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김 비서 (1)2021.07.28.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강정휘는 부스스 눈을 뜨고 조명을 켰다. 김 비서에게서 온 전화였다. 아까 전화를 씹혔던 것이 떠오르면서 그녀는 분노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아까 전화할 때는 안 받더니 이 시간에 전화를 해?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새벽 2시 넘었죠. 그것도 모르고 전화했을 것 같습니까?]
분노를 사그라들게 할 정도로 김태하가 풍기는 뉘앙스가 심상치가 않았다.
“혹시…… 알아냈어? 안경 벗는 법?”
[그게 아니라면 내가 전화할 이유가 없겠죠.]
“어딘지 말해. 그럼 내가 지금 당장…….”
[올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안경, 이미 제가 벗겼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안경이 벗기는 현장에는 강정휘가 있어야 한다.
“뭐? 안경을 빼?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안경 벗는 법 알아내면 나에게 먼저 연락하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돈을 주지도 않은 인간에게?]
기가 차다는 듯 김태하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까지 들리자, 강정휘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자신 덕에 밥 벌어먹고 산 거지같은 인간에게 반말을 듣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인간? 지금 반말했어!”
[내가 반말하면 뭐, 어쩔 건데? 안경, 관심 없어? 이대로 포기할 거야?]
그제야 강정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칼자루를 잡고 있는 사람은 김태하였다.
“……원하는 게 뭐야. 설마…… 안경을 원해?”
[강 대표, 생각보다 머리가 나빠. 내가 안경을 원했다면 이렇게 전화를 걸었겠어? 계속 한지감과 접촉하는 척, 꿀꺽하면 그뿐인데?]
화가 치밀었지만 안경을 생각하면서 욕을 삼켰다.
“돈을 원한다, 이거네?”
[맞아. 입금 확인되면 바로 안경을 보내주지.]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안경은 다른 사람에게 팔면 그뿐이니까.]
“그러기만 해봐! 내가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어이구. 무섭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도 수화기 너머 김태하의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했다. 그때 머릿속에 한지감이 안경을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방법이 생각났다.
“하루만 시간을 줘.”
[뭐. 하루쯤이야 충분히 주지. 하지만 명심해. 돈이 먼저라는 걸.]
뚝 전화가 끊기는 소리가 들리자 강정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너 따위가 감히, 전화를 먼저 끊어! 안경만 손에 들어오면 너는 죽은 목숨이야!”
강정휘는 연신 거친 숨을 뱉어냈다. * 아침 일찍 강정휘는 임병규를 만나기 위해 세원 갤러리를 찾았다. 미간을 찌푸린 임병규가 물었다.
“뭐예요, 꼭 만나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탑 옥션에 들어갔다는 애, 약 좀 쳐놨어?”
“쳐놨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전화로 이야기해도 되었을 텐데요.”
그녀는 속셈을 감추려 부러 도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빨리 한지감을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지.”
“벌써 준비가 끝난 겁니까?”
그제야 임병규는 흥미가 생겨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 빨리 한지감이 무너지길 바라는 건 임병규도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끝났지.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여기로 온 거 아니야.”
“그 방법이 뭐예요?”
강정휘는 차를 마시는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방대 출신에 변변치 않은 놈이 어떻게 탑 옥션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해?”
“골동상으로 이름을 떨쳤고, 나이가 젊기 때문이죠.”
“틀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야.”
“그럼 뭐예요?”
궁금해하는 임병규를 애태우듯 강정휘는 소파에 푹 기대앉아서야 대답했다.
“감정 능력, 그게 지금의 한지감을 만들었어. 애초에 황덕현이 한지감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지.”
“글쎄요. 인정하긴 싫지만 한지감은 지금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어요. 아만다 우의 유작, 이순신의 쌍룡검. 굵직굵직한 작품을 위탁받아요. 감정능력이 없어졌다 해도 황덕현이 한지감을 내칠 이유는 없어요.”
임병규의 반박에도 강정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계획의 목적은 안경을 벗었는지 확인하고, 더 나아가 벗었다는 것이 확인이 되었을 때 한지감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 당장은 내칠 이유가 없겠지. 하지만 감정 능력이 없어진다는 것은 한지감의 중심이 흔들린다는 거야.”
어렵지 않게 임병규는 어떤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지감 스스로가 흔들리겠군요.”
“맞아. 스스로가 흔들리면 아주 작은 충격에게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있어.”
그렇게 되면 한지감은 자연스럽게 탑 옥션에서 쫓겨날 것이고, 그 소문을 강정휘는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골동상으로도 활동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강정휘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도 임병규는 의아한 점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감정능력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진 않잖아요.”
“여태까지 능력이 한지감의 것이 아니었다면?”
“네에?”
“무능력한 모습을 온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거야.”
스스로의 계획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강정휘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 9시 5분 전, 한지감은 사무실로 터덜터덜 걸어들어왔다. 곧 9시여서 대부분의 직원들은 자리에 있었다. 퀭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탕비실로 가서 숙취해소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힘들어. 어제 그렇게 달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요?”
“아! 깜짝이야.”
고개를 돌리니 정다영이 의심스런 눈빛을 쏘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 놀래요? 진짜 안 들어갔나 보네?”
“응. 안 들어갔어.”
“그럼 어디서 잤을까아?”
눈을 흘기는 정다영의 모습을 보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움찔했다.
“사……상가에서.”
“김 비서님하고 술판 벌인 거예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에 한지감은 한 번 더 움찔했다. 그러다 문득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울컥했다.
“그래 벌였다! 그리고 성인 남자가 술 먹고 외박을 할 수도 있지, 왜 엄마처럼 그래!”
“걱정돼서 그렇죠. 오빠도 내가 어제랑 똑같은 옷 입고, 퀭한 얼굴로 들어오면 걱정되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아 한지감은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정다영은 한지감의 마음을 다 알겠다는 듯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오빠 마음 다 알아요. 그럼 오늘도 파이팅!”
그 말만 남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정다영의 뒷모습을 보며 한 템포 늦게 한지감은 꿍얼거렸다.
“얼굴은 귀엽게 생겨서 사람 혼을 쏙 빼놓네.”
숙취해소제를 먹어서인지, 들어올 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탕비실을 나갈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 팔환은배의 위탁신청서를 작성했다. 위탁자 명에는 김태하의 이름을 썼다. 본인의 소유를 위탁하는 것이 모양새가 안 좋아 보일 것 같아서였다.
“잘 있겠지?”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고 팔환은배를 상가에 두고 왔다. 김태하가 잘 지킬 테니 걱정할 것은 없다 생각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자태를 아침에 한 번 더 보고 나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위탁 신청서는 고미술팀 정연주에게 보내졌다. 메일 보낸 지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정연주는 그 위탁신청서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지감에게 달려갔다.
“지감 씨, 이 팔환은배 정말 사료에 나오는 거예요?”
“저는 그렇다고 봤어요.”
“지감 씨가 그렇다면 백 퍼센트나 다름없잖아요오.”
흥분한 정연주의 목소리 때문에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한지감은 칭찬에 기분 좋아하면서도 자만에 취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 이야기가 궁금해진 지 팀장이 은근슬쩍 다가와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
“글쎄. 팀장님!”
정연주가 위탁신청서의 내용을 설명하자 지 팀장의 입은 귀에 걸렸다.
“가만있어 봐. 사료에 나오고 그 시기까지 뚜렷한 유물이면 못해도 지정문화재 아니야?”
너무한다는 듯 정연주가 인상을 썼다.
“팀장님, 지정문화재가 뭐예요. 정조가 성균관 유생에게 내린 술잔인데! 보물로 지정되어야죠!”
“그래. 맞아. 내가 말이 헛나왔어. 연주 씨.”
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지 팀장이 한지감을 보다 물었다.
“지감 씨가 또 해냈네! 어떻게 위탁받은 거야?”
“예전에 골동상으로 일할 때 알게 된 분이 연락을 주셔서 좋은 물건 같다고 좀 봐달라고 했는데, ‘팔환은배’ 같더라구요. 운이 좋았죠.”
“지감 씨는 어쩜 사람이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해.”
지 팀장은 대견하다는 듯 한지감의 어깨를 두드렸고, 한지감은 부끄러운 듯 미소 지었다. 모두 그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한 사람 강민수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받아야 하는 관심을 한지감이 모두 빼앗아버렸다. 지방대나 나온 천박한 골동상이 말이다. 한지감이 같은 한국대 출신에 현대미술에 대한 견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고작 저런 사람에게 졌다는 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핸드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임병규에게서 온 전화였기에 그는 유리문을 나와서 받았다.
“대표님?”
[드디어 기회가 왔어. 한지감을 무너트릴 수 있는 기회……!]
“그게 뭡니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말에 집중한 눈빛이 희번덕거렸다. * 똑똑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민수는 빛의 속도로 반응해 문을 열었다.
“대표님, 어서 오세요.”
직원을 대동한 임병규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민수 씨, 잘 지냈어요?”
“그럼요. 저야 잘 지냈죠.”
임병규의 등장에 팀장 3명이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그럼요. 이 팀장도 잘 지냈어요?”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지 팀장, 얼굴이 좋아 보여요.”
모두 백하진의 인터뷰를 기억하고 있지만,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흠집이 가긴 했지만 아직 세원 갤러리는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는 갤러리였고, 임병규는 그곳의 대표였다. 서정선까지 팀장급의 인사가 마치자 영업용 미소를 장착한 김도균이 다가왔다.
“대표님. 안 그래도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말만이라도 고마워요.”
“말만이라뇨.”
“백하진 작가 일, 모른 척할 것 없어요.”
“대표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은 업계 사람들 다 압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옥션 입장에서는 작가보다 갤러리가 훨씬 중요하다. 옥션은 어디까지나 2차 시장이기 때문에 작가와 직접적으로 대면할 일이 적다. 반면 갤러리는 물량이 딸릴 때 비빌 수 있는 언덕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요.”
김도균의 말에 감동받은 듯 임병규는 눈시울을 붉혔다.
“고미술품을 위탁하러 오셨다구요?”
“맞아요. 업체를 시키기 불안해서 이렇게 직접 왔어요.”
“잘하셨어요. 덕분에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거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도균은 어서 임병규가 돌아가주길 바랐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말이에요.”
“네. 말씀하세요.”
“저도 이 유물이 진품인지 궁금해서요. 골동상에게 진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희가 감정위원님들을 통해서 감정하고 빠르게…….”
임병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될 수 있으면 당장 알고 싶어요. 마침 한지감 씨도 있지 않습니까.”
일을 하던 한지감이 커진 눈으로 임병규를 보자 그는 웃으며 부탁했다.
“해줄 수 있죠. 지감 씨?”
“그게…….”
곤란한 한지감을 대신해 김도균이 나섰다.
“한지감 씨는 이제 경매팀 직원이니, 대표님께서 넓은 마음으로…….”
“이거 섭섭하군요. 탑 옥션이 급하게 그림을 원할 때마다 나는 자식 같은 그림들을 내어줬습니다. 유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돌아와도 얼굴 한번 붉힌 일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내 부탁을 이렇게 단칼에 거절하죠?”
여기에 담겨있는 의미는 하나였다. 한지감이 이 고미술품을 바로 이 자리에서 감정하라는 것이다. 김도균마저 난감해하는 사이, 한지감이 용감하게 나섰다.
“제가 감정 하겠습니다.”
“한지감 씨.”
김도균이 말리는데도 한지감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께는 개인적으로 진 빚도 있으니, 이 기회에 갚는다고 생각하죠.”
한지감까지 이렇게 나오니 김도균으로서는 더 이상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럼 회의실로 들어가시죠.”
“미안해요. 내가 폐소공포증이 있어서 저런 작은 방에는 들어가지 못해요.”
회의실 크기는 세원 갤러리의 대표실 크기와 비슷했다. 만약 그 정도 크기에 폐소공포증을 느꼈다면 임병규는 매일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속을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한지감을 창피 주겠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감정해줄 수 있을까요?”
망설임 없이 한지감이 대답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임병규가 턱짓을 하자 직원이 한지감에게 상자를 내주었다. 조심스럽게 상자에서 도자기 접시를 꺼냈다.
“백자접시네요.”
포도 문양이 그려진 백자접시였다. 강정휘가 오래전 일본에 있는 개인 소장자에게 구매한 진품이지만, 화공약품으로 경년변화를 주어 가품처럼 만들었다. 화학적으로 경년변화를 주는 것은 가품의 하나의 공식이기에, 제대로 된 감정 능력이 없다면 가품이라고 할 것이다. 마침내 굳게 닫혔던 한지감의 입이 열렸다.
“진품입니다.”
임병규는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그렇군요.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요?”
“일단 청화문양이 자연스럽고 유려합니다. 그림과 접시의 모양으로 봤을 때 16세기 정도로 추정되는데, 거기에 맞게 모래받침을 하고 있구요.”
날카로운 눈빛을 내며 한지감이 임병규를 보고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 재현품이라고 여기고 화공약품으로 부자연스럽게 경년변화를 줬습니다. 이 부분 때문에 혼란은 있겠지만, 다른 감정위원분들도 대부분 저와 같은 입장일 겁니다.”
시원시원한 한지감의 감정에 임병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도 전혀 다르게 상황이 돌아가자 당황한 그는 급하게 꽁무니를 내빼려고 했다.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야겠군요.”
“조심해서 가세요.”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리문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선 임병규는 굳은 표정이 역력했다. 한지감의 실력을 익히 알면서도 이곳에 온 것은 강정휘의 확신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고 노여워하는 그를 보며 강민수는 어쩔 줄 몰랐다. 그때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지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깜박 잊고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어서요. 강정휘 대표님께 인사 전해주세요.”
강정휘와 작당하여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한지감은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