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원고 (4)2021.08.09.
당연히 유찰되었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서정선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다.
“41억, 42억.”
내가 잘못 본 건가? 도대체 누가 든 거지? 얼이 빠져서 두리번대는데, 서정선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찰되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옆에 있는 다영에게 물었다.
“방금 누가 패들 들었어요?”
“오빠 왜 그래요? 내정가 감추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아……. 그렇지.”
내정가를 외부적으로 감추기 위해, 아무도 패들을 들지 않았는데도 경매사가 연기할 때도 있다. 유찰에만 신경 쓰다 보니 잊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똥 씹은 것 같은 강민수의 표정을 보자 그 기쁨을 배가 되었다. 그때 진동이 느껴져 핸드폰을 보니, 강 회장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한지감입니다.”
[5분 뒤 도착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쁨도 잠시 나에게는 또 다른 싸움이 남아있었다. 바로 이순신의 쌍룡검이다. 계획대로라면 이순신의 쌍룡검은 강 회장에게 낙찰되어 국가에 기부된다. 이것도 여러 변수가 있기에 실현되기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개인적인 욕망이 하나 더 있다. 주인탁을 비롯한 무리들에게 보란 듯이 쌍룡검이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다.
“잘될 거야. 아니, 반드시 잘돼.”
* 로비로 내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강 회장이 비서실장과 보안직원 2명을 대동하고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로비는 술렁였다. TV에서만 보던 사람이 실제로 나타나니 그럴 만도 하다. 메이저 경매가 있을 때마다 강 회장은 미술품을 낙찰받았지만, 이렇게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저벅저벅 다가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고생은 무슨.”
“준비는 잘하셨습니까?”
강회장이 낙찰받는 순간을 찍어줄 홍보팀의 준비가 잘되었냐는 물음이었다.
“당연하죠. 기왕 판을 벌이는데,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강 회장과의 인사를 마치고, 비서실장과 눈인사를 했다. 바로 경매장으로 이동하였고 미리 맡아두었던 자리에 강 회장과 비서실장이 앉았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26번 번호판을 주고 직원석으로 가서 앉았다. 경매번호 123번에 들어서자 나는 권미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127번 미술품을 전화로 응찰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금 몇 번이에요?]
“123번입니다.”
[곧이네. 떨린다.]
“저도 떨리네요.”
[하나도 떨리는 목소리가 아닌데요?]
나는 웃음으로 상황을 넘겼지만 정말 떨렸다. 인턴은 전화, 서면응찰에 참여할 수 없기에 이번이 스페셜리스트로서 첫 응찰 데뷔였다. 옆에 말소리가 들릴까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입을 가렸다.
“포도도 얼마까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1억 5천이요. 그 정도면 낙찰 받을 수 있을까요?]
“네. 경합만 붙지 않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안 들리도록 신경 쓰는 것은 통화 내용이 혹시 모를 정보 유출로 이어질까 봐서이다. 각자 자신의 고객이 낙찰받기 바라기에, 평소에는 동료였지만 이곳에서는 경쟁자였다. 권미애와 이야기를 나누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눈에 익은 모습이 들어왔다. 얼마 전 호텔 VIP라운지에서 봤던 주인탁과 수행원이었다. 왔구나……!
[지감 씨 지금은 몇 번이에요?]
권미애의 목소리에 나는 번쩍 정신이 들어 화면을 봤다.
“126번입니다. 곧 시작합니다.”
경매의 진행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다. 조금만 넋을 놓았다가는 응찰도 못하고 이 시간이 끝나버릴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일단 집중하자. 서정선이 부드럽게 127번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127번 작품,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포도도입니다.”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전해진다’는 것은, 그림으로 봤을 때 신사임당의 것이 맞다고 추측되나 인장이나 관서가 없을 때 하는 말이었다. 이런 경우 인장과 관서가 있는 경우보다 가격이 낮아진다.
“시작했습니다.”
직원 자리에 앉은 나는 입이 바싹 타틀어가는 느낌이 드는데, 경매대 위의 서정선은 태연하게 설명을 한다.
“팔천만 원부터 삼백만 원씩 호가하겠습니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9번 팔천, 팔천삼백, 팔천오백,”
너무 빠르게 진행돼서 패들을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올렸다. 서정선이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팔천팔백!”
하지만 안도하기엔 이르다. 경쟁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객석에 앉아있는 13번 현장 고객이었다. 나와 13번 현장 고객의 경합이 벌어졌다.
“구천, 구천삼백, 구천오백, 구천팔백, 일억! 이제부터 호가를 천만 원으로 하겠습니다.”
이거 금방 일억 오천 되겠는데……? 하지만 일억 오천을 넘기진 않을 것이다. 안경에서 본 최고가가 일억 사천이었다.
“일억 천, 일억 이천!”
일억 이천을 부르며 서정선이 나를 지목했다. 13번 현장고객이 패들을 들지 않자 서정선이 물었다.
“일억 삼천 없으십니까?”
현장고객은 패들을 들지 못했고, 서정선은 나를 보고 말했다.
“53번, 낙찰되셨습니다.”
예스! 낙찰되었다. 나는 바로 이 기쁜 소식을 권미애에게 전했다.
“낙찰되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지감 씨.]
“아닙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나는 한숨 놓을 수 있었다. 나는 강 회장 쪽을 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침착한 모습이었다. 직원들은 그와 가까운 곳에서 낙찰 받는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도 부지런히 강회장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안경에서 본 쌍룡검의 최고가가 십칠억이라서 나는 십팔억 정도를 생각해 달라고 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경매번호 134번, 이순신의 쌍룡검뿐이다. 빠른 진행 속도 때문에 눈 깜짝할 사이에 134번이 되더니 화면에 쌍룡검의 사진이 떠올랐다. 쌍룡검으로 인해서 경매현장은 한껏 더 달아올랐다. 지 팀장이 이 회장의 번호인 1번 패들을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강 회장과 이 회장의 싸움이다.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서정선이 말했다.
“이번 경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쌍룡검입니다. 도록에서 확인하실 수 있듯이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유물이며,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쓰셨던 물건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910년 자취를 감추었다가 1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십억에서 시작, 오천만 원씩 호가합니다.”
서정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 팀장이 패들을 들었다.
“십억.”
강 회장도 지지 않고 들었다.
“십억 오천.”
다른 사람들도 패들을 들었다.
“십일억, 십일억 오천, 십이억!”
하지만 십오억이 되자 결국 강 회장과 이 회장의 싸움이 되었다.
“26번 십오억 오천, 십육억!”
머뭇거리기 시작하는 지 팀장과 달리, 강 회장은 망설임 없이 패들을 들었다.
“26번 십육억 오천, 17억 없으십니까?”
서정선의 시선이 지 팀장에게 향했다. 그는 입을 가린 채 열심히 통화를 했지만 1번 패들을 들지는 못했다. 26번 번호판을 가리키며 서정선이 낙찰을 알렸다.
“26번 고객님 낙찰되셨습니다.”
현장에 있는 고객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강 회장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로 목례로 감사인사를 전했고, 그 모습은 방송국과 도강그룹 홍보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는 곧바로 주인탁을 보았다.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주인탁은 화면 속 쌍룡검을 노려봤다. 쌍룡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 상황이 몹시 노여운 듯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가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이 상황이 참기 어려운지, 주인탁은 이를 악물고 수행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나는 재빨리 뒤를 쫓으려 했지만 많은 인파 때문에 놓쳐버렸다. 하는 수 없이 미친 듯이 속력을 내서 계단으로 내려갔다. 로비에 도착했을 때 회전문을 향해가는 주인탁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인탁 교수님!”
나를 본 주인탁이 걸음을 멈췄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제가 안내했을 텐데요.”
“갑자기 결정된 터라, 이렇게 됐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네. 좋습니다!”
“쌍룡검이 고가로 낙찰되었기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렇죠.”
싸한 미소가 주인탁의 입가에 스쳤다.
“그렇군. 쌍룡검 소책자를 아주 잘 만들었더군. 내가 없이도 말이야.”
“교수님들이 잘해주신 덕분이죠. 제가 뭐, 한 것이 있나요. 언제 꼭 교수님께 원고를 받고 싶습니다.”
“재밌는 친구구만.”
“감사합니다.”
주인탁의 서슬퍼런 시선이 몸에 닿지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었다.
“그만 가보겠네.”
“살펴가세요.”
인사를 받으며 주인탁이 건물을 나갔다. 멀어지는 주인탁의 모습을 멍하니 보는데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엘리베이터에서 강 회장과 비서실장이 내렸고, 방송국 카메라와 홍 기자가 강회장을 따라왔다. 도강 그룹 홍보팀과 상의된 그림이었다. 휴대용 마이크를 든 홍 기자가 강 회장에게 질문했다.
“이순신의 쌍룡검을 낙찰받으셨는데요. 기분이 어떠십니까?”
“더없이 좋습니다. 평소 이순신 장군을 존경해왔습니다.”
걸음은 멈춘 강 회장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저도 이순신 장군을 존경해왔기에 강 회장님이 무척 부럽네요. 이런 마음을 가지신 분이 많을 것 같은데, 전시회를 열어 많은 분들에게 쌍룡검을 보여주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저는 없지만, 언젠가 국민 여러분 모두가 볼 수 있는 자리에 쌍룡검이 있을 겁니다.”
애매모한 답변에 홍 기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낙찰 받지 못했을 때를 대비하여 기부에 관하여는 알리지 않은 탓이었다.
“언젠가요?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쌍룡검은 본래 나라 소유의 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려 합니다.”
“기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말이 나오자 홍기자의 얼굴엔 생기가 띠었다.
“쌍룡검이 고가이다 보니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요.”
“나라의 물건이니 되돌려놔야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뿐입니다.”
강회장은 내 제안을 단번에 승낙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정말 단번에 승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며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 한 가지만…….”
홍 기자는 강 회장을 따라붙으려 했지만 보안팀의 제재에 그러지 못했다. 그사이 비서실장은 강 회장을 모시고 안전하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치고 빠지는 것이 정확하네.”
강 회장은 언론에 알려지길 바라는 것만 정확히 던져주고는 자리를 떴다. 역시 재벌 총수는 다르구나. 이러나저러나 오늘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서 좋았다. 응찰한 유물이 권미애에게 낙찰되었고, 아만다 우의 작품은 유찰되었으며, 쌍룡검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최고가와 얼마 차이나지 않는 금액으로 낙찰되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집으로 돌아온 주인탁 수행원의 손에 들린 쌍룡검 소책자를 가로채듯 가져갔다. 벅벅 소책자를 찢는 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수행원은 공포를 느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갈기갈기 소책자를 찢고서야 화가 풀렸는지, 소파에 털썩 앉으며 턱짓했다.
“치워.”
“네.”
수행원은 재빨리 찢어진 종이를 수습해 서 버리고 다시 주인탁 앞에 섰다.
“쌍룡검 따위가 뭐가 특별하다고, 저 난리를 피우지?”
“그러게 말입니다.”
“일본에 입은 은혜가 얼만데. 은혜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놈들.”
“고정하세요.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
그 말에 동의하듯 주인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딴 놈들 때문에 내 몸이 상해서는 안 되지. 원고 준 교수, 학과장에게 전화 넣어서 내가 보잔다고 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놈에 대해서 좀 알아봐.”
“한지감 씨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놈. 어떤 놈인지 알아봐야겠어.”
“네.”
한지감을 떠올리는 주인탁의 표정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 경매가 끝나고 경매팀은 모두 뒷정리를 시작했다. 낙찰률 78%의 나쁘지 않은 성적에 피곤했지만 기분은 좋아보였다. 단 한 사람, 강민수만 빼고 말이다. 그는 상을 당한 것처럼 죽상을 하고 있었다. 소책자를 상자에 담으며 나는 다영에게 슬쩍 물어봤다.
“왜 저래?”
“아만다 우 작품 때문에 그렇죠.”
“아…….”
낙찰받지 못한 이수지가 전화로 난리를 친 모양이다. 그제야 나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워진 내 표정을 보고 다영이 물었다.
“오빠. 왜 그래요?”
“이수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 아니야.”
이수지는 소장자를 알아낼 터이고, 그 과정에서 이경숙이 감추고 싶은 이야기가 공개될 가능성이 컸다.
“강 회장님처럼 기부하면 못 그러지 않을까요?”
“이수지 성격에? 그림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더 약 올라서 독사처럼 달려들걸. 그리고 감추고 싶은 사연을 온 세상에 드러내서 분풀이하겠지.”
“그렇네요.”
이수지의 성격을 알 만큼 아는 다영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부는 소장자도 원하지 않아.”
“그럼 어쩔 수 없죠……. 소장자분 볼 수 있도록 거의 매일 수장고로 같이 가셨다면서요?”
“응.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까.”
“이수지에게 넘어가도 계속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다영의 말을 들으니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 맞아. 이런 적 있었어! 어쩌면 이것이 이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