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은배 (2)2021.07.26.
나는 바로 중개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괜찮은 상가입니다.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을 받아들이시면 계약 바로 진행하죠.”
[말씀하세요.]
나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말했다.
“가전제품, 가재도구나 집기를 그대로 두고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사실 계획이십니까?]
“제가 아니라 그때 저와 동행했던 분이 그곳에서 관리인으로 사실 계획입니다. 그래서 개인적 소지품을 제외하고 나머지 물건들을 두고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천만 원을 더 얹어드리도록 하죠.”
[저…… 이런 말씀 좀 그렇지만 TV하고 냉장고가 다 신형 제품이기도 하고, 거기 인테리어 하는 데 1억 넘게 들었습니다. 맨몸으로 나가는데 천만 원은 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일부러 적게 불렀다.
“그럼 오천만 원으로 하죠.”
[감사합니다.]
협상 테이블에 나갈 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가 8이라면 4나 5정도를 부른다. 그리고 상대방이 더한 것을 요구한다면 그때서야 내가 최고가를 꺼낸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더한 것을 받아냈다는 성취감을 얻고, 원하는 선에서 협상을 할 수 있다. 물론 상대가 절대적인 갑이라면 이런 방법은 안 통하지만, 비슷한 상황일 때는 가능하다.
[그 조건이면 김 씨도 하겠다고 할 겁니다! 청소업체까지 불러서 싹 다 깨끗하게 해놓겠습니다.]
이건 곤란하다. 청소하다가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팔환은배를 버리기라도 한다면, 혹은 본능적으로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이 가져가버리기라도 한다면 곤란하다.
“아닙니다. 청소는 제가 아는 업체에 맡길 거라서요. 그편이 훨씬 깔끔하기도 하구요. 그냥 빠른 시일 내에 계약 진행하고 비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김 씨하고 이야기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통화가 끝나고 나니 목이 말라 벌컥벌컥 물 한 잔을 싹 들이켰다. 최고의 방법이라고는 말 못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는 사학자 곰퍼츠를 떠올렸다. 고려청자를 좋아했던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집을 했고, 고양이 밥그릇으로 사용되는 진품 고려청자를 발견했다. 그는 주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고양이를 샀고, 밥그릇을 공으로 얻었다. 나는 팔환은배를 차지하기 위해 상가를 사기로 결정했다.
“이제 남은 건 그 집에 들어가는 날까지 팔환은배가 무사하길 바라는 것뿐이겠네.”
그때까지 팔환은배가 무사할 수 있을까. 물을 마셨는데도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 택시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는데 김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선생님!”
고개를 돌리니 김 비서가 나를 반기며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천천히 오세요.”
“허억…… 허억…….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뭐 가뿐하죠!”
하나도 가뿐해 보이지 않았지만 민망할까 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근처에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죠.”
“네. 이쪽으로 오세요.”
김 비서의 안내를 따라 분위기 좋은 카페로 들어섰다. 남자 둘이서, 그것도 경환이 아닌 김 비서와 이런 곳에 온다는 것이 어쩐지 기분이 좀 묘했다.
“뭐 드시겠어요?”
“따듯한 코코아요.”
다영에게 옮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코코아를 마시면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생크림까지 올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김 비서 앞이라 참았다. 잠시 후. 음료수가 나왔고 우리는 카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전화 주시면 제가 갔을 텐데요.”
택시에 탄 뒤 나는 김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다. 먼저 전화를 했으면 바로 김 비서가 달려왔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뵙자고 했어요.”
“네. 말씀하세요.”
배움을 청하는 학생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이 살짝 부담스러웠다.
“얼마 전에 함께 봤던 상가 매입하려고 해요.”
“아. 그렇게 결정하셨습니까?”
“한 달 후면 그때 보셨던 상가 꼭대기 층이 비워질 거예요.”
“그렇군요.”
맞장구를 치면서도 왜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의아한 듯했다.
“거기서 사시면서 관리인을 겸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네……?”
“월세는 따로 내지 않아도 됩니다. 월급은 여태까지와 동일한 급액을 지급하겠습니다.”
김 비서가 결정하면 서인범의 변호사를 통해 상황을 알리고 월급을 내가 지급할 생각이다. 그는 반쯤 넋이 빠져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싫으십니까?”
“아……아니요……. 좋습니다. 좋은데…….”
“왜 이런 제안을 김 비서님에게 하냐구요?”
“네…….”
“상가 건물이라는 것이 관리가 중요한데, 제가 직접 할 수 없어서요. 유경험자니까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제안이에요.”
“감……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김 비서가 외치듯 말하는 바람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곧 그 시선을 알아차린 그는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면서도 그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상가를 보고 오던 날, 차 안에서 전세 때문에 걱정하는 김 비서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가게가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가 전세 때문에 힘겨워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는 집 주인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전세값을 동결해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보고 있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는 간절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비굴하다고 느껴 한동안 아버지를 피했었다. 돈을 벌어 스스로 월세를 낸 이후에서야 아버지의 당시 행동이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남들이 보면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리 이타적인 결정은 아니다. 아까 말한 대로 상가를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내가 지속적으로 신경 쓰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윈윈이었다. * 일을 해야 하는데 나의 시선은 자꾸만 핸드폰을 향했다. 오늘은 김 비서가 상가로 들어가는 날이자 팔환은배를 확인하는 날이기도 했다. 확인하자마자 연락을 주기로 했건만 한 시간째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힐긋 힐긋 핸드폰 액정을 보는데 김 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면서 나는 황급히 유리문 밖으로 나왔다.
“여보세요?”
[한 선생님…….]
김 비서의 목소리가 어두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팔환은배는 결국 나에게 올 운명이 아니었던 걸까?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전 주인이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꾹꾹 누른 목소리에서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분명히 어제까지 집 비워주기로 하지 않았나요?”
[네. 열쇠만 받아서 들어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전 주인이 열쇠 자체를 안 줬더군요. 전화 기다리실 것 같아 연락드렸어요.]
“혹시 전 주인이 뭔가 눈치챈 것 같나요?”
그렇다면 낭패였다.
[아직 보지 않아서 정확하진 않지만, 그건 아닐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주인을 나오게 하고, 확인한 다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제가 주인이니 직접 가서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일하시는 중이실 텐데 괜찮으십니까?.]
“반차 내면 되죠.”
[네. 알겠습니다.]
몸을 쓰는 영역에서 김 비서는 최적화되어있기에 자칫 육탄전으로 일이 커질까 걱정스러웠다. 여차하면 경찰을 부르면 되지만, 그 전에 일단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팔환은배 때문이라도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다. 나는 반차를 쓰고 바로 상가로 향했다. 상가 앞에 냄비 등 세간을 실은 작은 봉고차가 보였다. 꼭대기 층인 5층으로 올라가니 중개사와 김 비서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네.”
인사를 건네는 김 비서와 달리, 중개사는 고개를 숙인 채 내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중개사님, 일 처리를 이렇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분명 어제 비워주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분명히 나간다고 했는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라고 더 하고 싶었지만 이미 미안해하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쿵쿵 문을 두드렸다.
“들리시죠?”
“…….”
“들리시는 거 다 압니다. 파시지 않았습니까. 근데 왜 이러는 겁니까?”
“…….”
정말 팔환은배의 존재를 알아차린 걸까. 만약 그랬다면 흥정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팔환은배의 존재를 모르는 거라면 도박꾼은 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걸까.
“문 당장 여세요! 문 안 여시면 경찰과 열쇠공 불러서 따고 들어갑니다.”
협박이 효과가 있었는지 달칵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김 비서가 문을 열자 현관에 주저앉아있는 도박꾼이 보였다. 당장 지나쳐 찻장에 있는 팔환은배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러기엔 도박꾼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당장 끌어낼 태세를 취하는 김 비서를 말리며 그에게 물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없어…….”
뭐가 없다는 거야.
“안 들립니다. 크게 말씀해주세요.”
“갈 곳이 없다고……!”
도박꾼은 뚝뚝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중개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도박꾼에게 달려들었다.
“설마…… 상가 판 돈 다 날린 거 아니지? 그렇지……?”
“…….”
도박꾼은 아무 말도 못한 채 꺽꺽거리며 눈물만 흘렸고, 중개사는 그런 도박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 사람아! 어쩌려고 그랬어!”
15억이 넘는 돈을 도박판에서 날리다니…….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유물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나는 한 불쌍한 인간을 바라봤다. 한 시간쯤 후, 중개사가 도박꾼을 자신의 가게로 데려가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제야 나는 부엌으로 가서 찻장을 열 수 있었다. 그곳에는 빛나는 자태를 자랑하는 팔환은배가 있었다. [ 0원 | 진 | 500,000,000원 | 1890년대 | 없음 ] 씨익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 비서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원하시는 대로 술잔을 얻으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이에요.”
“제가 한 것이 뭐가 있다구요.”
“참, 가족분들은 왜 안 보이세요?”
“아이가 친구들이랑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해서, 오늘 하루는 거기에서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나는 팔환은배를 한지에 조심스럽게 싸서 상자에 넣었다. 이전 상황은 신경 쓰지 않는데도 김 비서는 자꾸만 내 눈치를 봤다.
“제가 잘 처리해야 하는데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팔환은배를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렇게 잘 확인했구요. 짐 얼른 정리하고 식사나 같이하죠.”
“짐 정리는 저 혼자서 하면 됩니다. 그냥 올려만 놓고 식사만…….”
소매를 걷어붙이며 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어서 하시죠! 반차 내고 와서 시간도 많습니다!”
* 짐 정리를 끝내고, 나와 김 비서는 근처 중국집으로 가서 유일한 룸을 차지했다. 메뉴판을 찬찬히 본 김 비서가 요리와 고량주를 잔뜩 시켰고, 금방 세팅이 되었다. 김 비서가 요리들을 가리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제가 사는 거니 많이 드십시오.”
“잘 먹겠습니다.”
팔보채, 유산슬, 깐쇼새우, 깐풍기에 이르기까지 좋은 음식들이 입을 즐겁게 한 뒤 고량주가 뜨끈하게 목을 지져주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취기가 올랐다. 그런 나를 보고 김 비서가 걱정스레 말했다.
“너무 많이 마신 것 아니십니까?”
“좋은 물건이 생기니 기분이 좋아서요. 그래서 좀 마셨습니다.”
“기분 좋은 날은 좀 마시는 것도 괜찮죠. 그래도 너무 과음하시진 마세요. 건강 해칩니다.”
깍듯한 존댓말이 어쩐지 거슬렸다. 이제 이 관계를 바꿔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더 이상 그는 강정휘의 비서가 아니었고, 어느새 든든한 나의 편으로 자리잡았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이렇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난감한 기색이 어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요. 말 놓으세요, 태하 형.”
“……그래도.”
“어서요.”
고민하던 김태하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다. 지감아.”
“봐요. 훨씬 편하고 좋잖아요. 앞으로 상가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 내가 잘할 테니까.”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든든해 절로 마음이 탁 놓였다. 마음이 놓여서일까, 점점 눈이 감겨왔다. * 소파에 잠든 한지감을 보며 김태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길게 반복되었지만 그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마치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전화를 받는 소리와 함께 짜증 가득한 강정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전화할 때는 안 받더니 이 시간에 전화를 해?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새벽 2시 넘었죠. 그것도 모르고 전화했을 것 같습니까?”
김태하가 심상치 않음을 느낌 강정휘가 물었다.
[혹시…… 알아냈어? 안경 벗는 법?]
“그게 아니라면 내가 전화할 이유가 없겠죠.”
[어딘지 말해. 그럼 내가 지금 당장…….]
“올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안경, 이미 제가 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