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 비서 (2)2021.08.14.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경매팀 전원이 회의실로 소집되었다. 김도균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이중에 진영대 회장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어요?”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나서지 않자 서정선이 나섰다.
“알기야 하지만 5-6년 전부터 미술업계 관계자들의 연락은 직접 받지 않으시다는 걸 알잖아요. 대리인을 통해서 모든 걸 처리해서 있던 친분도 없어졌죠.”
지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영향력이 있다 보니까 청탁이 여기저기서 들어오고, 그래서 친분 자체에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김도균이 다시 물었다.
“현재 친분이 이어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눈치를 보며 서정선은 대답했다. 이 비서와 진 회장의 인연을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난데없이 강민수가 끼어들었다.
“진 회장과의 친분은 왜 물어보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강민수뿐만 아니라 경매팀 모두가 궁금해했다. 무언가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이렇게 경매팀 전원을 회의실에 모여 친분을 물어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 회장이 소장한 작품 중 위탁받고 싶은 것이 있어 그럽니다. 상황은 충분히 알았으니 이만 나가보세요.”
미적거리면서 사람들이 다 나가길 기다리다 김도균에게 다가갔다.
“총괄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하세요.”
“아직까지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비서님이 진 회장님과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눈이 동그래진 김도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요?”
“친분이 있냐고 물으셨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아냐고 묻지는 않으셨잖아요.”
“사람이 왜 이렇게 지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좁은 해석이 야속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푸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잖아요. 총괄님.”
“그래요. 잘했습니다.”
씨익 웃은 김도균이 서둘러 회의실을 나가더니, 유리문을 지나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곧장 이 비서에게 갈 모양이다. 내가 자리로 돌아오자 모두 김도균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모르는 척 시침을 딱 뗐다. * 점심시간은 직장인의 하루에서 오후의 시간을 버티게 해 주는 피로회복제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하필 그 점심시간에 김도균의 부름으로 나는 회의실에 잡혀 있었다. 무슨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려고 사람들이 다 자리를 비운 시간에, 그것도 이 비서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일까? 대강 진 회장과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 어째서 나를 부른 것일까? 두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 결국 먼저 물어봤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지감 씨, 평소에 진 회장님 만나고 싶었다고 했죠?”
“네. 그렇죠.”
분명 사실인데, 확인하는 김도균의 뉘앙스가 불안감을 자극한다.
“이 비서와 같이 만나 보는 거 어때요?”
이 비서는 동그란 눈을 하고 내가 그렇게 답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어째 달콤한 먹이로 사냥감을 유인하는 그런 느낌이다. 이럴 때는 섣불리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 때문에 만나야 하는 건지 먼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김도균의 얼굴에 아쉬움이 흘렀다. 사냥에 실패한 사냥꾼이 딱 저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는 빠르게 표정을 지워내고 별인 아닌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다지 큰일은 아닙니다. 훗날을 위해 인연을 만들려는 것뿐이에요.”
나는 김도균이 무얼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얼굴을 봤다. 하지만 다년간 고객을 상대한 그는 표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얼굴에서 무언가 읽을 수 없다면 전체적인 바디랭귀지를 살펴야한다. 손가락으로는 톡톡 책상을 두드리고, 한쪽 다리는 떨고 있다. 훗날을 위해 인연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훗날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정확하게 말씀해주세요. 그래야 제가 거절을 하든 수락을 하든 할 것 아닙니까.”
정곡을 찔린 김도균이 끙 하는 사이 이 비서가 입을 열었다.
“총괄님, 다 말씀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 비서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김도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 회장의 재정상태가 최근 많이 악화되었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맞는 정보이지만 다 이야기하지는 않은 느낌이 든다.
“단순히 악화입니까. 아니면 아예 파산입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파산에 가깝다고 합니다.”
고급 미술품이 시장에 쏟아지는 3D중 하나인 빚(Debt)이다. 거기에다 상대는 한국의 찰스 사치로 불리는 진 회장 아닌가. 스카이 옥션, 각종 골동상과 갤러리가 노리는 기회였다.
“그런 거라면 오랫동안 진 회장과 알고 지낸 이 비서님이 나서시는 것이…….”
“제가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이 자리가 마련된 겁니다.”
이 비서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고, 김도균은 그런 이 비서를 다독였다.
“그렇게 마음 쓸 것 없어요. 여기 한지감 씨가 있지 않습니까.”
잠깐만. 거기에서 왜 내가 나와? 정말 어이가 없네. 정리하자면, 편한 식사자리가 아닌 친분을 쌓고 비즈니스를 따내야 하는 그런 뒷골 당기는 자리였다. 내가 원한 건 그런 뒷골 당기는 자리가 아니다.
“총괄님, 저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니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그냥 이렇게 넘어가 주는 건가 정말 다행…….
“어려워도 해야 해요. 어쩔 수 없어요. 한지감 씨.”
“네? 왜 제가……? 팀장님들이나 책임님들하고 자리를 만들면 되잖아요.”
또 다시 고개를 숙인 이 비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미 지감 씨가 뵙고 싶어한다고 말을 해버렸거든요…….”
베토벤의 운명이 귓가에 들려온다. 잘못 들은 거길 바라 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내가 가는 건 확정된 일인 것이다. 더없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김도균이 말했다.
“지감 씨라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너무 황당하다 보니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되자 사람들이 속속 돌아왔다. 나는 밥을 먹으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진 회장을 설득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허덕이는데 이수지에게 문자가 왔다. ‘아만다 우 그림, 탑 옥션에서 직접 받을 수 있어?’ 아. 배송 문제가 남아 있었지, 참……. 정신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배송 확인을 위해 나는 서정선에게 다가갔다.
“지감 씨. 점심 먹었어?”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아직 못 먹었어요.”
“얼른 점심 먼저 먹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네. 먹을게요.”
경매대 아래에서의 서정선은 동네 누나처럼 친근했다. 그 온도 차이가 엄청나, 어제 내가 봤던 사람이 정말 같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팀장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말해봐.”
“유찰된 그림을 출품자의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배송할 수 있나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작품 관리팀에 물어봐.”
“네.”
나는 작품 관리팀이 있는 수장고 옆에 있는 작은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차분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상석에 앉은 박제형 팀장이 눈에 들어왔다. 산도적 같은 외모와 다르게 말과 행동은 귀여운 느낌이 들고, 일처리에 있어서는 꼼꼼했다. 배송하고 수장고에 왔을 때 몇 번 봐서 안면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어. 지감 씨. 어쩐 일이야?”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유찰된 그림의 배송을 출품자 주소지 외에 다른 곳으로 해도 괜찮은 건가요?”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회사 규정상 그건 어려운데…….”
“그럼 다른 배송회사에서 가져가는 건 괜찮죠?”
“그거야 당연히 괜찮지. 어떤 작품 때문에 그래?”
“아만다 우 작품이요.”
“그새 다른 사람한테 팔렸어?”
나는 미소를 띤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현성 미술관에 대여됐거든요.”
“아아. 그렇게 됐구나. 안 그래도 안타까웠어. 좋은 작품인데 유찰이 되어서. 내정가만 조금 낮았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내정가 문제는 경매팀에서도 나와 김도균, 서정선, 이 팀장만 알고 있는 사정이었기에 나는 모르는 척 맞장구를 쳤다.
“그럼 아만다 우 작품은 일단 수장고에 두는 걸로 할게.”
“네. 배송회사 오면 제가 직접 내려올게요.”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책상 하나가 비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도 보니 낯익은 얼굴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박 팀장이 말했다.
“동구 씨가 얼마 전에 일을 그만뒀어.”
“무슨 일이 있었어요?”
“수장고 관리하고, 작품 배송하는 것이 안 맞았나 봐. 고향 내려가서 부모님한테 농사 배우겠다고 하더라구.”
“그랬군요.”
박 팀장이 사무실이 푹 꺼질 정도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 구해야 하는데 걱정이야.”
“지원자가 꽤 있지 않아요?”
“지원자야 있는데, 일이 고되기도 하고 생각보다 전문성을 요하는 일이어서 잘 못 버티더라구.”
“아무래도 그렇네요. 작품 관리가 쉽지 않죠.”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살짝 멍해지는데 박 팀장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바쁜 사람 잡고 내가 말이 너무 많았네.”
“제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가볼게요.”
2층 사무실로 올라와 자리에 앉았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옆자리 책상을 톡톡 두드렸고, 책상 주인인 장희정이 나를 봤다.
“선배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작품 관리팀 보통 칼퇴하나요?”
“칼퇴까진 아니어도 저희보다는 빨리 끝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일단 배송을 밤늦게 하지 않잖아요. 물론 경매 당일이나 배송 몰리면 정신이 없지만, 며칠 제외하면 괜찮다고 들었어요.”
“그렇군요.”
나는 희망을 찾은 사람처럼 들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장희정이 물끄러미 보더니 상당히 큰 목소리로 물었다.
“작품 관리팀으로 넘어갈 생각이에요?”
“아니…….”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서정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 다가왔다.
“지감 씨, 작품 관리팀 가?”
“그……그게…….”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사이, 남의 일에 잘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백 책임이 입을 열었다.
“매일 늦어지는 퇴근에 지친 거지. 나는 이해해, 지감 씨.”
그 말에 서정선은 흥분했다.
“백 책임, 이해하기는 뭘 이해한다는 거야! 선배가 돼서 팀의 인재가 다른 쪽으로 가려고 하면 무슨 일인지 살펴봐야지!”
“말린다고 듣겠습니까? 이미 결정한 것 같은데…….”
화가 난 서정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더 있다가는 상황이 악화될 것 같아서 나는 과감하게 끼어들었다.
“저 안 갑니다. 작품 관리팀 저언혀 갈 생각 없습니다!”
“정말이야?”
내 말이 믿겨지지 않는지 서정선이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저는 경매팀, 그중에서도 근현대미술팀이 정말 좋습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되는 장희정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 작품 관리팀은 왜 물어봤어요?”
“친한 동생에게 추천해주고 싶어서요.”
그제야 서정선은 안도하며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거면 진작 말을 하지. 괜히 오해했잖아.”
말을 하려고 했죠! 그런데 제 말을 안 듣고 몰아붙이셨잖아요! ……라고 말할 수 없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고, 서정선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장희정에게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어떻게 하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또 큰 소리로 대답할까 봐 포기했다. * 고급스런 레스토랑에서 나는 이 비서와 함께 진 회장을 만났다. 이 비서가 살갑게 진 회장에게 인사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이 녀석, 그 다나까 좀 사용하지 말라니까.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말이야.”
“입에 배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긴, 고치기 싫은 거 아니고?”
“그런 거 아닙니다.”
인사가 끝나자 진 회장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왔다. 이 비서가 나를 소개했다.
“말씀드린 한지감 씨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지감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 아닐 수가 없지.”
60대인 진 회장은 보라색 정장을 스타일리시하게 소화하는 멋쟁이였다. 아버지 나이와 비슷한데도 느낌이 전혀 다르다. 재벌가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들과는 또 결이 다른 느낌이 든다.
“탑 옥션에서 일한다고?”
“네. 근현대미술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은 재밌어?”
“네.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시크하게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개월 안 되었으니 일 배우는 것이 한창 재밌을 때야.”
“회장님도 일을 처음 배우셨을 때 재밌으셨습니까?”
친분을 쌓기는 위해서는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그럼. 일을 가르쳐주면서 돈까지 주다니, 정말 좋은 조직이라고 생각했어. 근무 2년 만에 돈 더럽게 안 주는 곳으로 생각이 바뀌었지만 말이야.”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이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분위기는 좋아졌고,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런 분위기라면 위탁 이야기를 꺼내도 ‘그래. 그렇게 하지’라고 손쉽게 허락을 맡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이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이 비서가 자리를 비우자 진 회장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보았다.
“참 열심이네.”
“네?”
“위탁받으려고 참 열심이라고. 그런데 어쩌나, 소용없게 되었는데.”
싸한 표정에 나는 몸이 굳어버렸다.