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고 하지 않는가. 조사한 보람이 있게 두 사람의 사이는 좋지 않았을뿐더러 동등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직접 발굴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임병규는 백하진을 아랫사람처럼 대했고, 백하진은 거기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었다. 그 불만을 파고 들면 지금 내가 말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가능성을 말하는데도 조선웅은 자꾸만 부정적인 면에 시선이 가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현재 백하진 작가는 임병규 대표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20년이나 이어진 관계입니다.”
“부모자식 관계도 이익이 맞지 않으면 돌아서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요?”
“가능할지 안 할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저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웅은 어렵게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곧장 백하진이 사는 오피스텔로 갔다. 집은 따로 있었지만 백하진이 살다시피 하는 룸살롱이 근처라 주로 오피스텔에 있다고 했다. 조선웅이 초인종을 누르자 나는 벽 뒤에 몸을 밀착시켰다. 혹시라도 백하진이 나를 보고 문을 열지 않을 것을 대비하는 차원이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백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나를 본 백하진은 황급히 문을 닫으려 했지만, 문 사이로 발을 끼워넣어 이를 저지했다.
“백하진 작가님, 잠시면 되니 이야기 좀 나누시죠.”
“조선웅! 이 사람 누구야!”
“…….”
조선웅은 고개를 돌린 채 대답을 거부했고, 나는 힘으로 문을 활짝 열고 여유롭게 말했다.
“제 소개는 제가 하죠. 탑 옥션 한지감이라고 합니다.”
“난 또 기자인 줄 알고……. 식겁했잖아.”
“기자 아닙니다. 저는 그저 작가님께 드리고 싶은 제안이 있어서 왔습니다. 잠깐만 시간 내주시죠.”
백하진이 선뜻 결정하지 못하자 조선웅이 나섰다.
“선생님이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죠. 기자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들어와.”
의자에 앉기 무섭게 나는 세원 갤러리를 떠나 조선웅과 다른 유명 갤러리에 안착할 것을 제안했다. 백하진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나를 봤다.
“내가 왜 그런 어이없는 제안을 수락해야 하죠?”
“여태까지 발표했던 작품들 모두 백하진 작가님이 아닌 조선웅 선생님을 통해서 만들어졌지 않습니까.”
“그게 뭐? 유명 작가들은 다 그렇게 작업해! 아이디어는 내가 줬어!”
“아이디어가 아니라 키워드를 주셨던데요?”
백하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쟁 주제 작품으로 그려서 특별상을 타셨죠. 그 이후 계속 전쟁에 관련된 걸 만들어달라고 조선웅 선생님에게 말씀하셨구요. ‘키워드’는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뭐? 그걸 누가 믿을 것 같아……! 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상 탄 작가야. 조선웅은 아무것도 아닌 조수고!”
“보자보자 하니까…….”
욱한 조선웅이 벌떡 일어서자 나는 그를 다독여 다시 앉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백하진은 조선웅의 격해진 감정을 보고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작가님, 상 탄 작품 말입니다. 그거 본인 아이디어 아니시죠?”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아이디어 맞아!”
“작가님께서는 ‘전쟁’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20년 전 세원 갤러리와 계약하고 그로부터 5년간 작가님께서 계속 만들었던 작품은 여인의 나체였죠. 그런데 15년 전에 갑자기 전쟁을 주제로 한 설치미술 작품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상을 타면서 ‘평화를 염원하는 작가’란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악에 찬 백하진이 소리쳤다.
“그게 뭐! 이전과 다른 새로운 작업을 하는 건 아무 문제가 안 돼!”
“그렇죠. 다른 작업을 하는 건 아아무 문제가 안 되죠. 작가님 본인의 아이디어라면 말입니다. 근데 본인 것이 아니었죠?”
“내 아이디어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신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고개를 드는 백하진을 보면서 나는 픽 웃었다. 그런 나를 보고 백하진이 눈을 부라렸다.
“웃어?”
“네. 웃기네요. 임병규 대표가 아이디어를 줬다는 걸 몰랐으면, 작가님이 했다는 것 믿을 뻔했어요. 주목을 받은 작품들 중 하나도 작가님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건 없어요.”
파르르 백하진의 입술이 떨렸다.
“어……어떻게 그걸……?”
나는 여유롭게 싱긋 웃고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지가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부터 작가님의 앞날의 더 중요하죠. 조선웅 작가님과 함께 둥지를 옮겨 공동작업을 한다면 작업노트는 영원히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임 대표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래서 계속 임병규 대표가 하라는 대로 그렇게 사실 겁니까? 작가님 덕에 명성을 이어가는 곳인데, 작가님을 멋대로 대하도록 그렇게 놔두실 거냔 말입니다.”
이를 악문 백하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도 임병규의 행태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시간을 많이 드리고 싶지만, 저희도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밤까지는 결정해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선웅과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조선웅이 나를 신기한 눈으로 봤다.
“왜 그러십니까?”
“특별상을 수상한 작품이 백하진 작가님의 아이디어가 아니란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백하진 작가 정도의 명성이면 다른 메이저 갤러리를 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근데 왜 불만을 가지면서도 임병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이상하더군요.”
임병규가 싫으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작품 때문이 아닐까. 상을 받았던 작품이 백하진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면, 임병규를 떠나고 싶으면서도 자립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심증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 심증을 받쳐주는 정황이 있었죠. 그 당시 유명 작가들이 줄지어 세원 갤러리를 떠났습니다. 불안한 임병규 갤러리의 작가 중 유명 작가로 만들 사람을 찾았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백하진이 선택하고 ‘전쟁’이란 키워드가 들어간 작품을 만들도록 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습니다.”
한국인 작가가 ‘전쟁’이라는 주제를 다루면 해외 비엔날레에서 수상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가 베트남을 떠올리면 ‘베트남 전쟁’을 많이 떠올리듯이, 해외에서는 아직도 한국을 ‘한국 전쟁’으로 기억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서 법률사무소 윤재홍 대표의 딸, 윤이서에게 온 전화였다.
“알아보셨나요?”
[네. 지감 씨가 생각한 것이 맞았어요. 데스크에서 기사가 못 나가게 막았네요.]
“역시 그랬군요.”
작업 노트가 있는데도 매번 조선웅의 기사가 나가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언론사에 아는 사람이 없어 부득이하게 윤이서의 연줄을 활용하기로 했다.
“급하게 부탁드린 건데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걸로 무료 변호는 없는 걸로 치겠습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네?”
[우리 아이들 잘 맡아서 판매해 주신 분을 그렇게 대할 수는 없죠. 언제든지 필요하면 오세요. 정보원 노릇도 할 테니 자주 연락주시구요.]
“그럼 너무 제가 죄송한데요.”
[죄송하면 좋은 아이들 추천 좀 해줘요. 그거면 돼요.]
“그거라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통화를 마치고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조선웅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얼굴이 하얘졌다.
“언론이 막힌 거라면 백하진 작가가 제안을 받아들인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소용이 있도록 만들어야죠.”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언론사 사주와 가족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가서 설득해 보겠습니다.”
오 장관의 아내가 언론사 오너가였기에 나는 그를 찾아갔다. 백하진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다행히도 오 장관의 아내가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기자회견은 내일 오후로 정했다. 임병규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빨리 터트려야 했다.
* 월요일 오후 기자회견 당일. 고개를 숙인 백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렵게 참석해주신 기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부로 세원 갤러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손을 든 기자 한 명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세원 갤러리 임병규 대표가 작가님을 발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겁니까?”
“……맞습니다. 임병규 대표님은 저의 은인입니다……. 하지만…….”
백하진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임병규 대표님은 제 은인이지만, 조선웅 수석 조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계속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 저도 수석 조수도 지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고민 끝에 수석 조수와 함께 세원 갤러리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쪽에 앉은 기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어떤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까?”
“임병규 대표님은…… 제 수석 조수에게 전속 계약과 개인 전시를 약속했지만 아무것도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전 지속적으로 약속을 지켜달라 말씀드렸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20년 인연을 끝내신다는 겁니까?”
버럭 백하진이 화를 냈다.
“고작 그런 이유라니요! 이는 미술계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이런 착취가 반복된다면 한국에서는 어떤 뛰어난 화가도 나올 수 없습니다!”
불같은 백하진의 반응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감정을 가라앉힌 백하진이 고개를 떨궜다.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감정이 갑자기 격해졌습니다. 하지만 업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제가 막을 수는 없어도, 저와 10년 이상 합을 맞춰온 수석 조수만은 이런 대우를 받지 않도록 막고 싶었습니다.”
뒤편에 앉은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서 질문했다.
“화가로써 큰 리스크를 감수하며 세원 갤러리와 이별하셨는데요. 이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으십니까?”
“조선웅 조수…… 아니 작가와 함께 공동작업을 할 계획입니다.”
“조율 중인 갤러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조선웅 작가와 함께 갈 수 있는 갤러리라면 어디든 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업계 관행이라는 말 아래 조수를 착취하는 일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기자회면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온 백하진은 소파에 널브러졌다.
“아…… 힘들어.”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한지감은 그 모습이 못마땅하면서도 기분을 맞춰주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키는 대로 열사인 척은 하긴 했는데, 정말 다른 갤러리에서 연락이 올까?”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백하진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백하진입니다. ……리아 갤러리요?”
백하진의 눈이 커졌다. 리아 갤러리는 한국의 최고 갤러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지만 일부러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네. 조선웅 작가와 상의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가 끝나자 백하진은 언제 지쳤냐는 듯 폴짝폴짝 뛰었다.
“정말 당신이 말하는 대로 됐네.”
“그럴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갤러리랑 척진 전적이 있으니 꺼릴 줄 알았지.”
“백하진 작가는 유명하고, 언론에서 호의적이니까요.”
조선웅이 이런 일을 벌였다면 바로 매장당했겠지만, 백하진은 수상 이력과 좋은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데 말야. 임병규가 역으로 언론에 내 이야길 꺼내면 어쩌지? 특별상 작품 말까지 나오면…….”
“자기도 잘못한 것이 있으니 쉽게 이야기를 하진 못할 겁니다. 눈이 돌아서 한다고 해도 여론은 작가님께 호의적이니, 모함으로 몰아가면 됩니다.”
“머리 좋네. 내 매니저 할 생각 없어?”
“없습니다. 기자회견 다 끝났으니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러든지.”
백하진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소파에 다시 널브러졌지만, 조선웅은 조용히 한지감을 따라나왔다.
“작가님, 왜 나오셨어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작품 저희 옥션에 위탁해주세요. 그럼 됩니다.”
씨익, 한지감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 임병규는 이를 갈면서 꺼진 TV 화면을 노려봤다.
“감히 네가 내 뒤통수를 쳐?”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면서 강정휘가 들어섰다.
“임 대표, 오랜만이야.”
앉으라는 이야기가 없는데도 강정휘는 자신의 사무실인 양 편하게 소파에 앉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임병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냥 가시죠. 들을 이야기도 할 이야기도 없습니다.”
“할 이야기는 없어도 들을 이야기는 있을 텐데.”
“없으니까 가시죠!”
강정휘가 묘한 눈으로 임병규를 훑어보았다.
“이번 일 정말 백하진이 벌였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