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은배 (1)2021.07.24.
“괜찮아요. 김 비서님.”
나는 김 비서를 말리려고 다가갔다가 찻장 구석에 있는 각진 은색잔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속 반 이상 그 모습이 가려져있어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메시지가 뜨지 않았다. 하지만 소름 돋는 느낌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설마…… 팔환은배(八環銀杯)인가? 사극, 소설 등에서 하도 많이 나와 우리에게 정말 친숙한 왕 정조. 그는 1798년 성균관에 방문해 유생에게 음식과 술잔을 내렸다. 이 술잔의 명칭이 바로 팔환은배였고, 바닥에는 시경 녹명장의 ‘我有嘉貧(아유가빈)’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我有嘉貧’은 ‘나에겐 훌륭한 손님이 있네.’라는 의미이다. 이날 정조는 친히 자신이 지은 시를 내렸고 잔치를 베풀며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 이 시들을 모은 책이 바로 ‘태학은배시집’이다. 언젠가 전시회에서 ‘태학은배시집’과 ‘팔환은배’ 재현품을 본 적이 있었지만, 진품을 본 적은 없다. 사료에 적혀 있을 뿐, 단 한 점도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일이 없었다. 은색 잔을 꺼내지 않은 상태에서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하려 했지만, 어둠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다. 이런 나를 본 김 비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곁눈질로 중개사를 보니 이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어 나는 살짝 안도했다. 중개사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김 비서에게 말했다. 일단 혼자 이 잔을 자세하게 보고 싶다.
“저…… 중개사분과 대화하시면서 시간 좀 끌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저벅저벅 중개사에게 다가간 김 비서는 술에 취한 남자를 한심한 눈빛으로 봤다.
“원래 이렇게 술에 쩔어 있습니까?”
“네……. 그 덕분에 이 건물이 싼 가격으로 나온 겁니다.”
“대출받은 건 등기에 나오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찜찜하네요.”
“술 마시고 도박판 기웃거리느라고 은행 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김 비서가 불안함을 표현하는 사이 나는 조심스레 엉망진창인 컵을 밀어내고 은색 잔을 잡았다. 빛 속에서 마침내 제대로 된 모습을 드러냈다. 팔각형으로 된 은색 잔이다. 전체적인 형태가 보이자 곧바로 메시지가 떴다. [ 0원 | 진 | 500,000,000원 | 1890년대 | 없음 ] 1890년대의 물건이면 팔환은배일 가능성이 크다. 확실한 것은 바닥을 보면 된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바닥을 보았다. ‘我有嘉貧’이라는 글씨가 흐리하게 쓰여 있었다!
“하……!”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는 것을 입을 막아 간신히 막았다. 이 귀한 물건이 이곳에 있다니! 최고가는 5억이지만 시장에 내놓았을 때 적정가격은 2-3억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가격을 떠나 ‘정조’가 성균관 유생에게 내린 잔이라는 것이 의미있을뿐더러, 사료에 나오는 유물은 학술적인 가치도 높다.
그때 중개사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근데 부엌에서 뭘 그렇게 하세요?”
“저기 대출 문제를…….”
김 비서가 말리는데도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재빨리 팔환은배를 찻장에 되돌려 놓고 싱크대 물을 틀었다. 의아한 눈으로 날 보는 중개사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물이 잘 나오는지, 잘 빠지는지 궁금해서요.”
“아아. 진작에 말씀하시지. 여기 새 건물이라서 이런 문제는 거의 없어요.”
“새 건물이라도 문제 있는 곳은 있더라구요.”
“사도 여기서 살진 않을 거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나는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답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그건 또 그렇죠.”
“확인은 끝났으니 이만 나가죠.”
나는 혼란스런 마음을 숨긴 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갔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머릿속은 복잡했다. 옥션 직원이라는 것을 밝히고 그 도박꾼에게 위탁을 받는 방법이 가장 정석이다. 하지만 정석인 방법을 택하기엔 도박꾼이라는 것이 걸렸다. 옆에서 말없이 가만히 있던 김 비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알아서 가겠다고 했지만, 날 위해서 이곳까지 와준 것이 고마워서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가만히 눈치를 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어떤 물건을 보신 겁니까?”
“팔환은배라는 귀한 술잔이 있더군요.”
나는 팔환은배에 어떤 가치가 있는 술잔인지 간략하게 설명했고, 김 비서의 눈은 커졌다.
“그렇게 귀한 술잔이 왜 거기에……?”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게 궁금하네요. 위탁받고 싶은데 소장자가 도박꾼이라는 것이 걸려요.”
“그렇죠. 지금 상가야 안 팔리고 있어서 그런다고 쳐도, 돈 냄새 맡으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요.”
위탁 제안하면 물건의 가치를 도박꾼도 알아차릴 것이고, 가격협상 때 터무니없는 높은 가격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난색을 표하면 다른 곳과 접촉해 판매할지도 모른다. 팔환은배라면 대기업 회장들도 관심을 보일 만한 물건이기 때문에, 다른 골동상에서 냄새라도 맡는 날에는 낭패였다. 어떻게 해야 팔환은배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위탁받을 수가 있을까. 계속 머리를 굴리는데도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나를 안쓰럽게 보다 김 비서가 말했다.
“그냥 가지고 나오시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없어져도 몰랐을 겁니다.”
“그런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습니다.”
귀한 물건이 이런 홀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김 비서의 말대로 내가 그 물건을 가져나갔다고 한들 도박꾼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절도이지 않은가. 그래서 결국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김 비서가 말했다.
“그 사람은 저렇게 좋은 상가씩이나 갖고 있으면서, 왜 도박을 하면서 인생을 낭비할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훨씬 좋은 선택지가 있을 텐데 말이죠.”
“솔직히 아까 화가 났습니다. 저만 해도 곧 전세계약이 끝나서 집주인하고 협상하느라 애를 먹고 있거든요.”
“힘들겠네요.”
“잘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근심 어린 가득한 표정은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말해주었다. 김 비서는 전세 때문에 걱정이고, 도박꾼은 도박할 돈이 없어서 난리다. 아까 김 비서는 도박꾼을 보면서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성실히 사는 자신을 전세 때문에 걱정인데, 고작 도박자금을 얻고자 상가를 판다니 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인가. * 식당으로 들어선 강민수는 조심스레 안을 둘러봤다. 이런 고급 일식집은 처음이어서 어색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직원에게 말했다.
“임병규 대표님과 약속이 되어 있는데요.”
“네. 이쪽으로 오시죠.”
직원의 안내를 따라 식당에 있는 가장 큰 방 앞에 섰다. 문을 두드리자 임병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문을 열자 임병규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강민수를 반겼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그런 말 말아요. 탑 옥션에서 정직원이 되었다죠?”
“네. 되었습니다.”
탑 옥션의 정직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러운지 그는 어깨를 쫙 피었다.
“정말 축하해요. 강민수 씨라면 잘할 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헤벌쭉 강민수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줄곧 고팠던 칭찬이었지만 탑 옥션에서는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직원으로 회사에서 일한지 일주일 정도 지났지만 이 팀장은 강민수를 좀처럼 품어주지 않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티를 내지 못했다. 임병규가 화려한 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식사부터 하죠.”
“네.”
식사를 하면서서 강민수는 임병규가 왜 연락을 했는지 궁금했다. 백하진 작가가 기자회견을 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강민수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배를 채운 임병규가 운을 뗐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죠?”
“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그럴 수 있죠. 얼마 전 백하진 작가 기자회견 봤어요?”
“네……. 봤습니다.”
난색을 보이는 강민수를 보며 임병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무너져내리더군요.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 도리어 비수가 되어 꽂히다니……. 정말 힘겨웠어요.”
“이해합니다. 대표님.”
“백하진 작가도, 조선웅 조수도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해라도 풀고 싶어서 개인적으로 찾아가도 봤지만 만날 수 없더군요.”
강민수는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다.
“조선웅은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백하진 작가가 그럴 수가 있습니까. 20년의 세월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내가 속상해하니 직원들이 다른 갤러리에서 좋은 조건을 제안받아 백하진 작가가 그런 일을 벌인 것일 거라고 하더군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접었을 때쯤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민수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되물었다.
“이상한 이야기요?”
“네. 이 일을 벌인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요?”
“저도 강민수 씨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 강민수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혹시, 한지감 씨입니까?”
“맞습니다. 마대호 작가의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설득해준 사람이라 더없이 고마워했는데, 이렇게 등에 칼을 꽂을 줄은…….”
힘겨워하는 임병규에게 강민수는 짙은 동질감을 얻었다.
“저는 처음부터 한지감 씨에게 찜찜함을 느꼈습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그림도 그렇고, 대표님께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이게 다 제가 부덕한 탓이겠죠…….”
“대표님 탓이 아니에요.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대표님 탓하세요.”
한숨을 푹 쉰 임병규가 푸념하듯 말했다.
“정말 제 잘못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대표님. 제 말을 믿으십시오.”
“고마워요. 민수 씨. 정말 큰 위로가 되네요.”
“전 진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민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임병규와 강민수는 한지감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다. 이번 기자회견으로 세원 갤러리의 입지가 흔들렸다고는 해도, 아직 한국을 대표하는 메이저 갤러리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수지란 연줄은 놓을 수 없지만 그녀는 한지감이 다치지 않길 바랐다. 그러니 한지감이 다쳐도 상관없는 임병규라는 연줄은, 상황에 따라 줄을 갈아탈 수 있는 훌륭한 보험이다. 씨익 강민수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임병규를 포섭하기 위한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대표님, 기자회견 내용 업계 사람들 상당수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대표님 같은 입지적인 분께서 그런 일에 영향받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음 푹 놓으십시오.”
“고마워요. 민수 씨.”
임병규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겉으로는 서로를 위로하는 훈훈한 모습이었지만, 속사정은 서로를 이용하려는 욕망의 장(場)이었다. *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서정선의 표정이 굳어졌고, 백 책임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민 회장님 유품, 나까마가 아도 쳐서 가져갔대.”
“아…….”
“내가 위탁하라고 말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혹 그 나까마가 내가 단원의 위작과 고려청자를 구매했던 그 사람은 아닐까. 하긴 그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좋은 미술품이 많았는지 서정선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꽤 공을 많이 들인 모양이다. 날카로워진 서정선 때문인지 백 책임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웠다.
“반드시 위탁받고 싶은 미술품이 있으셨어요?”
“전명자 화가 작품, 꼭 위탁받고 싶었지.”
“나비와 여인 시리즈였나요?”
“맞아.”
일을 해야 하는데도 나는 자꾸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낮은 한숨을 쉰 서정선이 중얼거리는 말했다.
“하아……. 그 나까마 누군지 알고 싶다.”
“알아서 뭐하시게요. 열만 받죠.”
“누구인지 알아야 되갚아주지. 분명 전명자 화가 작품이 탐나서 아도쳐서 가져갔을 거야. 말은 안 하지만 엄청 싼 가격에 넘긴 것 같아.”
“나까마들 그게 주특기잖아요.”
내가 만났던 나까마도 엄청 저렴한 가격에 고려청자를 손에 넣었다. 그 가치를 전혀 몰랐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머릿속에 팔환은배가 계속 돌아서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걸 어떻게 티나지 않게 사올 수 있을까? 그때 문득 나까마에게 유물을 살 때 내가 취했던 방법이 떠올랐다. 좀 더 정확하게는 사학자 곰퍼츠가 썼던 방법이다. 100% 통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방법이라면 시도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