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원고 (2)2021.08.04.
“왜 그런 무리한 요구를…….”
무언가 생각났는지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찾아오긴 제대로 찾아왔구나. 마른침을 삼키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라면 양 교수님이 왜 그러셨는지 아실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는 황급히 표정을 지워버리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양 교수님이 그런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것도 지금 알았습니다.”
“교수님, 저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럴 위치도 안 되구요.”
“그럼 왜 알고 싶은 겁니까?”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건지, 아니면 상대편에서 무언가 사정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교수님에게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한참을 고민하던 성 교수가 이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양 교수님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한국대 사정을 잘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하는 말이 맞다는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짚이는 부분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식민사관이라는 말, 들어보셨겠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기에 나는 살짝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우리나라가 근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 일본 덕분이다’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사학계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아십니까?”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지도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지도층으로 꼽히는 국회의원, 재벌, 유명 기업 CEO 등의 일부가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언론을 통해서 종종 확인한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성 교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습니다. 그 인식에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한국대 사학과입니다……. 그 중심에는 주인탁 명예교수가 있습니다.”
“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대가 식민사관의 중심지라고? 마른침을 삼키며 성 교수는 말을 이어갔다.
“믿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저도 믿고 싶지 않은 사실입니다.”
“일본은 침략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거지만, 어째서 한국인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야 친일이 잘못된 행동이 되지 않으니까요.”
쓰디쓴 술을 마신 것처럼 성 교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충격을 받은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고, 성 교수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사무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발견했다. * 충격이 채 가시지도 전에 이경숙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여야 했고, 그래서 의문도 잠시 접어놓았다. 그녀는 일주일 전쯤 남편인 도 교수에게, 그림을 그린 사람이 아만다 우이며 자신의 친딸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상황이 어떤지, 마음이 많이 상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 먼저 만나자고 했다. 카페로 들어서자 창가에 앉은 이경숙이 눈에 들어왔다.
“일찍 오셨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음료 제가 멋대로 레몬 차로 시켰는데 괜찮아요?”
“네. 좋아합니다.”
“다행이군요.”
이경숙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늘이 있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그러게요. 주말인데 저 때문에 괜히 못 쉬는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덕분에 바람에 쐬고 좋은데요.”
상황이 어떤지 물어보는 것이 섣불리 그녀의 상처를 건드리는 건 아닌지 걸려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이경숙이 말했다.
“물어봐도 돼요.”
“네……?”
“괜찮은지 걱정돼서 온 거잖아요.”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에 나는 겨우 용기를 냈다.
“도 교수님은…… 괜찮으세요?”
“아직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아만다 우가 내 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더 힘들어하네요.”
“그렇군요.”
당연한 반응이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배우자에게 딸이 있었고, 그걸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면 당연히 충격일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더 버거울 것이다.
“사모님은 괜찮으세요?”
“힘들죠. 쉽지는 않은데 그래도 버텨야죠. 그게 이제라도 바로 잡는 일이니까.”
“바로 잡는 일이요?”
고개를 끄덕인 이경숙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결혼 전에 미리 남편에게 말했어야 했어요. 아니 결혼한 후에라도 말해야 했죠. 바로 잡을 기회는 계속 있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반응이 좋지 않을 것을 아니까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지감 씨 때문이 아니에요.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었던 거죠. 그걸 미루고 미루다가 여기까지 온 거구요. 그러니까 죄책감 같은 것 느낄 필요 없어요.”
“제가 혹시……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을까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 질문이었지만, 내뱉자마자 후회가 되었다.
“너무 바보 같은 말이었죠.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는데…….”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꼭 해드리겠습니다.”
“그림을…… 보고 싶어요.”
아만다 우의 유작은 현재 탑 옥션 수장고에 있었다. 딸의 대신인 그림이니 보고 싶을 것이 당연한데,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말 나온 김에 지금 갈까요?”
“그래도 되나요?”
“당연히 되죠.”
다행히도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나와 이경숙은 어렵지 않게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아만다 우의 그림을 본 이경숙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 모습은 꼭 오랜만에 딸을 본 엄마 같았다. 그런 이경숙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덮어두었던 의문을 꺼내었다.
“확인해야겠지…….”
참담한 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술도 약하면서 왜 이렇게 마셔?”
“…….”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냐?”
“그냥 술이 당겨서 그러죠 뭐.”
“그래도 조금만 마셔라. 몸 상해.”
“네.”
나는 애써 웃으며 답했지만 그후로도 술을 마시는 것은 계속되었다. 아버지와 나누고 싶은 말이 있어 술을 사서 집으로 난데없이 들이닥친 것이었지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소주 한 병을 더 비우고 나서야 나는 술기운을 빌려 말했다.
“아버지. 식민사관의 중심에 한국대 사학과가 있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있지.”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고미술품과 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니 사학을 공부하신 것은 아니어도, 골동상들 틈에서 말이 돌았을 테고 들어봤을 터였다.
“그런데 왜 저에게 한 번도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요?”
아버지는 고미술과 관련된 거라면 하나도 빼지 않고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다. 당시 듣기 싫어 했지만 그 귀동냥이 쌓이고 쌓여서 나는 이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 번도 식민사관의 중심에 한국대 사학과가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한 적이 없었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주를 따른 아버지가 한 번에 술잔을 비워냈다.
“부끄러워서 그랬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으로 꼽히는 곳에서 식민사관이 나온다는 것이 말이나 될 이야기냐.”
“그래도 말씀해주시지 그랬어요. 알아야 할 이야기인데…….”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렇게 알지 않았냐.”
“그렇네요…….”
아버지는 또 다시 술을 따라 마셨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나도 젊었을 적에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었다.”
오늘 내내 나를 괴롭혔던 의문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누가 뒤통수를 때린 것같이 술이 확 깬다.
“아버지가요……?”
“변명이지만 그때는 암암리에 그런 생각이 퍼져있었어. 일본에게 이를 갈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럴 만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나중에 깨달았지. 그게 정말 바보 같은 생각이고, 누군가 그런 생각을 알게 모르게 주입시키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어떻게…… 깨닫게 되셨는데요?”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막 일을 시작했을 때 골동상 선배와 술을 마신 적이 있었지. 그때 식민사관 이야기가 나와서 언쟁이 붙었어. 나는 어쨌든 일본 덕분에 빨리 발전할 수 있지 않았냐고 그랬지.”
“그랬더니요?”
“이런 예를 들더구나. 선배가 높은 가격에 팔아준다는 명목으로 내 물건을 가져갔다고 생각해보라는 거야. 그 물건을 허락도 없이 선배가 팔고서는 판매액의 10%를 던져주면 어떨 그게 정당한 거냐고, 당연히 화가 나지 않겠냐고 하더라.”
물건의 가치를 모르고 판매액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선배’ 덕분에 이 정도 돈을 받을 수 있었다고 여기겠지만, 제대로 안다면 부아가 치미는 상황이다. 나는 아버지를 묵묵히 아버지를 바라봤다.
“그때 정신이 번쩍 났다. 일본은 우리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었구나, 오히려 그 기회를 뺏은 거구나. 그제야 알았다.”
착취의 기반을 닦은 것은 발전이 아니라 부스러기로 주어진 이익일 뿐이다. 문든 나는 그때의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해졌다. 사람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아도 여태까지 주장한 것이 있기에 우기고 싶어진다.
“그 자리에서 인정하셨어요?”
“인정했다. 내가 한참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말이야. 그런데 인정하고서도 그 생각을 씻어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아비가…… 부끄럽지?”
아버지는 내 눈을 보지 못했다. 자식의 눈이 두렵다는 것이 이런 뜻일까?
“아니요. 부끄럽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과오를 저지르잖아요. 하지만 그 과오를 바로 세우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죠.”
눈시울이 붉어진 아버지가 조용히 일어섰다.
“……화장실 좀 갔다오마.”
“네.”
아버지가 들어간 화장실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들리는데 화장실까지 가실 건 뭐야.”
그렇게 말하는 나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언젠가 나도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버지 같은 선택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비장한 마음으로 나는 윤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감 씨, 무슨 일이에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K호텔 로비로 들어선 나는 소파에 앉아 사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감 씨.”
고개를 드니 윤이서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올라가죠.”
윤이서를 따라 VIP 라운지로 들어섰다. 전체적인 구조는 이수지가 자주 가는 A호텔 라운지와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K호텔이 좀 더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인테리어를 둘러보는 나를 보며 윤이서는 싱긋 미소지었다.
“여기가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더 선호도가 높아요.”
“그렇겠네요.”
“지감 씨 부탁이라서 자리를 마련하긴 했는데,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도록에 실을 원고를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잠시 후, 지팡이를 짚은 80대 남자가 VIP라운지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비록 겉모습을 늙어보일지라도 눈빛은 형형했다. 한눈에 그가 주인탁 명예 교수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의 옆에는 수행원이 있었다. 자리로 가까이 오자 나와 윤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윤이서는 특유의 순한 말투로 말했다.
“교수님, 오셨어요?”
“이서구나. 오랜만이다.”
“네. 정말 오랜만에 봬요. 정신이 없어서 연락드리지도 못했네요.”
“괜찮다. 이렇게 보면 되는 거지.”
인사를 마친 주인탁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윤이서가 설명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든 한지감 씨예요. 인사 드려요.”
“안녕하십니까. 탑 옥션 한지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자리에 앉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주인탁은 질문을 했다.
“탑 옥션에서 일을 한다고?”
“네.”
“어떤 팀에서 일하지?”
“근현대미술팀에서 일합니다.”
“그렇군.”
자신과 상관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는지 주인탁은 심드렁해졌다.
“회사를 들어오기 전에는 골동상으로 일했습니다.”
“지감 씨, 뛰어난 감정사예요. 소문이 자자한데 못 들어보셨어요?”
윤이서가 맞장구를 치자 주인탁의 흥미가 다시금 생겼다.
“골동상이었는데 옥션에서 일을 하다니 특이하구만. 그런데 왜 근현대미술팀에서 일을 하지?”
“현대미술을 공부하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배정되었습니다.”
“그렇구만.”
차 한 모금을 마신 주인탁이 물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뭔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무리를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부탁?”
“네. 혹시 이순신의 쌍룡검이 이번 탑 옥션 메이저 경매에 나온다는 말을 들으셨습니까?”
“이야기야 들었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처럼 주인탁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런 주인탁을 보고 나는 제안을 건넸다.
“쌍룡검에 대한 소책자를 만들 계획입니다. 거기에 교수님의 글을 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